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25화 (25/85)

25화. 헛짓거리

“설문조사 첫날은 안 돼. 재혁 씨 못 도와.”

“왜 안 되는데?”

“첫날은 내부에서 차장님이나 과장님이 대외협력 업무 시작하실 건데, 공문 수발도 들어야 하고, 협의가 잘 안 되면 관계자 전화 섭외도 내가 해야지.”

“그 정돈 그 사람들도 다 할 수 있어.”

“재혁 씨, 그런 일 하라고 내가 지원 업무에 있는 거야.”

선아가 제안을 거절하자 재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선아야. 너 요즘 이상해.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

“그런 거 아니야. 요즘 나 정말 바빴잖아.”

서버실 업무 관련해 협의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눈을 뜬 후 20일가량을 어떻게 지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보냈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저장한 서버만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서버실을 관리할 시스템까지도 갖추어야 했다.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서버의 열을 식힐 온도 감지부터 온도 유지 장치, 화재가 난다면 곧바로 진압해야 하기에 화재 센서와 진압 장비며 전기 용량과 정전을 대비한 발전 시설까지 서버실을 마련하는 데 협의해야 할 곳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 탓에 밤낮으로 도진에게 보고서를 올리고 관련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재혁 씨. 이런 이야기할 거면 다른 데로 가. 회의실 앞에서 이런 이야기하는 거 좀 불편해.”

선아가 비상계단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자 재혁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미래를 모른다면 정해진 업무만 하면 되겠지만 미래를 아는 이상 선아는 그럴 수 없었다.

국내외 대형 포털 사이트의 경우는 서버만을 관리하는 센터를 축구장의 수배 크기만큼 큰 부지에 두고 극진히 관리할 정도였다

빅터의 서버는 앞으로 있을 HS 엔터테인먼트의 뇌가 될 것이기에 허투루 일할 수 없었다.

선아의 뒤를 따라 걷던 재혁이 볼멘소리를 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너 결혼 준비는 제대로 하고 있긴 한 거야?”

선아는 사실상 결혼 준비를 멈추었다.

신혼여행은 취소하지 않았지만 취소할 예정이었고, 결혼식을 올린 뒤엔 혼인신고도 하지 않고 결혼을 파탄 낼 예정이었다.

집이나 결혼은 지금껏 준비한 대로만 진행하면서 결혼 준비를 잘하는 척하는 건 어쨌든 첫날밤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비상계단으로 나가는 통로에 멈추어 선 선아가 홱 돌아섰다.

“우리 회사에서는 개인적인 이야기 하지 않기로 했잖아.”

“전처럼 결혼 준비를 제대로 하는 거 같지도 않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불안하지 않겠어?”

“결혼 준비가 나 혼자만의 일이야?”

“지금껏 네가 잘해왔잖아.”

“지금도 일하면서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는 거 좋아하네. 어제 인테리어 업자한테 연락 왔어. 네가 연락이 안 된다고. 한 달 전에 협의한 대로 공사 시작하면 되냐고 묻더라. 어젠 뭐 했는데 연락이 안 됐어?”

어젠 도진과 함께 서버실 설비에 대한 회의를 진행했다. 그 와중에 인테리어 업자에게 연락이 와 받지 못했다.

“도진 선배랑 회의했어.”

도진의 이름이 나오자 재혁의 얼굴이 또다시 구겨졌다.

그놈의 류도진, 류도진.

요즘 들어 선아는 도진과 보내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일 때문인 걸 알면서도 재혁은 그 사실이 못마땅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일 때문인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묘하게 자신이 일에서 배제되고 점점 더 작은 업무로 배정이 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 아주 류 팀장이랑 눈 맞겠다?”

“뭐?”

더욱이 불안한 것은 도진을 대하는 선아의 태도나 선아를 대하는 도진의 태도가 전보다 묘하게 부드러워졌단 것이었다.

재혁에게 있어 요즘의 도진은 자신이 잡아놓은 생선을 물어가는 도둑고양이나 다름없었다.

“둘이 일에서도 죽이 짝짝 맞던데 그러다 아예 눈맞아서 살림 차리겠다고.”

재혁의 말에 선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 미친 자식이. 꼭 저 같은 소리나 하고 있네.

