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23화 (23/85)

23화. 불순물

다이닝룸으로 돌아가려던 희진은 안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자신이 빠진 네 식구의 모습은 완벽해 보였다. 젊고 예쁜 예비 부부와 그들을 지켜보는 부모의 모습은 평화로운 가정의 모범답안 같았다.

사랑이 넘치는 가정, 이곳에서 자신만이 불순물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재혁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가.

선아에게 자연스럽게 사랑한다고 말하던 재혁이었지만 아직까지는 희진에게 자처해서 그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사랑해, 재혁 씨. 재혁 씨는?’

‘나도 사랑해.’

그나마도 관계 중에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몇 번 그렇다 대답한 게 다였다.

그 말을 들으려고 침대 위에서 재혁에게 안 해줘 본 것이 없었다. 그렇게나 힘들게 들은 말이었는데…….

‘세상에서 제일?’

‘당연하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선아는 당연하다는 듯 재혁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요구했고. 그 말을 들었다.

그녀가 재혁과 자신의 관계를 모른다는 건 중요치 않았다.

선아가 싫다.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한 윤선아가 싫다.

미움은 들불처럼 온 마음으로 번졌다.

‘윤선아, 죽이고 싶어. 죽이고 싶어.’

악독한 마음과 달리 희진의 눈엔 무기력한 눈물이 찼다. 재혁을 되찾아오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둘의 관계를 털어놓는다면 재혁은 자신을 버릴 것이다.

“희진아, 희진아. 얼른 밥 먹으러 와.”

주방에서 눈치 없는 선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꼴로는 화목한 저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들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재혼으로 새 부인에게 기대 호강하는 아빠처럼 자신 또한 이 집에서 받은 돈으로 먹고살기 때문이다.

“희진아, 얼른 와. 삼계탕 식으면 맛없어.”

선아의 채근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식탁으로 가지 않으면 선아가 자신을 데리러 거실로 올 것만 같았다.

선아에게만은 비참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희진이 억지로 발걸음을 뗄 때였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인터폰 확인할게요!”

다이닝룸 쪽으로 소리친 희진이 인터폰 앞으로 왔다.

“어?”

인터폰에 비친 남자의 얼굴을 본 희진은 눈을 크게 떴다.

택배기사나 이 집에 드나드는 다른 누군가일 거라고 생각하고 인터폰을 든 것이었는데, 지금 이 집에 올 리 없는 사람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류도진이라는 사람 아닌가……?”

대문 앞에 서 있는 이는 도진이었다.

딱 한 번 도진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TF팀 발족을 기념하는 사진에서였다.

‘이 새끼가 류도진이야. 딱 봐도 기생오라비처럼 생겼잖아. 그런 주제에 얼마나 철벽을 치는지. 이 새끼 분명 뒤에서는 별짓 다 할 거야.’

재혁은 그를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희진의 뇌리 깊숙이 그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연예인을 제외하고 그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이었다. 재혁의 비아냥이 아니었더라면 회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세트장에 있는 배우인 줄 알았을 것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데. 하필이면 그가 오늘 이 집에 왔다.

희진은 당황한 채, 도진을 집 안에 들여야 하는지 묻지도 않은 채 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누구 왔어?”

거실로 나온 선아가 저를 내려다보면서 물었을 때 그제야 정신을 차린 희진은 머뭇거리며 입술을 열었다.

“류도진 팀장이라는 그분.”

“도진 선배?”

“응. 그분…….”

“어? 도진 선배가 왜 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관을 향해가는 선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희진은 마른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저랑 동갑인데, 왜 선아 앞에만 서면 이렇게 주눅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

식사를 마친 가족들이 거실에 둘러앉았다. 도진이 자리에 앉자 성구는 주방에서 과일 플레이트를 만들어와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도진의 앞에 뜨끈한 홍차가 놓였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찻잔의 고리를 쥐고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도진의 이야기를 하던 차에 그를 맞이하게 된 이들의 시선이 도진의 얼굴에 가서 닿았지만, 평소에도 표정 변화가 적던 그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마셨다.

