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밀어 넣다 @AW
영화 《페리스의 해방》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삶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그렇기에 그런 소중한 삶을 지나치지 않도록 가끔은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라.」
우연히도 혹은 기적처럼 선아에게는 빠르게 흘러갔던 그 삶을 반추할 기회가 생겼다.
엄마와 함께하는 한 시간 남짓 걸린 느린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코스 순서대로 나오는 요리는 하나같이 맛있었고, 현숙과 선아 사이의 이야기 밀도는 높았다.
자신이 이번 삶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를 내내 고민하던 선아는 처음으로 이곳에서 깨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지난 삶에서 엄마를 일찍 여의어 나눌 수 없었던 많은 이야기가 모녀 사이에서 오갔다.
순서대로 나오는 요리가 동이 났고, 디저트 접시마저 바닥을 드러냈을 때, 선아는 식사비가 적힌 청구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 줘, 내가 낼게.”
현숙이 손을 뻗었지만, 선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청구서를 등 뒤로 감추었다.
“아냐, 엄마. 오늘은 내가 엄마보고 오자 한 거잖아. 내가 낼게.”
철이 없었던 딸은 엄마가 죽기 전까지 생일 미역국 한 번을 끓여 대접한 적이 없었다.
엄마에게 밥을 산 것도 두 번의 삶을 통틀어 오늘이 처음이었다.
“엄마, 후식으로 매실차도 나온다니까 그거까지 먹고 나가자. 계산 먼저 하고 올게.”
선아는 미리 계산해놓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카운터로 가던 선아는 창밖을 내다봤다.
그녀의 시선이 호텔로 향해오는 차에 닿았다.
하얀색 중형급 세단이 호텔로 들어서고 있었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차였지만, 엠블럼에 반짝이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차를 본 선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차는…….’
재혁은 첫차에 대한 로망이 큰 나머지 엠블럼에 불이 들어오도록 튜닝을 했다. 선아가 유치해 보인다고 말렸지만, 기어이 재혁은 튜닝을 강행했다.
‘이재혁?’
재혁의 차는 낮에는 튜닝하지 않은 차와 외관상 차이가 없었지만, 밤만 되면 엠블럼에 하얀 불이 들어와 다른 차와 구분되었다.
‘아…….’
그 순간, 선아의 머릿속에는 재혁과 희진이 불륜 행각을 벌이던 호텔 특징이 생각났다.
집과 회사가 강남 쪽에 있었기에 그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강북 쪽으로 호텔을 들락거렸다.
지금 선아와 현숙이 있는 광화문의 호텔 또한 지리상 강북이었다.
‘그렇다면…….’
뜻밖에도 둘의 외도 현장을 잡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선아는 뒤돌아 엄마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엄마, 잠깐 자리에 좀 앉아 있어. 나 화장실이 급해서 화장실 다녀올게.”
“사색이 된 거 보니까 큰 건가 보네. 일 보고 천천히 와.”
“큰 건 무슨 큰 거야. 잠깐만 다녀올게, 기다려.”
선아는 그대로 식당을 빠져나와 체크인 프런트가 있는 로비로 향해갔다.
커다란 기둥 중 하나에 몸을 감추고 기다리니 희진이 곧 로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체크인 데스크에서 카드로 호텔비를 결제한 후 키를 받아 들었다.
둘이 체크인을 같이 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객실로 향하려면 카드키가 필요했다.
이 호텔은 엘리베이터에 카드키를 태그해야지만 객실 층에서 내릴 수 있었기에 로비에서든 엘리베이터에서든 두 사람이 접선하게 되어 있었다.
잠시 후, 어디론가로 전화를 건 희진은 엘리베이터 앞에 가서 섰다.
딩 소리와 함께 라운지 층에 선 엘리베이터의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
선아의 예상대로 그 안에 재혁이 타 있었다. 희진은 곧장 로비로 오고 재혁은 주차장에 주차한 후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객실로 올라가는 듯했다.
기둥 뒤에서 핸드폰을 꺼내 든 선아는 사진 촬영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찰칵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지만, 엘리베이터에 탄 두 사람에게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 앞으로 다가간 선아는 엘리베이터 위 디지털 화면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가 멈춰 선 곳은 20층이었다. 20층은 식당이나 호텔 부대시설이 있는 층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재혁과 희진 단둘이 있었으니 둘은 20층 객실로 올라간 게 확실했다.
