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32화 (32/85)

32화. 덫

“네가 날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선아는 고개를 들어 재혁의 얼굴을 보았다. 재혁은 진심으로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재혁 씨 안 챙기면 누가 챙겨.”

“나는 네가 결혼에 대한 기대감이 커서 신혼집 입주도 결혼 후에나 할 줄 알았거든.”

“결혼에 대한 로망보다도 재혁 씨 사정이 우선이지.”

과거 선아는 결혼 이후까지 신혼집 입주를 미루고 또 미루었다.

결혼에 대한 환상이 컸던 그녀는 첫 관계도, 신혼살림도 결혼과 동시에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도 그 집 비밀번호를 알아내 그곳을 들락거렸던 게 재혁이었다.

물론 혼자 들락거린 것도 아니었다. 클라우드를 통해 확인한 결과, 희진이 그것은 남의 신혼집에까지 찾아와서 입주도 안 한 신혼집에서 머물다 가곤 했다.

대체 어떤 못된 마음으로 그런 사진까지 찍어두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 결과 선아는 그들의 추악한 짓거릴 거의 빠짐없이 알 수 있었다.

연놈들이 집에서 서로 물고 빨고 별짓을 다 한 것도 모르고 선아는 신혼집 입주 날만을 기다렸었다.

“도어록을 달아두긴 했는데, 아직 비밀번호 설정을 안 해둬서 1111이야. 재혁 씨가 편한 대로 비밀번호 설정해서 써.”

이제 그런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다.

집은 재혁의 외도 증거를 더욱 확실하게 잡기 위한 함정일 뿐이다.

“너는? 너는 같이 안 살아?”

“엄마가 조만간 의료시술을 받아야 할 거 같아.”

“어머님이?”

“응.”

“어디 편찮으셔?”

“심각한 건 아니고. 그래도 결혼 전까지는 내가 곁에 있어야 할 거 같아.”

엄마의 뇌동맥류가 심각하지 않다고 둘러댄 것은 재혁의 입이 지나치게 가벼워서였다.

선아가 입원한 틈을 타 둘이 결혼할 사이라고 소문낸 사람이니, 엄마의 건강 문제를 또 어디에 떠벌릴지 알 수 없었다.

재혁이 HS 엔터테인먼트에 욕심이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엄마의 건강에 대해 굳이 발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재혁 씨. 당분간은 재혁 씨 편한 대로 비밀번호 설정해놓고 재혁 씨가 신혼집 써. 결혼 전까지는 사생활 존중해줄게.”

“아니, 뭐 그렇게까지는…….”

“진심이야.”

선아가 재혁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재혁을 바라본 채 미소 지었다.

“누가 그러더라고. 부부간에도 사생활이 있어야 사이가 더 원만하다고.”

물론 그거야 양심 있는 부부들의 이야기였고 재혁은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선아는 진심으로 그를 믿는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고마워, 선아야. 나는 네가 날 이렇게까지 배려해줄 줄 몰랐어.”

선아는 재혁의 손을 놓고는 아쉽다는 듯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아. 엄마가 안에서 기다리거든. 재혁 씨도 얼른 가서 쉬어.”

“응. 정말 고마워. 이 은혜 잊지 않을게. 선아야.”

“우리 사이에 은혜가 어딨어.”

은혜는커녕, 그에겐 복수뿐이 돌려줄 게 없다.

“그럼 들어가 볼게, 재혁 씨.”

“응. 푹 쉬어, 선아야!”

재혁에게서 돌아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초저녁인데도 집 안엔 기척이 없었다. 엄마와 새아빠는 일찍 안방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선아는 어두운 얼굴을 한 채 방으로 향했다.

솔직히 그 집 열쇠를 재혁에게 건네주고 싶지 않았다.

세빈이가 태어나면 아이와 추억이 가득한 그 집에서 다시 살고 싶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곳은 허물어져 버린 성이었다. 아이와 추억이 가득하였지만, 아이를 잃은 뒤의 허무함 또한 그곳에 배어 있었고, 자신이 죽은 곳이기도 했다.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공존하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세빈이와 살던 집이기에 재혁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선아는 집 열쇠를 재혁에게 주었다.

