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쉬운 여자
“선아야!”
등 뒤에서 재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아는 멈추어 선 채 천천히 뒤돌아섰다.
재혁이 사색이 된 채로 달려와 선아를 붙잡았다.
“선아야. 너 왜 이래.”
“내가 안 그러게 생겼어? 재혁 씨며 엄마까지 다 나만 원망하잖아. 회사 일 하면서 결혼 준비하고 몸 한 개로는 안 되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선아는 따발총처럼 쏘아댔다. 재혁은 희게 변한 얼굴로 선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잘못했어.”
이럴 줄 알았다.
돌이켜 생각해본바 재혁은 아직 원하는 것 중 무엇도 손에 넣지 못했다.
재혁이 싫지만 세빈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자신처럼, 그 또한 원하는 게 있기에 그녀를 놓지 못할 거라는 게 선아의 생각이었다.
“그러면 약속해.”
“뭘 약속하면 되는데?”
“앞으로 내가 결혼 준비를 어떻게 하든 간에 토를 달지 않겠다고.”
“…….”
“나야말로 회사 일이며 결혼 준비까지 다 잘하고 싶어. 그런데 내가 회사 일만 하려고 하면 재혁 씨가 사사건건 간섭하는 터라 정말 힘들어.”
“나는 그게 아니라……. 네가 회사 일을 무리해서 하느라 힘들까 봐 그랬던 거야. 차라리 일을 그만두고 결혼 준비만 하면-”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게 누구 때문인데?”
“뭐? 그게 나 때문이라고?”
“나중에 내 몫을 나눠 가질 사람이 재혁 씨잖아. 나는 재혁 씨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라고.”
“아…….”
재혁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서리는 걸 보면서 선아는 그를 몰아붙이는 데 박차를 가했다.
“약속 안 할 거야? 내가 뭘 하든 토를 안 달 거라고.”
과거로 왔고, 재혁을 통해 세빈이를 만나야 한다고 하나 바보처럼 당해줄 마음은 추호도 없다.
두 연놈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건 한 번으로 충분하다.
재혁이 원하는 게 무언지 정확히 알았고, 어제 식사 자리에서 희진의 반응으로 보아 그녀 또한 재혁을 놓지 못한다는 걸 확인했다.
그들의 속내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볼 수 있으니, 굳이 저들 입맛에 맞추어주지 않고도 재혁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알겠어. 약속할게. 선아야.”
모든 게 다 선아의 뜻대로 되었다.
“하여튼 이제부터 재혁 씨는 내가 하는 일에 참견도 하지 말고 회사에서는 더더욱 이러지 마. 엄마 말대로 회사에서 사랑싸움하는 거 남들 눈에 좋아 보일 리 없잖아.”
“그래 알았어.”
“재혁 씨가 잘못한 거지?”
“응? 잘못?”
“응. 재혁 씨가 잘못했으니까 사과해야지.”
“아……. 사과……. 미안해……. 선아야. 내가 생각이 짧았어.”
“앞으론 다시 이러지 마.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갈 테니까.”
“어, 그, 그래. 고마워.”
재혁이 얼떨결에 사과를 했고 선아는 당연한 듯 사과를 받았다.
“그럼 나 먼저 사무실로 들어갈 테니까 재혁 씨는 천천히 들어와.”
재혁을 지나쳐 사무실로 간 선아는 팀원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소란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정말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뒤따라온 재혁은 조용히 자리로 가서 앉았다.
솔직히 그는 선아가 이해되지 않았다.
굳이 사무실 직원들에게까지 고갤 숙이고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
그것이 회사를 운영해갈 선아와 자신의 차이였지만, 지난 생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결단코 그 차이를 깨닫지 못할 터였다.
***
인트라넷에 접속한 재혁은 파티션 너머 선아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녀의 아이디 위에 마우스를 놓았다.
그는 쪽지 버튼을 누르고 선아에게 보낼 메시지를 작성했다.
