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24화 (24/85)

24화. 순종

재혁을 사랑한다는 말에 도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병원에서부터 조금 전 복도에서까지 재혁과 반목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의 걱정이 이해되었지만, 그럼에도 확실히 해둬야 할 게 있었다.

“그보다 선배.”

“응.”

“선배랑 나랑 그런 걱정까지 주고받을 만큼 친하진 않잖아.”

물론 미래에서 도진은 누구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도진의 활약으로 회사가 크게 성장하면서 선아의 자산을 불려준 게 도진이었다.

출산 후에도 그는 꾸준히 선아의 안부를 물어보았고, 출산과 함께 사회와 단절이 된 선아는 그에게 육아 고충을 털어놓았다.

갑작스러운 현숙의 죽음 이후, 혼란에 빠진 선아와 성구를 대신해 장례 후 수습을 도운 것도 도진이었다.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이 시기의 선아는 도진이 매우 어려웠었다.

재혁에게는 과거와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속내를 꿰뚫고 있어서지만, 도진은 아니다.

도진이 세빈이를 만나는 데 어떤 변수가 될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선배가 내게 중요한 업무를 맡게 해준 거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 근데 선배, 그것과 사생활은 별개야.”

돌아온 현재에서 가장 바뀐 사람은 도진이다.

그가 계속해서 다르게 행동을 하고 재혁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그녀가 클라우드를 통해 보았던 미래마저 뒤틀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세빈이를 다시 만날 방법이 사라진다.

“웬만해서는 회사 일은 회사에서 하는 걸로 해줘. 그리고 아무래도 선배랑 재혁 씨 나이 차가 거의 안 나서인지 재혁 씨가 선배 좀 불편해해. 그래서 예민하게 구는 거니 선배가 이해해줘.”

그리고 제발 예전처럼 행동해줘.

나한테는 세빈이를 다시 만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해.

“자료 설명해준다고 했지? 얼른 설명해줘. 주말이니까 선배도 돌아가서 쉬어야지.”

미래에 항상 도움을 받았던 도진에게 냉정하게 구는 것이 미안했지만, 선아는 딱딱한 얼굴로 그에게서 받은 USB를 랩톱에 연결했다.

미안해. 선배.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이 삶에서 세빈이를 꼭 만나야 해.

***

2층 계단을 내려오는 도진을 희진은 불안한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재혁은 무엇이든 달관한 태도를 보여왔다. 자신에게마저도 집착하지 않는 그 모습이 희진의 애를 태우면서도 그녀를 안달복달하게 했었다.

그런데 조금 전, 선아와 도진의 뒤를 따라가는 재혁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절박해 보였다.

선아에게 거짓 사랑을 연기하면서도 한 번도 그녀 때문에 동요하지 않았는데, 저렇게 애달파하는 재혁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선아와 도진의 모습이 진심으로 신경이 쓰이기라도 하는 듯 보였다.

“선아는 인수인계 받을 게 많대?”

현숙의 말에 재혁은 멋쩍은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전략팀 일이 아무래도 변칙적이잖아요. 류 팀장님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팀장님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업무 하달도 있고요.”

재혁은 선아의 변명을 대신했다. 이렇게 변명을 대신해주는 건 제 자존심 때문이었다.

“지금껏 해오던 일이 아니니까 아무래도 그렇긴 하겠지.”

수긍하는 현숙을 향해 재혁은 작별을 고했다.

“저는 식사했으니 이만 가볼까 합니다. 선아도 기다리지 말고 가라고 하고요.”

여기서 선아를 기다리느라 초조해하느니 밖으로 나가 이 더러운 기분을 털어내고 싶었다.

어쩐지 두 사람 관계의 위계가 뒤바뀌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 찜찜한 기분을 희진과의 잠자리로 털어버릴 생각이었다.

재혁은 손에서 배어난 땀을 바지에 비벼 닦았다. 그는 최근 들어 선아와 도진의 모습에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그 초조함의 원인이 윤선아와 한번 자보고 싶다는 욕정에서 기인할 거라고 단정 지었다.

제가 잡은 물고기가 저를 잡아먹을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한 채, 돈과 안락한 삶을 위해 선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만을 했다.