“그러니까 재혁 씨 말은 내가 지금 일 안 하고 헛짓거리나 하고 있단 거네?”

“누가 헛짓거리 한대? 그렇게 보인다는 거잖아.”

“결혼 준비도 그래. 결혼 나 혼자 해? 같이 준비해도 되는 거잖아. 인테리어 업자한테 공사 시작하라고 말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거 하날 하고 나한테 생색인데?”

“윤선아?”

재혁이 놀란 듯이 눈을 떴다.

“재혁 씨 보면 매번 그래. 결혼 준비 같은 것들도 매번 한 발짝 뒤에 서 있다가 문제만 생기면 나만 닦달하잖아.”

“내가 언제-”

“그래서 내가 결혼 준비 제대로 안 하고 있으면 나랑 결혼 안 하려고? 지금 나 맘에 안 든다고 욕하는 거지? 이 결혼 파투 내?”

그 순간이었다.

“윤선아.”

복도 끝에서 그녀를 부르는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혁과 선아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 난 쪽을 바라보았다.

복도 끝에 현숙이 서 있었다.

뒷못을 잡고 선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애정을 티 내지 말라고 한 게 현숙이었다.

둘이 사귀는 사실조차도 회사에 알리지 않았을뿐더러, 선아가 쓰러지기 전에는 선아의 결혼상대자가 재혁인 것조차도 비밀이었다.

그렇게나 말했는데도 복도에 서서 헤어지니 마니 하며 사랑싸움을 하고 있다니.

“두 사람 다 사장실로 들어와.”

현숙은 통보를 남긴 채 돌아섰다.

그녀와 함께 담배를 피우러 가던 도진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이 골치 아픈 딸을 어떻게 할까.

현숙은 옥상으로 가 피우려던 담배를 책상에 집어 던졌다.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선아와 재혁이 나란히 서 있었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듯한 선아와 달리 재혁은 풀이 죽은 듯 고갤 숙이고 있었다.

현숙은 머리를 짚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윤선아. 너 HS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한다 했을 때 나는 죽어라 반대했었어. 너한텐 여기가 한낱 회사일지 몰라도 나한텐 젊음 다 바쳐서 키워낸 곳이야.”

“…….”

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그녀의 맘도 편한 건 아니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몸으로 선아를 얻었을 때, 세상에 얼굴이 다 알려진 여배우였기에 엄청난 비난이 따라왔다.

배 속에 든 딸을 원망하기도 하고,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임신 기간을 보냈지만, 태어난 아이는 저를 꼭 빼닮았다.

아이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죄스러울 정도로 예쁜 아이였다.

선아가 태어난 뒤로 그녀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늙은 어머니에게 딸을 맡기고 임신한 제 편을 들어주었던 로드매니저와 함께 독립해 회사를 차렸다.

악착같이 일하느라 딸에게 소홀했지만, 아빠 없는 딸에게 무어라도 더 해주고 싶단 마음에 더 열심히 일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선아는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가장인 자신이 일하지 않으면 돈을 벌 사람이 없기에 사춘기의 딸 옆에도 있어 주지 못한 채 일에 매진했다.

딸이 외롭게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랬기에 저 좋다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결혼을 허락한 것이었다.

문제는 두 사람 다 HS 엔터테인먼트에 재직 중이란 사실이었다. 현숙은 밑바닥부터 시작해 이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자수성가한 사람답게 자립심도 컸고, 인생의 풍파를 스스로 겪으며 이겨내야지만 삶의 무게를 온전히 견딜 수 있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HS 엔터테인먼트의 직원이 된 딸과 딸의 정혼자가 경거망동하지 않기를, 이 회사 안에서만큼은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하고 지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회사 안에서 사랑싸움이라니.

선아와 재혁은 보지 못했겠지만, 코너 뒤에서 직원들이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저러다 진짜 결혼 파투 나는 거 아니야?’

‘이래서 사내 연애, 사내 결혼은 아니라고 했는데…….’

현숙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선아를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네가 사내에서 그러면 직원들은 어쩔 수 없이 네 눈치를 보게 돼. 똑같이 공채로 입사해놓고도 엄마 위세를 등에 업고 기고만장하단 소릴 듣는다고. 나는 네가 그런 소릴 듣는 것도 싫고, 내가 그런 거 눈감아주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도 싫어. 이건 너나 나한테도 하등 좋을 게 없단 이야기야.”

