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속물
검사를 마치고 나온 현숙은 장시간 같은 자세로 누워 있느라 결린 어깨를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아휴, PET CT인지, 뭔지. 이건 두 번은 못 하겠다. MRI 찍을 때도 관 속에 누운 것처럼 답답하더니. 이건 뭐 꼼짝없이 앉아 있으라지, 핸드폰도 보지 말라지. 어휴, 죽는 줄 알았네.”
선아는 미소 띤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감정 표현에 서툴고, 자주 투덜거리고, 화도 잘 내고, 골초에 음주 가무를 즐기는 엄마였지만, 그래도 역시 엄마가 좋다.
현숙에게 다가간 선아는 슬그머니 팔짱을 꼈다.
“엄마.”
“뭐야. 징그럽게.”
“고생했어, 엄마.”
“얘가 왜 않던 짓을 하고 그래? 이 팔 안 놔?”
현숙이 팔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선아는 더욱더 엄마 옆에 바짝 붙었다.
“엄마, 나 배고파.”
“건강 검진은 내가 했는데, 왜 네가 배고파?”
“저녁 시간 돼가니까 당연히 배고프지.”
“배고프면 식당에라도 가서 밥 먹고 있지, 뭐 한다고 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엄마가 걱정되니까 그렇지.”
“얼씨구.”
현숙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딸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류 팀장. 건강 검진 공짜로 받은 김에 내가 밥 살게. 가자.”
도진은 고갤 저으며 거절했다.
“오랜만에 모녀끼리 식사하세요. 다음 주부턴 서버실 업무 때문에 선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까 맛있는 거 사 주시고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단 말에 현숙은 뱁새눈을 하고 도진을 바라보았다.
“애 일 가르치라고 붙여놨더니 아주 작정하고 부려 먹나 봐.”
“엄마, 도진 선배 구박하지 마.”
“어쭈, 이게 제 엄마 편 안 들고 류 팀장 편을 드네? 너도 이제 사회 물 먹었다 이거지?”
“응. 사회 나와보니까 엄마보다도 직속 상사가 더 무섭네?”
“계집애. 약아 빠져서는.”
도진은 로비로 걸어가는 모녀의 뒤를 따랐다.
입이 걸걸한 현숙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는 선아를 보고 있자니 그의 입가에도 모녀와 같은 미소가 걸렸다.
모녀는 병원 로비에서 도진과 인사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류 팀장. 내일 회사에서 봐.”
“선배, 오늘 고마워.”
“응.”
도진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태도로 인사하고 돌아서자 선아는 제 엄마에게 넌지시 도진에 관해 물었다.
“엄마, 도진 선배 진짜 든든하지?”
“언제는 재혁이 눈치 보느라 류 팀장 칭찬도 못 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류 팀장 칭찬을 하네?”
“그야 도진 선배가 재혁 씨랑 차이가 나니까 함부로 입에 올리기도 조심스러웠던 거지. 재혁 씨가 들으면 비교처럼 느껴져서 서운해할 것 같기도 했고.”
“어이구 별게 다 조심스럽다.”
선아는 주차장으로 향해가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엄만 뭘 보고 도진 선배를 회사에 받아들인 거야?”
“안 받아들일 이유가 없잖아.”
“그러니까 왜?”
항상 궁금했었다. 엄마가 도진의 아버지에게까지 아쉬운 소릴 하면서 도진을 HS 엔터테인먼트에 받아들인 이유 말이다.
도진이야 능력이 있는 천재이고, 그의 성공이 이해되었지만, 엄마는 다소 일 처리를 즉흥적으로 하는 구석이 있었다.
“솔직히 류도진 같은 사람이 회사에 입사 지원하면 반기지 않을 사장이 어디 있을까.”
엄만 어떤 이유에서 도진을 알아본 걸까.
“학벌 좋지, 집안 좋지, 성장환경 좋지.”
현숙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선아는 다소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와. 엄마 속물. 직원 채용 1순위는 열정이라고 했으면서.”
“류 팀장은 얼굴이 열정적이잖아. 내가 배우 생활했어도 류 팀장보다 잘생긴 남자 연예인 못 봤다?”
선아는 그 말에 실망스러운 것도 잊고 깔깔 웃어버리고 말았다.
“엄마 진짜 속물이야. 완전 속물.”
