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손길
뜨거운 시간이 지나가고 두 사람에게 평정이 찾아왔다.
욕실에서 몸을 닦고 온 희진은 침대에 누운 재혁을 바라보았다.
탈의한 채 침대에 널브러진 그는 기진맥진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정말 좋았어. 나는 오빠랑…….”
평소대로 재혁을 부르려던 희진은 아차 하며 말을 끊었다. 그녀는 선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매혹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재혁 씨랑 하면 할수록 좋더라.”
그녀의 말에 축 늘어져 있던 재혁이 고개를 들어 보였다.
“재혁 씨라고?”
아직도 상황극 중임을 인식한 재혁의 입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이리 와.”
재혁이 한쪽 팔을 들어 보였다. 제 품으로 오란 뜻이었다. 희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섹스에 있어서 재혁은 전희는 즐기는 편이었지만 후희에는 무심한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관계 후 안아주겠다고 하고 있었다.
희진이 그의 품 안으로 다가가 안겼다.
“요즘 일하느라 많이 피곤하지? 류도진이 외근이다 뭐다 힘들게 하잖아.”
“응. 맞춰주느라 얼마나 피곤한지 몰라.”
희진은 선아인 척 도진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는 재혁의 손길도 다정해졌다.
희진은 제 어깨를 느릿하게 쓰다듬는 재혁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대학 시절 재혁이 바람을 피울 적마다 애를 끓이고, 어떻게 하면 그의 관심을 돌릴까 고민했었다.
그 뒤로도 별반 다르지 않은 연애였는데……. 선아를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재혁은 훨씬 다정해졌다.
사랑받는 게 이렇게나 쉬운 일일 줄이야…….
선아인 척을 하는 건 못마땅했지만 어차피 재혁은 선아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귀는 사이에서도 상대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흥미를 잃는 게 재혁이었다.
그저 제 손안에 들어오지 않는 장난감에 애가 탈 뿐이고, 그 장난감인 척한다면 더욱더 갈증을 느끼고 자신을 찾을 게 분명했다.
재혁과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바, 그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희진은 재혁과 선아가 결혼한다고 해도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않을 거라는데 제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맹세컨대, 그가 좋아하는 건 선아의 재산뿐일 것이다. 그러니 이런 연기 같은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결국 그가 정착할 곳은 조강지처나 다름없는 자신의 옆자리였다.
그런 생각에 희진이 차갑게 웃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호텔 방 안에 진동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진원지는 침대 옆 협탁이었다.
희진의 말캉한 살을 지분거리던 재혁은 손을 뻗어 핸드폰을 쥐었다.
그에게 등을 댄 채 안겨 있었기에 희진 또한 핸드폰 액정에 쓰인 이름을 볼 수 있었다.
[윤선아]
“어어엇!”
그 순간 재혁이 화들짝 놀라며 희진의 등을 휙 밀쳤다.
그의 손에 의해 희진은 침대 끝으로 밀려났다. 침대 가장자리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은 희진은 홱 고갤 돌려 재혁을 바라보았다.
“떨어질 뻔했잖아.”
“입 좀 다물어. 선아한테 전화 온 거 안 보여?”
“…….”
재혁은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고 신신당부를 하곤 전화를 받았다.
“선아야!”
전화를 받은 그는 야릇한 시간을 보내던 남자답지 않게 성을 내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대체 왜 연락이 안 됐던 거야? 내가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희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핸드폰을 잡은 채 성을 내는 그 모습이, 사랑을 연기하는 남자 같아 보이지 않았다.
선아를 잡은 물고기라며 호언장담했던 남자는 자신이 친 그물에 발이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류도진이랑 나가고 연락이 안 돼서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했다고!”
불길한 생각은 한 번도 희진을 비껴간 적이 없었다.
“뭐? 나는 뭐 하냐고? 집에서 쉬고 있지. 응? 뭐라고? 한 시간 뒤에 잠깐 집 앞으로 오라고? 알겠어. 갈게. 선아야.”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불길한 생각은 들어맞았다.
재혁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씻지도 않은 채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어디 가려고 그래?”