[그렇게까지 사과를 해야 하는 거야?]
버릇처럼 전송을 누르려던 재혁은 멈칫거리면서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복도에서 선아가 했던 말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내가 회사 일만 하려고 하면 재혁 씨가 사사건건 간섭하는 터라 정말 힘들어.’
사사건건 간섭이라는 게 지금 자신의 행동 같은 걸 두고 하는 말인 걸까.
그런 생각이 드니 차마 쪽지 보내기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오른쪽 위의 엑스 표를 눌러 쪽지 창을 지운 재혁은 한숨을 쉬었다.
선아와의 관계가 언제부터 이렇게 꼬여버린 걸까.
잡은 물고기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그의 연애 철칙이었다. 희진에게도 그랬고, 희진을 만나면서 만났던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랬다. 그럴수록 여자들은 더욱더 그에게 목을 맸다.
자신에게 절절매는 여자들을 보면서 재혁은 언제나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선아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돌이켜보면 선아만큼 쉬운 여자도 없었다.
연애도 해본 사람들이 잘한다고, 재혁에게 연애는 늘 하던 것이었지만, 선아는 연애가 처음이었다.
선아는 처음으로 손을 잡았을 적에도, 처음으로 포옹을 했을 때도, 첫 키스 때에도 지나치게 떨었었다. 모든 게 그녀에게는 떨리는 첫 경험이었고, 그녀의 떨림은 재혁에게까지 전해졌었다.
그랬던 선아가 지금은 재혁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일에 열중하고 있다.
파티션 너머에서 들려오는 타이핑 소리를 듣던 재혁의 마음속에서 불안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러다 결혼 깨지는 거 아니야?’
재혁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쭉 뺐다.
정신없이 무언가를 하던 선아가 시선을 느끼고 고갤 들었다.
“!”
시선이 마주치자 선아는 눈꼬리를 둥글게 휘며 재혁을 향해 미소를 띠어 보였다.
그 순간 재혁은 자신의 심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릴 들었다.
쿵.
분명 그런 소리였다.
‘왜?’
입 모양으로 왜 보냐 묻는 선아를 보면서 재혁은 붉어진 얼굴을 내저었다.
저를 두고 애걸복걸하는 선아에게서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었다.
사실 외모 같은 것과 별개로 선아의 성장환경이며 성격은 재혁이 좋아하는 스타일과 천지 차이였다.
장모 될 사람은 자신의 엄마처럼 기가 센 사람이었고, 지금이야 제게 친절하지만 언젠가 본색을 드러낼 거라는 게 재혁의 생각이었다.
그런 사람의 자식이니 선아 또한 그렇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랬던 선아였는데…….
언제부터였을까.
갖고 싶어졌다.
윤선아가 미치도록 갖고 싶다.
윤선아의 배경뿐 아니라 윤선아가 또다시 저를 두고 안달복달하게 만들고 싶다.
자리에 앉은 재혁은 제 마음에서 이는 변화에 혼란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다시 책상 의자에 앉은 그는 제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쾅, 쾅, 쾅. 심장이 지나치게 솔직할 정도로 뛰고 있었다.
***
며칠이 지나고 설문조사가 끝났다.
유투북에서 제공받은 데이터 중 한국의 20대만 표본으로 뽑아 빅데이터를 분석한 것인데도 현재를 살아가는 20대들의 관심사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 뜻은 결국 유투북 빅데이터의 활용 가치가 충분하단 것이었고, 이 빅데이터를 이용해 대중음악을 소비하는 특정 연령대를 온‧오프라인 모두에서 사로잡을 수 있단 뜻이었다.
비단 이번에 설문을 진행한 20대뿐 아니라 다른 연령대의 관심사와 그 변화를 시시각각을 분석해낸다면 전 연령을 아우르는 스타 탄생은 예정된 일이었다.
설문을 통한 빅터의 신뢰도가 검증되자 미래전략팀은 흥분에 휩싸였다.