현숙이 재혁을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예비 사위에 희진이까지, 다 같이 모여서 참 좋았어. 재혁이와 결혼하고 나서 손주도 태어나면 복작복작해지고 더 좋아지겠지.”

맞은편에서 과일을 깨작거리고 있던 희진은 황급히 포크를 놓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희진이도 가려고?”

“네. 아줌마.”

“주말인데 더 이따 가지 않고. 아빠랑도 더 이야기 나누고.”

“저 학원 수업이 있어서요.”

“그래? 수업이라니 아쉬워도 별수 없지 뭐. 재혁이가 나가는 김에 희진이 역에까지라도 데려다주면 좋겠구나.”

“네. 아버님 그럴게요. 아버님 오늘 점심 잘 먹었습니다.”

성구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다음에 와선 더 길게 있다가. 희진이는 올 때 미리 연락해주고. 반찬이라도 싸놓게.”

“알았어, 아빠. 가볼게. 아줌마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현관 앞에서 현숙과 성구에게 인사를 한 두 사람이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오자마자 재혁은 숨통이 트였다.

이 커다란 집을 가진 이의 사위가 된다는 건 기쁜 사실이었지만, 이곳에 오면 큰 집이 자신을 누르는 듯했다.

모두 탐나는 것들인데 낯섦이라는 건 언제나 불쾌한 거부감부터 불러일으켰다.

다양한 것을 경험하면서 자랄 환경이 되지 않았던 그는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이 어려웠고 그래서 늘 기피하곤 했다.

선아와 이 집도 마찬가지였다.

재혁은 자동차 옆자리에 올라타서 안전띠를 매는 희진을 진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안전한 날 맞지?”

“오늘? 아, 응……. 맞아.”

자신의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희진이 옆에 있으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보잘것없어도 안락한 그의 세상은 모두 다 그의 뜻대로 돌아갔다.

나이 든 아버지는 이제 자신을 때리지 못했고, 그가 벌어오는 돈을 눈독 들이며 그의 눈치를 보기 일쑤였고, 짜증을 자주 내는 어머니는 더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했다.

순종적인 희진은 그가 하자는 대로 무엇이든 다 했다.

“그럼 콘돔 안 써도 되는 거야?”

“응…….”

“너 근데 아까 류도진 같은 사람이 이상형이라는 말은 뭐야?”

“나는 그런 말 안 했어……. 선아가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한 거지.”

“멋대로 그렇게 말해도 아니라고는 할 수 있는 거잖아. 근데 왜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그냥 그 자리 분위기가 그러니까…….”

재혁은 핸들 잡지 않은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나 그렇게 앞 다르고 뒤 다른 사람 별로야.”

“…….”

희진이야말로 재혁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왜 선아를 그런 눈으로 보냐고. 선아는 그저 신분 상승의 사다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마뜩잖은 표정으로 운전을 하는 재혁 앞에서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해야 재혁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일 따름이었다.

***

“유투북에서 추출한 키워드를 바탕으로 20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할 겁니다.”

회의실 상석에 선 도진에게로 팀원들의 시선이 모였다.

“설문조사 기간은 앞으로 10일. 팀원별로 맡은 영역에서 설문을 진행하고, 결과를 도출해 빅터에서 추출한 키워드와 대조해볼 예정입니다.”

시범적으로 받아본 빅데이터에서 20대 관련 키워드 추출을 마쳤다.

유투북을 통해 20대들이 가장 많이 본 동영상은 직업과 취업 준비에 관한 것이었고, 그다음으로 소비와 여행이 뒤를 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 반면에 그를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가 내재한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미래전략팀에서는 유투북에서 추출한 키워드가 한국 20대의 관심사와 같은지 신뢰도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박성우 차장님께서는 대외협력팀과 함께해 산학협력 중인 대학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 진행해주십시오.”

“네. 성적 조회와 정정 관련해서 학생들이 학교 온라인 페이지를 많이 이용할 시기이니 연계에서 설문조사 진행하면 되겠군요.”

“네. 오프라인으로도 설문조사를 진행할 거지만 한계가 있기에 온라인에서 최대한 많은 응답을 끌어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사내에서 직급이 높은 이들은 현장을 뛰기보다는 외부 협력을 끌어내는 업무를 맡았다.