솔직히 말하면 현숙도 이 결혼이 썩 달가운 건 아니었다. 재혁의 됨됨이야 성구를 통해 들었으니 안다 치지만, 선아와 재혁의 연애 기간이 너무 짧았다.

연애 기간이 길어 서로를 다 알아도 결혼해서 살다 보면 맞지 않는 부분이 보이는 게 부부생활이었다.

짧게 연애를 했음에도 결혼을 허락한 건 재혁에 대한 선아의 마음이 확고해서였지, 이렇게 결혼 준비를 하면서 싸워댈 줄 몰랐다.

“남들은 회사에서 사회생활하고 일만 하기에도 벅차. 너희처럼 사랑놀이하면서 설렁설렁 회사 다니지 않는다고. 남들이 보면 너희들 내 빽 믿고 설친다고 하겠니, 안 하겠니. 내가 너희 둘 그러는 거 보고 두통이 일어, 두통이.”

재혁이 고갤 숙인 채 말했다.

“죄송합니다.”

선아는 여전히 입을 꾹 닫고 있었다. 현숙의 시선은 재혁에게서 선아로 옮겨갔다.

“윤선아. 너는 왜 말이 없어. 또 싸울 거야, 말 거야?”

선아는 제 구두코만 바라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아는 엄마가 저렇게 화를 내는 게 제게서 기인했음을 모르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과거의 자신에게서 시작되었다.

엄마의 염려에도 과거의 선아는 재혁을 너무도 좋아했고, 얼마 사귀지도 않은 그와 결혼까지 강행했다.

자신을 속였다고 재혁을 원망할 수도 없는 게, 사기꾼들이 하는 일들이 다 그런 것이었다.

물론 속인 자야 당연히 죄가 있지만, 그 못지않게 무엇도 검증하지 않고 믿은 자신의 죄도 크다.

그래서 이번 생은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다.

지난 생에서는 재혁에게 콩깍지가 씐 채 홀로 꾸역꾸역 결혼 준비를 다 하고 예민해져서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 모든 것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사랑은 역경을 딛고 완성하는 건 줄 알았다.

그러나 역경을 딛고 완성하는 사랑 따위는 없었다.

역경이 있을지언정 같은 마음으로 함께 노력해서 완성하는 게 사랑이었다.

지금의 엄마 눈엔 결혼 준비를 하면서 결혼을 하느니 마느니 하는 한심한 사람으로밖에는 안 보이겠지만, 이제는 잘못된 걸 덮어두기만 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엄마,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도 못 해?”

“뭐?”

“재혁 씨가 결혼 준비를 나한테 다 미루잖아. 자기는 결혼 당사자가 아닌 것처럼 쏙 빠져 있고. 그게 잘못되어서 잘못됐다고 말한 건데, 그런 것도 하면 안 되는 거야?”

선아의 말에 현숙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그걸 왜 회사에서 하느냔 거지!”

“재혁 씨가 나보고 일만 하고 결혼 준비 않는다잖아. 본인이야말로 결혼 준비에서 쏙 빠져 있었으면서.”

“너 내 말은 아예 이해를 못 하는구나? 그렇게 계속 회사에서 사랑싸움할 거면 다 때려치우고 결혼이나 준비해. 공과 사 구분 못 하고 애처럼 굴 거면 집에 틀어박혀서 결혼이나 준비하라고!”

“그래. 알았어. 다 때려치울게.”

사실 이 말이야말로 홀로 결혼 준비를 하던 이전 삶에서 선아가 몇 번이고 내뱉고 싶은 말이었다.

그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홀로 아등바등 노력하는 듯한 마음을 지울 수 없던 나날들이었다.

홱 돌아선 선아가 사장실 문을 닫고 나갔다.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현숙은 담배를 향해 손을 뻗었고, 재혁은 놀란 얼굴로 뒤돌아섰다.

***

복도로 나간 선아는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속으로 시간을 셌다.

하나, 둘, 셋…….

달칵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아야!”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선아의 얼굴이 조소로 물들었다.

그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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