그렇게 함으로 재혁이 더 적극적으로 외도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선아는 버릇처럼 손끝을 깨물었다. 살갗이 벗겨진 손끝에서 따끔한 감각이 일었다.

아프고 쓰라리지만, 강박적으로 손끝을 깨물면서 생각했다.

둘을 감시하기 좋은 곳에 함정을 팠고, 그곳에 재혁을 몰아넣었다.

재혁이 외도를 할 무대는 갖추어졌다.

이제는 가만히 앉아 그들이 외도한 증거가 손에 들어오길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

아침 식사 자리에 식구들이 둘러앉았다.

푹 자서인가 개운한 현숙과 달리 성구의 눈 밑이 퀭했다.

선아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기도 전 현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이이랑 이야기해 봤는데, 코일인가 뭔가 그 시술 있잖아.”

성구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여보, 코일 색전술.”

“아이고, 맞다.”

현숙이 자신의 이마를 탁 치자, 성구는 깜짝 놀라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뇌혈관이 안 좋다면서 머리를 그렇게 함부로 치면 어떡해!”

평소 조용한 말씨와 다르게 소리까지 지르며 놀라는 성구에게 현숙은 저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말해버렸다.

여장부인 현숙이었지만 성구 앞에 서면 여자가 되었다.

가장이자 사업가로 살았던 현숙은 뒤늦게 사랑을 하면서 삶의 재미를 깨우치고 있었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 때문에 한때 선아는 결혼이 행복의 완성이라고 생각했었다.

태어날 적부터 아버지가 없었던 선아는 성구와 현숙의 부부생활이 부모의 부부생활을 본 처음이었다.

그랬기에 결혼하면 다들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안 것이다.

“새아빠.”

“응?”

“어제 두 분 일찍 주무시는 거 같더니, 엄마 수술 이야기했나 봐요.”

“응. 의사가 1년 안에 수술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면서.”

“네.”

“그럼 굳이 미룰 필요 없이 빨리 수술하는 게 어떨까 싶어. 선아 네 식 치른 이후에라도 바로 수술 날 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선아도 그편이 좋았다. 결혼이 한 달밖엔 남지 않았다.

결혼 이후에 바로 수술을 한다면 그때쯤이면 임신 초기이니 엄마를 돌보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고, 곧바로 수술을 하는 거니 엄마의 건강을 위해서도 좋을 터였다.

“저도 그편이 좋을 것 같아요.”

“좋긴 뭐가 좋아.”

뜻밖에도 현숙이 선아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두 사람 사이에 수술 협의가 끝난 줄 알았던 선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를 바라봤다.

“빅터 프로그램 신뢰도 조사도 끝이 났고, 이제부터 새로운 마케팅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데, 이럴 때 수술이 웬 말이냐고.”

“회복이 오래 걸리는 수술도 아니라잖아.”

“의사들 말 하루 이틀 들어? 그러다 머리 싸매고 누우면 어떡해. 아파도 할 건 하고 아파야지.”

현숙은 더 말하지 말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녀의 반응으로 보아 시술을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못해 할 것이 분명했다.

“엄마. 말이 되는 소릴 해. 예방 차원에서 하는 수술인데 최대한 빠르게 해야지.”

식사 시간 내내 설득이 이어졌지만, 현숙은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엄마, 새아빠 말 들어. 걱정 많이 하시잖아.”

원래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일찍 출근하는 선아였지만, 그날은 엄마를 설득하느라 늦어졌고, 결국엔 현숙과 함께 출근하게 되었다.

“엄마, 괜한 고집 부리지 마.”

“너야말로 철없는 소리 하지 마.”

운전대를 잡은 현숙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선아의 말을 잘랐다.

“철없는 소리가 아니야. 엄마 건강 문제잖아.”

때마침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오자 현숙은 차를 멈춰 세우고 조수석에 앉은 선아를 바라보았다.

“선아야.”

“응.”

“지금 우리 회사 중요한 시기잖아.”

현숙이 말이 맞긴 했다. 빅터 프로그램 가동에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다.