HS 엔터테인먼트에서 강연을 나가는 대학이나 HS 엔터테인먼트의 연예인들이 홍보모델로 있는 기업에서 설문조사를 협조받았다.

남은 이들은 대리 직급과 사원들이었다.

도진은 대리 이하 직급에겐 외부에서 오프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강남과 명동 일대를 돌면서 20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하는 일로 업무는 단순했지만, 몸을 쓰는 일이었다.

“신유미 대리는…….”

팀원들에게 일을 배정하던 도진은 신유미 대리를 바라보며 고민에 잠겼다.

“내부에서 설문조사 진행 상황을 점검해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설문조사 용지를 들고 강남이나 명동 일대의 번화가로 나가게 될 줄 알았던 신유미 대리는 놀란 듯했지만, 결과를 받아들였다.

의외라 생각한 것은 선아였다. 설문조사 진행 상황을 체크하고 결과를 도출하는 일은 과거 도진의 일이었다.

재혁에게만 다른 일을 주는 줄 알았는데 현재에서의 도진은 신유미 대리에게도 다른 일을 주었다.

자신이 이 변화에 영향을 준 것인가 생각을 하던 선아는 도진의 부름에 생각을 멈추었다.

“마지막으로 윤선아 씨.”

“아. 네.”

“윤선아 씨는 지원 업무를 맡아주세요.”

말이 지원 업무지 실상은 노가다에 가까운 업무였다. 정해진 업무가 하나 있으면 그사이 사이에 쉴 시간이 존재하지만, 지원 업무는 맡은 영역 없이 필요한 모든 곳에 손을 보태는 일이었다.

외부에서 설문조사 용지가 부족하다고 하면 직접 설문조사 용지를 배달하거나 공문만으로 대외 협력이 어려울 땐 관계자와의 접선 일정을 잡는다.

더불어 신유미 대리가 맡은, 설문조사 진행을 체크하며 프로그램에 조사 값을 입력하는 일까지도 지원 업무를 하는 이가 할 일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제일 까다로운 힘이든 일이었지만 반대로 일을 가장 많이 보고 배울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팀장님, 제가 특별히 신경 써서 지원해야 하는 업무는 무얼까요?”

“판단은 윤선아 씨 본인에게 맡기겠습니다.”

이것 또한 바뀐 현재였다. 과거에 이 일은 재혁이 맡은 일이었다.

과거에 도진은 재혁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었다.

살상 능력이 특출나지 않았던 재혁이 HS 엔터테인먼트 사장으로 자리 잡는 데에 도진의 도움이 컸다.

본인이야 그에 대한 일말의 고마움도 없는 듯했지만, 선아는 늘 도진에게 고마웠다.

오후 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재혁이 다가왔다.

“내일부터 설문조사 시작이니까 나랑 같이 강남으로 가. 첫날엔 다른 사람 지원할 일도 없을 거 아니야.”

재혁은 오프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하게 되었단 말을 들은 순간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선아가 보기엔 나름대로 자신이 이 회사 사장의 사위가 될 사람인데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해 뿔이 난 듯했다.

선아의 퇴사 이후, 후계자 수업을 시작한 재혁이 어깨에 힘을 빵빵하게 주고 다녔던 게 생각난 선아는 홀로 조소했다.

“왜 웃는데?”

“아니야. 갑자기 뭐 하나가 생각나서.”

“나랑 같이 강남 가자. 설문조사 같이 하고 겸사겸사 바람도 쐬자.”

“최대한 많은 응답 받아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어딨어.”

물론 과거의 선아는 설문조사를 진행하면서 길거리 음식도 사 먹었고, 농땡이를 부리긴 했었다.

원래 외근이라는 게 일이 70%면 30% 정도는 외유라 보면 되었다. 선아뿐 아니라 다들 그렇게 하고 있었다.

문제는 재혁과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 쪽 일 도와줘. 다른 사람들은 둘씩 조인데, 나만 가까운 데로 나간다고 혼자 조사한단 말이야.”

선아는 떼를 쓰듯 저를 붙잡는 재혁을 바라보았다.

요즘 유난히도 그가 선아에게 목을 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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