“이년아. 내가 속물이니까 너도 이만큼 사는 거야. 엄마가 맹탕이었어 봐. 너 지금 손가락만 쪽쪽 빨면서 살고 있을 거야.”
엄마의 말이 맞았다. 자신에게 들어가는 돈은 건강 검진 비용조차도 아끼는 사람이었지만, 엄마가 남겨준 막대한 유산 덕에 선아는 아무 걱정 없이 세빈이를 키울 수 있었다.
엄마가 막대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건 우연히 류도진이라는 원석을 알아본 운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엄마가 돈을 좋아하고, 돈을 모은다고 아등바등했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에 선아는 이전의 삶에서 사치를 하지 않았다. 엄마처럼 한 푼이라도 더 모아서 세빈이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자식을 낳아봐야지만 엄마의 마음을 안다고 하더니. 그래서인가, 엄마가 다르게 보였다.
“엄마, 우리 오늘 비싸고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가자.”
“네 돈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한다?”
“엄마 돈으로 얻어먹으려는 거 아니거든? 나 월급 탔어.”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왔는데. 그거 다 내 주머니에서 나온 거다?”
“직원들이 그 소리 들으면 퍽 좋아하겠어. 월급은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거거든?”
“어이쿠. 돈 생겼으면 너 키우는 데 들어간 돈이나 갚지 그래?”
“그래서 지금 갚으려고 하잖아. 내가 진짜 맛있는 거 살게. 밥 먹으러 가자.”
선아는 집에 갈 거란 엄마를 억지로 끌고 호텔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60세에는 은퇴할 거라 노랠 부르다시피 했던 엄마는 60세를 1년 앞둔 59세에 사고가 났다
쉬기는커녕, 눈 한 번 제대로 못 뜨고 세상을 떠났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엄마 생각에 목이 멜 때가 참 많았다.
특히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땐 더욱 그랬다.
엄마가 달고 사는 음식이라고 해봤자 아침에 먹는 속풀이 국 정도가 전부였다.
엔터테인먼트 사업 특성상 접대 자리가 많으니 항상 속 풀어주는 국물 같은 것만 찾았고, 새아빠가 챙겨주는 게 아니고서야 보양 음식도 비싸다고 싫어했다.
돈을 그렇게나 열심히 벌었으면서 막상 자신이 입고 쓰는 데는 돈을 아낀 것이다.
선아는 그런 엄마를 억지로 끌고 서울시청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의 미슐랭 스타 한정식집에 왔다.
디너 코스가 20만 원에 육박했지만, 선아는 그중에서도 가장 값비싼 코스를 주문했다. 당연히 현숙은 정색을 하면서 싫어했다.
“너도 참 돈 쓸데없다. 배에 들어가면 그게 그거인데, 굳이 이 돈을 내고 밥을 먹는다고?”
“여기 재료들 다 국산 재료만 사용하고, 유기농 인증받은 좋은 재료만 써. 건강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어야 건강하지.”
자식에겐 늘 유기농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였으면서 엄마는 한 번도 이렇게 챙겨준 적이 없었다.
그 점이 이전 삶에서 엄마를 잃고 두고두고 후회한 점이었다.
음식 가격에 기함하던 현숙도 막상 음식이 나오니 표정이 풀어졌다.
본전을 찾아야 한다 생각한 그녀는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이며 음식을 집어 먹었다.
“맛있긴 맛있네.”
“원래 다 돈값 하는 거야.”
시청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모녀는 모처럼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아까 코디네이터분이 엄마 위내시경 안 해서 굳이 음식 가려먹을 필요 없다고 했어. 그러니까 많이 먹어, 엄마.”
선아는 들기름에 무쳐낸 참나물 샐러드를 엄마 앞으로 밀었다.
“겨우 월 200 버는 주제에, 너한테 얻어먹으니까 벼룩의 간 빼먹는 기분이야.”
“엄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산다면 간이라도 빼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먹어.”
“밥맛 떨어지게 간 떨어지는 소리 하고 있어. 내가 네 간 빼서 오래 살면 퍽이나 좋겠다.”
두 번째 애피타이저를 다 먹고, 호텔 종업원이 접시를 치우는 동안 창가로 시선을 돌린 현숙은 시청 광장 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현숙의 얼굴에 느긋한 표정이 떴다. 선아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엄마의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있던가.