“선아가 한 시간 후에 집 앞으로 오래. 집에 있었다고 했는데 정장 입고 갈 순 없잖아. 집에 들러서 옷 갈아입고 가려면 시간 촉박해.”
“그래서 지금 날 두고 간다고? 호텔에 나 혼자 있으라고?”
“어쩔 수 없잖아. 나 지금 시간 없다니까?”
또다시 홀로 남겨지는 건 싫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곳에서 혼자 우울한 생각에 빠져 있기 싫었던 희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옷가지를 주워 입기 시작했다.
그사이 대충 옷을 입은 재혁은 셔츠 단추를 다 잠그지 않은 채 정장 재킷 앞섶을 여몄다.
“나 먼저 간다.”
희진은 단추를 채우면서 저를 두고 호텔 방을 나서려는 재혁의 뒤를 따라나섰다.
“같이 가!”
***
호텔 주차장 벽에 기대 숨은 선아는 핸드폰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지 않게 설정을 변경하고 있었다.
선아가 몸을 감춘 기둥 너머 5m쯤 떨어진 곳에는 재혁의 차가 서 있었다.
조금 전, 선아는 근처에서 약속이 있다고 둘러대며 현숙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곤 호텔 주차장으로 내려와 재혁의 차를 찾았다.
재혁의 차를 찾자마자 그에게 전화를 걸어 한 시간 후에 집 앞에서 보자고 약속을 잡았다.
굳이 재혁에서 한 시간 뒤에 보자고 한 건 그들이 나올 때까지 오랜 시간 진을 치고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미 증거 하나를 확보했으니 추가 증거는 운에 맡기기로 했다.
재혁과 희진 때문에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이제 없다.
그들에게 낭비할 시간마저도 쪼개서 빅터 프로젝트 관련한 일을 하고 엄마와 도진처럼 소중한 사람들에게 시간을 쓸 것이다. 선아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택시 타고 가라니까.”
지하 주차장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냥 가다가 중간에서 내려줘.”
주차장과 연결된 공간의 문이 열리고 재혁과 희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희진의 오피스텔이 강남에 있기에 가는 길이 같아서 함께 차를 탈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두 사람이 함께 내려올 줄을 몰랐다.
50%의 확률에 배팅했는데, 운 좋게도 예측이 맞아떨어졌다.
선아는 셔터음이 들리는 곳을 손으로 손가락으로 눌러 막고는 둘의 모습을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해 두 사람이 함께 차에 올라타는 모습, 차를 타고 출발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증거로 획득할 수 있었다.
하얀 세단이 주차장 출입구를 향해갔다.
그제야 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선아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됐어!”
두 사람이 호텔에 들어서는 것부터 나오는 모습까지 완벽한 증거 하나를 수집 완료했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
한 시간 뒤, 선아의 핸드폰에 재혁으로부터 온 메시지가 떴다.
[집 앞이야]
10분 전에 도착한 선아는 간신히 시간에 맞춰 화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선아가 헐레벌떡 집 앞으로 나갔을 때, 재혁은 선아의 집이 있는 5층짜리 고급빌라 앞에 하얀 세단을 세워놓은 채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집에서 쉬다 나온 모습이었다.
선아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조소했다.
재혁의 차가 호텔을 나서고 선아도 호텔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그런 뒤 집으로 와 화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곧장 집으로 와서 재혁을 만날 준비를 한 건데도 시간이 빠듯했다.
자신이 그럴진대, 집에까지 갔다가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재혁은 얼마나 초조했을까.
선아는 비웃음을 지우고 그간 무수히 연습한 환한 미소를 띠었다.
“재혁 씨!”
차 옆에 서 있던 재혁이 고갤 들었다. 선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키 175cm의 재혁은 아담한 키에 준수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옅은 색 눈에 흰 피부는 그를 선이 고운 미청년으로 보이게 했다.
눈을 반으로 접고 웃는 그의 모습에선 비열함을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 차가워.”
선아가 가까이에 다가서자 재혁은 양손을 호호 불어 선아의 귀에 대주었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 선아가 반했던 재혁의 모습 그대로였다.