“선배, 갑자기 무슨 일이야?”

선아의 말이 끝나자 느긋하게 찻잔을 내려놓은 도진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서버실 업무 관련해서 인수인계 사항 모아놓은 것.”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은빛 USB였다. 선아는 실소했다.

이럴 때 보면 도진이 연애보다도 일을 더 좋아한다는 게 뜬소문만은 아닌 거 같았다.

“선아가 서버실 업무를 맡게 되었나 보구나. 그런데 류 팀장. 인수인계 파일이라면 메일로 전해도 될걸. 휴일에 이렇게 어려움 걸음을 했어?”

선아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서버실 업무는 아직까지 대외빕니다. 유출 위험이 있는 사내 메일로 자료 공유하면 안 되죠.”

“그래그래. 류 팀장 하는 일이야 완벽하지. 그랬으니 여기까지 와서 자료 공유하는 거겠지.”

현숙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정했지만, 재혁의 표정은 더욱 못마땅해졌다.

일을 꼭 저렇게까지 티 내면서 해야 하는지, 남의 가족 주말까지 망쳐가면서 찾아와야 하는 건지 마뜩잖은 내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선배.”

선아는 회사 밖에서 쓰는 친숙한 호칭으로 도진을 불렀다. 재혁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선아를 바라보았다.

“내가 따로 더 들어야 할 이야기 있는 거면 내 방으로 올라갈래?”

이 자리엔 엄마뿐 아니라 희진과 재혁도 함께 있었다. 전이라면 재혁에게 자신의 모든 걸 공유했겠지만, 이제 그와는 업무 이야기조차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따로 이야기하자.”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재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이쪽으로. 선배.”

재혁이 그러거나 말거나 선아는 도진을 데리고 2층으로 향했다.

“저기…….”

재혁이 벌떡 일어나 두 사람의 뒤를 따라왔다. 2층까지 따라 올라온 재혁은 복도에서 선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선아야. 네가 나 집으로 초대한 거잖아. 나 두고 쏙 올라가는 게 어딨어.”

이 자리에 와서 내내 도진이랑 비교당했는데, 결혼할 여자마저 도진이 쏙 빼앗아 가는 것만 같아 못마땅했다.

재혁에게 있어서 도진이란 뜬구름처럼 하늘에 떠서 저를 내려다보는 존재였고, 발 딛고 선 곳이 아예 달라서 닿을 수도 없는 재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저만 바라보는 제 여자를 앗아가는 것 같은 기분에 재혁은 선아의 손목을 꽉 쥔 채 놓지 않았다.

“재혁 씨, 왜 이래? 손목 좀 놓아. 아프단 말이야.”

“아무리 류 팀장님이 왔어도 그렇지, 날 불러놓고 바람맞히는 경우가 어딨어?”

“손님이 한 명 더 왔잖아. 게다가 재혁 씨랑 할 이야기는 나중에도 할 수 있는 이야기고, 일은 때가 있는 거잖아.”

“결혼 준비 이야기도 때가 있는 이야기잖아.”

결혼 준비라니. 가당치도 않다. 누가 저따위와 결혼 생활을 한다고.

지금의 선아에게 우선순위는 당연히 일이었다. 게다가 서버실 관련 일이다.

앞으로 8년간, 아니 자신이 살아보지 않은 더 먼 미래까지 서버실은 HS 엔터테인먼트의 뇌나 다름없다.

“결혼 준비는 내가 알아서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뭘 하고 있는지 이야기가 듣고 싶다니까?”

평소답지 않게 구는 재혁을 보면서 선아는 미간을 모았다.

“언젠 재혁 씨가 결혼 준비했어? 솔직히 하나부터 열까지 내 의견에 고개만 끄덕였잖아. 재혁 씨 우리 신혼집 인테리어가 얼마나 진행됐는지는 알아?”

선아는 재혁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의 손을 떨구어 냈다.

“재혁 씨 이럴 때마다 매력이 떨어져.”

지난밤에 내린 결론은 저 때문에 미래가 달라진다 해도 과거처럼 바보같이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뭐?”