유투북 측과 데이터 협약을 맺었다고 하나 협약의 대가로 빅데이터 사용료를 지불해야 했고, 프로그램 가동을 위해 서버실을 마련하는 데 또한 수십억 원의 예산이 필요했다.

도진이 투자를 받아왔다고 하나, 투자자들이 도진과 빅터 프로그램만을 보고 투자를 결심한 게 아닐 것이다.

“내가 아프단 소문이 돌면 새로운 시도는 시작도 전에 난항에 부딪혀.”

투자자들이 돈을 투자하기로 결심한 데는 HS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믿음과 사장인 현숙에 대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흔들리면 도진이 날개도 꺾일 거고.”

도진의 외모를 보고 뽑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현숙만큼 도진의 진가를 제대로 아는 이도 드물었다.

10년 주기로 버블과 딥이 교차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면 가장 훌륭한 투자자는 엄마가 아닐까, 선아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도진이 추락하면 류 이사장님 볼 면목이 없지. 내치듯이 얼굴 안 봐도 늦둥이 막내아들에 대한 기대가 대단하신 분이야.”

“…….”

“적어도 도진이가 제대로 하는 건 보고 수술실에 들어가야지. 게다가 아무런 준비도 안 해놨는데 고꾸라질 순 없지.”

“준비? 무슨 준비?”

그사이 신호가 바뀌었고, 현숙은 가속페달을 밟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간단하다고 해도 뇌 수술이야. 당연히 유언장이라도 준비해놔야지.”

“유언장? 아빠랑 내 앞으로?”

선아의 입에서 아빠란 말이 나오자 현숙은 피식 웃었다.

“성구 씨는 재산에 욕심이 없어. 욕심 없는 좋은 남자야.”

“그럼?”

“엔터 사업 시작한 것도 너 하나 남부럽지 않게 키워보려고 했던 거야. 다른 건 몰라도 회사 주식은 네 앞으로 가게끔 유언장 쓰고 공증받아야지. 그전까진 수술에 ‘수’ 자도 꺼내지 마.”

단정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단정 같은 말에 선아는 또 한 번 미래가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다른 삶에서 죽은 엄마의 재산은 법정 상속분대로 선아와 성구가 나누어 가졌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건강이 이상이 있다는 걸 깨달은 현숙은 그 모든 걸 선아에게 주고자 하고 있었다.

선아는 땀이 흥건해진 손바닥을 정장 바지에 비벼 닦았다.

이렇듯 미래에 대해 단서가 생기면 사람은 누구나 앞날을 준비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미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 그걸 겨우 재혁과 희진에게 복수하는 데 쓰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아는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엄마.”

“응.”

“서버실 말이야. 기왕이면 어렵게 구축을 하는 건데, 규모를 늘리는 건 어때?”

미래를 알기에 더 큰 투자를 하고 싶었다.

HS 빌딩 한 층을 차지하는 서버실은 사실 유투북에서 받은 빅데이터를 저장해 재해석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였다.

데이터베이스를 해석하는 게 월등하게 효율이 좋긴 하지만, 사실상 빅터는 스스로 가동하면서 SNS상의 빅데이터를 수집하는 기능도 하고 있었다.

데이터를 저장해 활용할 수 있는 여유만 충분하다면 유투북을 넘어 더 많은 빅데이터의 수집이 가능하다.

선아가 살던 8년 후에는 유투북뿐 아니라 얼굴책, 인별그램 같은 SNS 또한 마케팅의 장으로서 활용되고 있었다.

그런 것들까지 모두 활용한다면 엔터 사업뿐 아니라 엔터 사업과 연계한 마케팅에서 큰 성공을 거둘 터였다.

그러니 서버 용량만 충분하다면 무에서 유를, 아니 무에서 부(富)를 창조할 테지만, 역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도진이가 20층을 서버실로 쓴다는 것도 임직원들 반발이 대단한데, 그게 가당키나 하겠어?”

“역시 아직은 시기상조겠지?”

하지만 그 순간, 현숙은 재밌다는 듯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유투북이 아니라 네이비와 빅데이터 계약을 체결하면 또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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