선아는 재혁의 손을 제 귀에서 떼어내 그의 손에 입바람을 불었다.
“재혁 씨 손이 더 차가워.”
입바람을 불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 손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내와 아이를 두고도 8년이나 다른 여자를 지분거린 손이다.
마디마디마다 반대로 꺾어주고픈 손이었지만, 선아는 이제는 원래 표정인 듯 익숙해진 미소를 띠었다.
“피곤할 텐데 집으로 오라고 해서 당황했지?”
“그럴 리가. 네가 오라고 하는데, 당연히 와야지.”
너무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에 선아는 팔을 타고 소름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환한 웃음 뒤에 비열한 속내가 들어 있었다.
그는 목적을 위해 선아를 속이고 있었고, 선아 또한 세빈이를 만나기 위해 그를 속이고 있었다.
선아는 세빈이를 만나야 한다는 목적을 상기하며 더욱 짙게 미소 지었다.
“있잖아, 재혁 씨. 사실 오늘 회사에서 전해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선아가 애교스럽게 말꼬리를 늘리며 말했다.
“나한테 줄 게 있다고?”
“응응. 재혁 씨한테 짠 하고 선물하고 싶은 게 있어.”
재혁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은근한 기대가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눈 감아봐.”
“눈?”
“응. 얼른.”
재혁이 눈을 감자 선아는 주머니에서 딸랑거리는 무언가를 꺼내 재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게 뭐야?”
재혁은 눈을 뜨고 손을 펴서 안에 들린 걸 확인했다.
“열쇠?”
“응. 열쇠. 재혁 씨가 설문조사 하러 다니는 동안 신혼집 리모델링 끝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거든.”
물론 거짓말이었다. 위약금까지 물어가면서 리모델링 범위를 대폭 축소했다.
세빈이를 키우던 모습 그대로 리모델링을 한 집에 두 연놈을 들여보낼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리모델링은 나중에 세빈이를 갖고 해도 늦지 않는다.
“그렇게 몰래 준비하다가 결혼 준비에 소홀한 거 같다고 재혁 씨한테 한 소리 듣고는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
“나는 그것도 모르고…….”
“사실 이렇게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있었던 건데…….”
“미안해, 선아야…….”
“괜찮아. 미안해하지 마, 재혁 씨.”
괜찮아, 미안해하지 마, 이런 말은 이전 삶에서 선아가 달고 살던 말이었다.
재혁의 얼굴빛이 어두워질라치면 선아는 먼저 나서서 자신은 괜찮다고, 집은 신경 쓰지 말고 바깥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했었다.
그렇게 살아서 돌아온 건 배신밖에는 없었다.
“정말 고마워, 선아야.”
“고맙긴……. 재혁 씨 요즘 주머니 사정이 별로지? 차 산다고 무리해서…….”
과거 결혼을 하자마자 재혁은 선아에게 부탁을 해왔다. 비상금이 있다면 그걸로 차 할부를 갚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그의 사정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는 선아는 재혁에게 맞춘 덫을 짰다.
“재혁 씨 지금 사는 원룸 공실 생기면 바로 계약되는 곳 같던데……. 거기 보증금 빼서 급한 불부터 끄고 아파트 가서 먼저 지내고 있어. 재혁 씨 혼자 살 만큼은 살림 채워놨거든.”
그를 배려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건 재혁을 홀딱 털어먹기 위한 전략일 뿐이었다.
원룸 보증금이야 시간이 지나도 원금이 보존되지만, 차의 경우는 다르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가상각이 되는 게 차였다.
재혁이 가진 돈을 차 할부금으로 쓰고 나면 차 한 대가 재혁의 전 재산이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차의 값어치가 뚝뚝 떨어지고 재혁의 자산가치 또한 쭉쭉 줄어든다.
외도를 이유로 둘이 갈라설 때쯤 재혁은 차 한 대 가진 카푸어가 돼 있을 것이다.
선아는 그 차마저도 위자료 때문에 팔게 할 작정이었다. 한마디로 그를 알거지로 만들어버릴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