“우리나라 2030 중심으로 유투북 가입자 는다더니……. 이렇게까지 결괏값이 일치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지난 삶에서 한번 겪은 일임에도 선아 또한 가슴이 뛰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자신의 인생, 아니 세계의 음악사에서 굵직한 자취를 남길 역사의 현장에 자신이 서 있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대어를 낚은 거 같은데!”
“이 빅데이터라면 원픽뿐 아니라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들 마케팅에 모두 활용할 수 있겠어요!”
흥분한 팀원들 속에서 유일하게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이는 도진이었다.
오늘 일을 자축하기 위해 팀장석 쪽으로 고갤 돌린 팀원들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신뢰도 결괏값이 나오기 전과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원래도 무표정한 사람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냉기를 흘리는 듯한 그의 표정에 팀원들의 사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자자, 우리도 일합시다.”
“얼른 보고서 작성해야죠.”
“네. 그럽시다.”
다시 또 정적이 내려앉은 사무실에서 타이핑 소리만이 울렸다.
“음……. 류 팀장은 예측했었던 건가…….”
팀장인 도진보다 직급이 높고 나이가 많은 박성우 차장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런 거 같은데…….”
최대희 과장도 작은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사실 이 둘은 연예인 마케팅에 잔뼈가 굵은 이들로, 빅터 프로그램을 활용한 마케팅에 가장 회의적인 이들이었다.
젊고 경험이 부족한 도진을 돕기 위해 미래전략팀에 적을 두게 된 이들이었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경험을 무기 삼아 도진의 행보에 제동을 거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그들조차도 빅터 프로그램을 활용한 유투북 빅데이터의 신뢰도 조사 결과에 환호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 결괏값이 사실이라면 각 연령과 국적, 인종별 선호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단한 결과를 두고도 도진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혹시 우리가 결과 보고서에서 놓친 뭔가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러게요. 데이터 연산 과정에서 크나큰 오류가 있었다거나…….”
박성우 차장과 최대희 과장이 자신의 손에 들린 보고서를 의심하기 시작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타이핑을 멈춘 도진이 고개를 들고 모니터 너머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
선아 또한 말없이 도진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이날 그가 어땠더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진이 결괏값을 받아 들고 어떤 얼굴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왜냐면 그때의 선아 또한 지금의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이 결과가 기뻤고, 팀원들과 마찬가지로 흥분해 HS 엔터테인먼트와 유투북 첫 마케팅 대상인 원픽의 밝은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선아가 미래와 현재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윤선아 사원.”
저를 부르는 도진의 목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 좀 잠깐 봅시다.”
선아를 부르는 도진의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 선아는 긴장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알겠습니다.”
사무실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재혁이 불안한 시선으로 좇았다.
***
선아는 긴장한 얼굴로 도진을 따라 회의실에 들어섰다.
그녀가 여닫이문을 닫자, 돌아선 도진은 선아를 향해 물었다.
“아침에 사장님한테 이야기 못 들었어?”
“엄마한테? 무슨 이야기?”
“최근 들어 두통이 심하다고 하시더라고.”
“또?”
“응. 엊그제 담배 피우자 하셔서 옥상에 갔더니 한쪽 머릴 붙잡고 계시더라고.”
“어휴, 두통 심하면서 그놈의 담배는 줄이질 못하지.”
선아가 고갤 끄덕였다. 엄마는 만성 두통을 달고 살았고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술도 줄이고 담배도 그만 피우라 잔소릴 해봐도 사업가인 그녀는 술자리를 피할 수 없었고, 고민이 생길 때마다 담뱃갑부터 찾아 쥐고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엄마한테 검진받아보자고 말해볼게.”
“너 정말 아무 말도 못 들었구나.”
“응?”
“최근에 말이 어눌해지셨어. 아무래도 이상해서 오늘 병원 진료 보시게끔 예약 잡아드렸어. 너도 따라갔을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