아마도 없었던 것 같았다. 이전 삶은 더욱 치열했고, 이번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엄마는 바빴다.
이전 삶에서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엄마와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
선아는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소중함도 깨달아야만 아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삶은 어쩌면 지난 삶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둘이 있으니 좋네.”
“그렇지?”
“너 대학 다닐 땐 학교 다닌다고 바빴고, 취업해선 일 바쁘다고 시간이 없었고, 결혼 준비할 땐 또 그거 나름대로 바빠서 이런 시간 꿈도 못 꿨어.”
“내 핑계는. 엄마도 새아빠랑 연애한다고 바빴으면서.”
“이것아. 나도 결혼은 한 번 해보고 죽어야 할 거 아니야.”
그 점이 새아빠에게 고마운 점이기도 했다.
한참 사랑받아야 할 나이에 미혼모가 되었던 엄마가 새아빠의 옆에선 정말 행복해했으니까.
“나도 실은 너랑 해보고 싶은 게 참 많았어.”
현숙의 말에 선아는 접시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현숙은 여전히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엔 외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자가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 잔디 광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도 저런 엄마들처럼 유모차 끌고 다니면서 너한테 온 세상을 다 보여주고 싶었어.”
“알아. 그러고 싶어도 돈 벌어야 해서 못 해준 거.”
실은 몰랐었다.
아이를 낳기 전엔 부모의 마음을 정말이지 감쪽같이 몰랐었다.
아이를 낳고 나셔야 겨우 엄마의 마음을 짐작해볼 뿐이었다.
가진 걸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한 게 걸리는 게 부모 마음이었다.
오른쪽 몸을 못 쓰는 세빈이를 보면서 선아는 늘 자신의 오른쪽 팔다리라도 잘라주고 싶었었다.
부모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주고 또 주어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 선아는 세빈이를 낳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홀로 나 낳고 키운다고 마음고생 많이 한 거 이제는 진짜 알아…….”
“어이구. 그거 알면 다 큰 건데.”
“다 컸지. 엄마 딸도 성인인데.”
현숙은 이제는 저보다 키가 큰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애가 아니라고, 성인이라고 강조하던 것처럼 그녀의 눈에도 이제 딸은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교복을 입고 어설픈 화장을 하고 등교하던 아이가 이제는 완연한 숙녀가 되어 제 앞에 앉아 있었다.
바쁘게 일한다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딸.
바쁜 엄마가 불편해할까 봐 투정 한 번 맘껏 부리지 못한 딸.
오늘 뇌동맥류 진단을 받아서일까.
건강하기만 할 것 같았던 자신의 몸이 서서히 약해져 간다는 생각 때문인지, 평소와 다른 말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한때는 내가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었잖아.”
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인이라는 게 참 우스운 게, 벌이가 적어도 품위 유지를 해야 하고, 남들과 비슷하게 살면 초라해졌다고 손가락질을 받더라. 남편도 없이 처녀의 몸으로 임신하고 나니까 세상 비난이 다 나한테로 향해오는 데다가 일도 끊겼지. 가난하게 살면서 널 키울 생각하니까 눈앞이 깜깜한 거야.”
이번에도 역시 선아는 고개만 끄덕였다.
다 이해한다는 듯한 딸의 반응 때문이었을까.
현숙의 눈가가 서울시청광장에 정원 등처럼 붉어졌다.
“내가 성공 못 했어 봐……. 나 때문에 네가 더 무시당했을 거야. 아빠도 없는 주제에 가난하고 청승 맞다고…….”
현숙은 목이 막힌 듯 물잔을 들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알아. 엄마. 나도 이제는 다 알아. 엄마가 정말 고생 많이 한 거.”
선아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으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은막의 여신이라 불렸던 엄마. 뭇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엄마는 이제 억척스러운 중년이 되었다.
사업가 남자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겠다고 그들만큼 술을 마시고, 그들처럼 담배를 피워대면서까지 노력하며 산 엄마.
선아는 엄마를 다시 만난다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고마워, 엄마.”
무뚝뚝한 현숙과 그런 현숙을 닮아 더욱 무뚝뚝했던 그녀의 딸. 선아는 제 가슴에 새겨 넣듯 엄마에게 처음 해보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 사랑해 엄마.”
“뭐라는 거야, 진짜…….”
기어이 현숙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