‘잡았다.’
선아는 핸드폰 사진첩에 들어가 두 사람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확인했다.
연달아 찍힌 다섯 장의 사진, 그중 맨 마지막 사진엔 문 닫히기 직전 희진의 허리를 끌어안는 재혁의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선아는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이메일에도 보내두었다.
‘드디어 하나 건졌어.’
오늘 두 사람이 이곳에 올 줄 선아도 까맣게 몰랐었다.
그녀는 한식당을 나올 때와 달리 상기된 얼굴로 엄마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해갔다.
뜻밖의 수확 덕에 식당으로 향해가는 선아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
셔츠 단추 위에서 재혁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오늘따라 셔츠 단추가 잘 풀리지 않았다.
“에이씨, 귀찮게.”
단추를 풀던 그는 셔츠를 뒤집어 벗어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왜 그래?”
구두를 벗은 후, 호텔 슬리퍼로 갈아 신던 희진이 놀란 눈으로 달려왔다.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
“…….”
재혁은 턱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이를 꽉 다문 채 희진에게서 홱 등을 돌렸다.
“요즘 왜 그러는데? 계속 나한테도 괜히 짜증 내잖아.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래? 차에서도 내내 말도 안 하고, 호텔 와서도 짜증 부리고.”
그랬다. 재혁은 오늘 온종일 짜증이 나 있었고, 희진에게까지 짜증스럽게 굴었다.
사실 아침까지만 해도 지긋지긋한 설문조사 업무가 끝난 것이 기쁜 그였다.
날도 추운데 서울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한테 설문을 부탁하는 게 창피했던 차에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빅터 프로그램의 신뢰도가 높다는 결과가 나온 것은 못마땅했지만, 그 지긋지긋한 설문조사를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서서 외근을 나가는 선아와 도진을 보고 기분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재혁의 기분은 이 모양 이 꼴이었다.
혹시나 해 선아의 자리에 가서 스케줄표를 확인했더니 오늘은 딱히 스케줄이 있는 날이 아니었다.
도진이야 워낙 변칙적인 스케줄이 많았지만, 보통은 스케줄을 혼자 감당하곤 했지, 이렇게 선아를 대동하진 않았다.
더군다나 둘이 밖으로 나간 이후부터 선아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뭘 하느라고…….”
재혁이 선아 생각에 이를 바득바득 갈자, 희진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데!”
재혁은 짜증 난다는 듯이 희진을 쏘아보았다.
“넌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는데? 내 일을 네가 다 알아야 해? 여자가 말이야. 말을 안 해주면 이유가 있겠느니 하고 기다려야지.”
“그러면 내 앞에서 짜증을 내지 말았어야지. 계속 짜증을 부리니까 나도 궁금할 수밖에 없잖아.”
“하.”
재혁은 희진의 손에 들른 생수를 뺏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차가운 물을 쏟아붓듯이 마시고도 열 오른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윤선아가 요즘 류도진이랑 좀 이상해.”
“이상하다고? 설마 우리처럼…….”
희진의 말에 재혁의 미간이 볼품없이 구겨졌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진짜 둘의 사이가 미심쩍어 보이기도 했다.
외근한다고 나가서 어딘가에서 뒹굴고 있는 게 아닐까.
막상 결혼을 앞두고 나니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온 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저들끼리 중요 업무를 한다고 시시덕거리다가 눈이 맞은 걸까.
“왜 그래…….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어.”
재혁은 제 품을 파고드는 희진을 보면서 선아에게 또다시 전화해보려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기분 좀 풀어. 비싼 돈 내고 호텔까지 왔잖아…….”
“후……. 그래, 알았어. 일단 옷 좀 벗어봐.”
사실 오늘 희진을 불러낸 이유는 자꾸만 선아에게 전화하려는 마음을 누르기 위해서였다.
연락에 집착하는 건 재혁의 연애 스타일이 아니었다. 연애 고수인 재혁의 사전에 집착이란 단어는 들어 있지 않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이 일기도 했다.
