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27화 (27/85)

27화. 자괴감

엄마가 말이 어눌해졌고, 그 때문에 병원에 갔단 말에 선아의 얼굴은 희게 질렸다.

“그게 정말이야, 선배?”

“병원 안 간다고 하시길래 간신히 설득했어. 그래도 너한테는 이야기하셨을 줄 알았는데…….”

회의실 의자에 앉아 있던 선아가 벌떡 일어섰다.

“선배, 나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 할 거 같아, 오늘 오후 반차-”

“어제 이미 결재 다 해놨어. 같이 가.”

“결재해놨다고?”

“응. 오늘 우리 둘 다 외근으로 결재해놨어. 같이 가자.”

선아는 도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도진이 예약했다는 병원은 그의 아버지가 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병원일 것이고, 혼자 가는 것보다는 그와 함께 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회의실을 벗어나 사무실로 간 도진은 서류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뒤따라간 선아는 팀 내 직급이 높은 이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팀장님과 외근 후에 그곳에서 곧바로 퇴근할게요.”

“외근? 오늘?”

“네. 팀장님께서 결재 올려두셨다고…….”

설문조사 결과가 나온 날이었다. 빅터 신뢰도 조사 업무의 마지막 날이기에 공식 회식은 아니어도 조촐한 식사 정도가 따라올 거라고 기대하던 이들의 눈에 실망감이 어렸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 그래……. 일 잘 보고.”

선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팀원들 사이에서 재혁은 불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빛으로 사무실을 떠나는 도진과 선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

도진은 현숙을 병원에 보내면서 건강 검진을 예약해두었다.

위내시경과 대장내시경까지 포함된 검진 패키지였기에 보호자를 대동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음에도 현숙은 말없이 혼자 병원에 와서 검진을 받고 있었다.

선아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현숙의 건강 검진을 돕고 있던 병원 코디네이터는 그녀가 이제 막 MRI 촬영을 시작했다고 알려왔다.

전담 코디네이터가 있어서 편안하게 검진실을 이동하고 있었지만, 엄마가 제게 말도 하지 않고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선아의 마음은 자책으로 얼룩졌다.

지금껏 세빈이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엄마는 신경 쓰지 못했다.

엄마 또한 짧은 생을 마감하고 일찍 자신의 곁을 떠났는데, 제 눈앞에서 죽은 자식이 너무 원통해서 엄마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했다.

세빈이가 세 살 되던 해, 엄마는 졸음운전을 하다가 차가 강에 빠졌고, 2년을 의식 없이 있다가 돌아가셨다.

지금처럼 화려한 모습의 사업가가 아니라, 엉망이 된 몰골로 눈 한 번 뜨지 못한 채 2년을 고통스럽게 살다 죽었다.

새아빠의 정성 어린 간호에도, 욕창으로 등이며 엉덩이가 문드러졌다.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할 뿐이지, 세상을 뜨는 날까지 괴로웠을 엄마를 생각에 선아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미래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엄마의 사고 또한 막을 수 있다고 믿지만, 병원에 누워 있던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니 또다시 두려움이 일기 시작했다.

선아가 MRI실 대기 의자에 앉자 도진이 그 옆에 앉았다.

“왜 자책하는 얼굴을 하고 있어.”

“회사에서만 얼굴 보는 선배가 엄마 건강 문제 눈치채고 챙길 정도인데……, 나는 뭘 한 건가 싶어.”

“그게 왜 네 탓이야. 오늘 보니까 사장님이 너한텐 몸 상태 내색을 아예 안 하시는 거 같은데.”

위로로 하는 말임에도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엄마가 사고 났던 그 시절, 세빈이가 막 세 살이 되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세빈이의 재활 치료가 시작되었다.

선천적인 장애가 아니었기에 재활 여부에 따라서 신체 능력을 향상할 수 있단 말에 당시 선아의 관심은 온통 세빈이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런 시기에 엄마가 사고를 당했다.

아이의 재활 치료를 챙긴다고 엄마가 사고 나던 날까지도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엄마를 떠나보내고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남편이 있었음에도 남편이 없는 것보다도 못한 인생이었다. 세빈이의 육아는 온전히 선아 혼자의 몫이었다.

세빈이를 재우고 홀로 어질러진 집을 치우던 날엔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엄마 또한 홀로 자신을 키웠다. 저를 키우면서 사회생활까지 했던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엄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정말 기적처럼 다시 보게 된 엄마인데…….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엄마인데…….

이 삶에서도 자신은 엄마를 등한시한 채 자신의 행복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선아의 가슴에 자괴감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잠시 후, 15분가량의 MRI 검사를 마친 현숙이 검사실 바깥으로 나왔다.

“엄마.”

현숙은 MRI실 앞에서 기다리던 선아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그 옆에 있는 도진을 보고는 의문이 풀린 듯한 눈빛을 했다.

“뭘 또 애한테 이야길 했어. 류 팀장 입 무거운 줄 알았는데, 촉새였네, 촉새였어.”

“보호자 동반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잖습니까.”

“어차피 위내시경이랑 대장내시경은 취소했어. 게다가 비싼 검진 예약해주는 바람에 병원 코디네이터분이 동행하는데 보호자가 무슨 필요야. 선아는 그 시간에 회사 일 하나라도 더 배워야지.”

선아는 축축해진 눈가를 손등으로 비벼 닦았다.

“내시경을 취소하긴 왜 취소해. 검진은 다 받아야지!”

“작년에 국가검진에서 해주는 거 받았어. 내시경 그것도 자주 하면 못써. 2년에 한 번만 해도 되니까 나라에서도 2년에 한 번씩만 하게 하는 거야. 근데 선아야, 나 도진이 찬스로 건강 검진 공짜로 받는다?”