“재혁 씨 이렇게 공사 구분 없는 사람 아니었잖아. 경우가 좀 정도껏은 있어야지. 여기 우리 집에다가 도진 선배가 일 관련해서 할 이야기 있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잖아.”

“…….”

“밥 다 먹었으면 가. 결혼 준비 이야긴 전화로 해.”

생각해보면 재혁이 사랑한 건 윤선아라는 사람이 아니라 윤선아가 가진 배경과 돈이었다. 그랬기에 자신이 달라진다고 하여 재혁이 저를 떠날 리가 없었다.

굳이 아등바등 싫은 인간을 대하는 거보다야 할 말 다 하고, 제 할 일 다 한 뒤에 예정대로 재혁과 결혼식까지 치를 것이다.

선아는 재혁을 남겨둔 채 뒤돌아섰다.

두 사람에게 한 발짝 떨어진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진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달칵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

***

문가에 선 도진은 방을 둘러보다가 돌아섰다. 선아와 도진의 눈이 마주쳤다.

“선배 내가 들어야 할 이야기가 뭐야?”

“결혼할 거야?”

“뭐?”

“이재혁 씨랑 결혼할 거냐고. 나는 네가 이 결혼 안 했으면 좋겠는데.”

도진이 이전 삶에선 하지 않은 이야길 꺼냈다.

선아는 도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버실 일을 제게 맡긴 것도 그렇고, 결혼에 대해 묻는 것도 그렇고, 도진이야말로 그녀의 회귀한 삶에서 가장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네가 이 결혼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오랫동안 알던 지인으로서 하는 말이야. 결혼을 하면 네 생각보다도 포기해야 할 게 많아. 작년에 입사해서 한참 일 배울 땐데 아깝지 않아?”

아깝지 않을 리가 없다. 살림하기 위해 대학까지 공부를 한 게 아닐진대, 아이를 낳고 난 후엔 도저히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세빈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면서 예쁘게 차려입고 출근하는 또래 여자들을 보았을 때, 살림만을 하면서 점점 푸석해지는 자신을 마주했을 때, 선아는 짧았던 사회생활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짧았던 사회생활보다 더 값진 시간이 세빈이를 낳고 기르는 시간이었다.

사회생활은 분명 보람되었지만, 세빈이가 엄마란 말을 처음으로 했을 때, 세빈이가 이유식을 남김없이 비웠을 때, 처음으로 문장으로 된 말을 했을 때 느꼈던 성취감에 비하면 모두 다 하잘것없었다.

그랬기에 세빈이를 다시 만나야 했다.

“선배 말뜻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결혼해서도 나 일할 거야.”

더불어 일을 놓을 마음도 없었다.

“선아야, 지금 우리 팀에서 하는 프로젝트가 단기 프로젝트가 아니야.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최소 3년은 기다려야 할 건데.”

알고 있었다. 미래에서도 유투북 마케팅이 궤도에 오르는 데까지는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어.”

선아는 이번 생에서만큼은 육아와 일이라는 두 가지를 병행할 작정이었다.

“그러다 임신이라도 하면?”

“뭐?”

“알다시피 우리 프로젝트팀이 그렇게 녹록지 않아. 추가 근무할 수 없는 임산부까지 데리고 일해야 할 만큼 인력이 넉넉하지 않다고. 지금 네가 맡은 서버 관련한 업무만 하더라도-”

“도진 선배.”

“…….”

“나 좀 선배한테 실망인데. 임출육 때문에 노력 여하와 상관없이 일 못 한다는 거야?”

“현실적으로 그렇단 거야.”

“선배.”

선아가 도진의 말을 끊었다.

세빈이를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니 적어도 식장까지는 들어가야 하고, 재혁과 끔찍했던 첫날밤 또한 다시 겪어야 한다.

그런 희생쯤은 세빈이 만나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 재혁 씨 아이 낳고 싶어.”

“…….”

“나 그이 사랑해.”

굳이 사랑이란 말을 뱉은 건, 이 말 빼고는 자신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도진을 안심시킬 방법이 없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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