선아를 신경 쓰지 않기 위해선 그것보다 더욱 몰입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다. 그것이 재혁의 방식이었다.
드센 엄마가 싫을 땐 부드러운 여자들의 품에 의지했고, 무능력한 아버지가 싫을 땐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 공부를 했다.
현실을 바꿀 방법이 없으니 현실에서 자신을 끌어내 줄 여자를 만나야 했다.
그게 선아였지만, 선아에 대한 자격지심이 속을 붉게 물들일 때마다 저와 비슷한 희진을 안아야지만 자신이 하찮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재혁은 희진이 나신이 되자마자 침대로 거칠게 밀어서 넘어뜨렸다. 그러곤 넓어 벌어진 다리 사이 부드러운 살을 쓰다듬다가 몸을 빈틈없이 맞추었다.
이미 수백 번도 더 맞춘 그녀의 몸은 자신이 몸인 양 익숙했다,
그는 전희도 없이 희진에게 파고들었다.
“아!”
그가 들어찬 순간 희진이 팔다리를 휘감으며 재혁에게 매달렸다.
미끈거리고 뜨거운 감촉이 기분에 기분이 좋아진 재혁은 허리를 높게 들었다가 다시 깊숙이 쳐 박으며 속도를 높였다.
“아!”
희진은 재혁의 목을 힘껏 끌어안으며 몸을 붙여왔다.
몸 틈에서 이는 마찰음이 커질수록 희진의 입에서 나오는 신음도 절박해졌다.
재혁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희진의 부드러운 여체를 탐닉하며 충동적인 말을 꺼냈다.
“흣, 나 오늘 상황극 하고 싶어.”
“상황극?”
희진은 그동안 야동에 나올법한 다양한 상황을 연출하며 재혁에게 만족감을 선사했다.
“이번엔 어떤 상황극이 하고 싶은데? 사장이랑 비서? 아니면-”
희진은 순종적이어서 재미없을지언정, 심심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래서인가, 제게 다양한 자극을 주는 희진에게만은 싫증이 나지 않았다. 재혁의 인생에서 제일 오래 만난 여자가 희진이었다.
“선아 역할 좀 해줘.”
“뭐?”
너무 놀란 나머지 희진은 몸을 움츠렸다. 그 탓에 압박감을 느낀 재혁은 인상을 쓰며 저를 안은 희진의 팔을 떼어냈다.
그는 희진과 몸을 결합한 채로 그녀의 어깨를 침대 위에 눌렀다.
생각해보면 희진의 체구도 머리 길이도 선아와 비슷했다.
“엎드려봐. 다른 자세로 하자.”
“그보다 선아 역할을 해달라는 게 무슨 말이야?”
“나 뒤로 하고 싶어.”
희진은 자신의 말을 자르고 계속해 조르는 재혁을 보다가 자세를 바꾸었다.
그녀에게서 몸을 떨어트렸던 재혁은 이번에도 역시 단숨에 자신의 분신을 희진에게 밀어 넣었다.
자세가 바뀜으로 인해 그의 부피가 더욱 묵직하게 와 닿았다.
살 틈에서 커다란 마찰음이 들렸다. 희진은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선아야……. 으, 선아야……. 너 나 원하지?”
희진이 눈을 부릅떴다.
선아라니……. 자신을 선아라고 부르다니…….
분노하려던 그 순간, 재혁이 엎드려 그녀의 등을 안았다.
“뭐, 뭐야. 왜 이래?”
“가만히 있어, 선아야.”
가진 게 많은 선아에게 재혁은 그 많은 것 중 하나일지 몰라도, 가진 게 적은 희진에게 재혁은 전부나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희진은 재혁에게 맞출 수밖에 없었다.
재혁이 희진의 등을 안고 목덜미와 어깨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다정하게 잠자리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희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비참한데도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하고 좋았다.
누구에게도 따뜻한 포옹을 받아본 적 없는 희진은 그 따뜻함에 함몰되어 갔다.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잠시라도 선아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희진의 입에선 선아가 재혁을 부를 때 쓰던 호칭이 튀어나왔다.
“재혁 씨, 조금만 더, 좀만 더 깊게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