선아는 공짜 검진에 기뻐하는 푼수 같은 제 엄마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사력을 다해 키운 원픽이 있다고 하나 원픽은 아직 데뷔 전이고, 현재 HS 엔터테인먼트는 업계 중간급의 위치에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엄마의 자산이 적은 것도 아닌데, 밑바닥부터 손수 회사를 일궈온 기억 때문인지, 엄마는 돈 한 푼 한 푼을 지나치게 아끼는 경향이 있었다.

“엄마, 그렇게 아껴서 뭐 해. 나중에 그거 다 딴 사람들 입에 들어가면 아까워서 어떻게 눈 감으려고.”

“딴 사람 입에 들어가긴 누구 입에 들어가. 들어가봤자 네 입에 들어가는 거다. 요것아.”

선아는 심각해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애석하게도 다른 삶에서 엄마가 그렇게 모아서 불린 자산이 모두 재혁과 희진의 손에 들어갔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분통해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윤현숙 님, 대장내시경이랑 위내시경을 취소하셔서 마지막으로 PET CT 촬영 후에 VIP룸으로 모셔서 간단하게 식사 진행하도록 할게요.”

그러는 사이 현숙의 건강 검진을 동행하던 코디네이터가 다가왔다.

선아는 초조함에 손끝을 깨물었다. 불안감을 느낄 때마다 깨물었던 손끝은 빨갛게 부르터 있었다.

찌릿한 감각에 선아는 자신의 손끝을 상기하며 입술을 뗐다.

도진의 시선이 타액 묻은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그때였다. 코디네이터의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했다.

특이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VIP 환자를 안내하는 코디네이터에게 호출이 오는 일은 드물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코디네이터는 앞에 있는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다음 검진을 위해 이동하려던 세 사람이 멈추어 선 채 코디네이터의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심각한 얼굴로 통화를 마친 그녀는 고갤 돌려 현숙을 바라보았다.

“윤현숙 님. 뇌혈관센터 교수님께서 급히 상담하자고 하시는데요.”

바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내시경과 CT, MRI, 초음파의 경우는 현장에서 검진 의사에게 짧은 소견을 듣거나, 문제 소견이 보일 경우엔 곧바로 통보가 이루어지는 게 이 병원 건강 검진 시스템이었다.

그런즉, 상담하잔 이야기는 현숙의 뇌에 이상이 있단 뜻이었다.

코디네이터의 안내를 기다리던 세 사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엄마, 나도 따라 들어가서 설명 들을게.”

“아니, 내 건강 이야길 네가 왜 듣는데?”

뇌혈관센터 담당의를 향해가면서 선아와 현숙은 설전을 벌였다.

현숙은 선아가 자신의 상담에 동행하길 원치 않았고, 반대로 선아는 어떻게든 엄마의 상황에 대해 듣고 싶었다.

“엄마 나이쯤 되면 자식들이 부모 건강 챙겨야 하는 거야.”

“남사스럽게 챙기긴 무슨. 지금껏 내 건강은 내가 알아서 잘해왔거든. 내가 언제 너한테 의지한 적 있니?”

현숙의 말이 맞았다. 홀로 선아를 키운 현숙은 누구보다도 강한 엄마였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너 걱정 끼치는 것도 싫고,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별거 아니야.”

하지만 그 여파인지 그녀는 딸을 지나치게 어린애 보듯 하곤 했다.

“엄마!”

뇌혈관센터 교수실 앞에 다다르도록 모녀의 논쟁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뒤따르던 도진이 끼어들었다.

“사장님, 저도 같이 들어갈까 하는데요.”

현숙이 황당하단 눈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

“류 팀장은 또 왜?”

“저야 알고자 하면 결과를 알 수 있으니 같이 들어도 무방할 듯합니다만.”

“이 병원은 환자 비밀 유지 그런 것도 없어?”

“맘에 안 드시면 고소하시죠. 조사받겠습니다.”

“류 팀장 고소하면 미래사업팀은 어쩌라고! 아휴! 왜들 뒤따라와서 귀찮게 난린지 모르겠네!”

그렇게 해 결국 다 함께 교수실에 들어가 현숙의 MRI 검사 결과를 듣게 되었다.

현숙이 의사 앞에 앉고 그 뒤에 도진과 선아가 나란히 섰다.

도진과 친분이 있는 뇌혈관센터장은 그에게 눈인사를 건네곤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둔 채 환자 정보를 확인했다.

“55세 윤현숙 님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그는 현숙의 정보를 대차 확인한 후 MRI 검사 화면을 커다란 모니터에 띄웠다.

“종합검진 전에 문진했을 때 두통 증상이 잦다고 말씀하셨고, 최근 들어 말이 어눌해졌다고 하셨는데, 맞습니까?”

“네. 그치만 특별한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가 사업을 하다 보니까 스트레스도 잦고 이런 증상을 종종 겪었거든요. 푹 쉬고 나면 괜찮아져서 별생각 안 했는데, 여기 있는 류 팀장이 건강 검진을 예약해두었더라고요.”

“네. 도진 군이 개인적으로 뇌 관련해서는 꼼꼼하게 보아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자, 그럼 이쪽 한번 보시겠습니까?”

교수는 펜 끝으로 MRI 화면 중 한 곳을 짚었다.

뇌혈관으로 보이는 것이 실처럼 복잡한 모양으로 꼬아져 있었고, 그 가운데 한 곳이 볼록 튀어나왔다.

“뇌동맥류라고 하는 겁니다.”

“뇌동맥류요?”

선아가 반문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상 소견이 보이는 곳 위에서 한 번 더 원을 그렸다.

“동맥에 균열이 생겨서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걸 말하는 겁니다. 이 부분이 터지게 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뇌출혈이 되는 것이죠.”

뇌출혈이란 말에 선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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