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첫 경험
“희진아, 너 어떤 스타일 좋아해?”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선아의 질문에 희진은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선아야. 그러고 보니 류도진 팀장 말이다. 그런 사람은 없어?”
희진 대신 말한 이는 성구였다.
“도진 선배요?”
뜻밖에도 도진의 이름이 나오자 선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류 팀장이 그렇게 사람이 좋고 똑똑하다면서. 하기야. 그런 남자를 세상 사람들이 가만둘 리가 없지. 이미 임자 있지?”
선아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알기로 도진은 대학생 때부터 연애 한번 한 적 없었다.
더 의아한 건 이전 삶에서도 도진이 연애를 한단 이야길 들은 적이 없었단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지나치게 잘생겨서 서늘한 인상이라는 점, 그래서 다가서기 어려운 이미지라는 점만 빼면 도진은 선아가 아는 한 가장 완벽한 남자였다.
능력이면 능력, 집안이면 집안, 무엇 하나 빠지지 않으니 어쩌면 재혁도 도진을 두고 홀로 열등감을 불태우는 걸 테다.
“류도진 팀장이면 우리 희진이도 믿고 맡길 수 있을 텐데.”
언감생심이었다. 도진이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는 몰라도 희진이라니…….
“도진 선배는 어쩐지 소개팅 이야기 꺼내기가 어려워요. 연애보다도 일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요.”
연애보다 일을 더 좋아할 거란 건 소문이었다.
사내에서는 도진을 두고 바늘 들어갈 틈도 없다느니 하는 말이 돌았다. 지금껏 선아도 그렇게 생각할 정도니까.
“근데 왜 그렇게 일을 좋아하는 거니? 굳이 밖에서 일 안 해도 집안일 하면 되잖아. 공학도가 아니라 의학도라면서.”
성구의 말에 현숙이 끼어들었다.
“여보,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서운하죠. 도진이 똑똑한 거 알면서도 우리 회사에 붙잡은 게 난데.”
“아아. 그랬지.”
“도진이 불러 앉혔다고 내가 류 회장님한테 얼마나 쓴소리 들었는지 몰라요. 이제야 도진이 일이 궤도에 오르려고 하는데, 도진이 의사 한다고 나가면 내가 제일 아쉬울 거예요.”
현숙의 말대로였다. 도진은 의사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다. 4대에 걸쳐 자식들을 의사로 키워낸 그 집안은 의과대학뿐 아니라 대학병원을 소유하고 있었다.
재단 이사장인 그의 아버지는 막내아들인 도진까지 의사로 만드는 게 소원이었지만, 의예대까지 입학한 도진은 그 좋은 머리로 의학을 공부하지 않고 공학에 열을 올렸다.
그 어렵다는 의사 국가고시를 치르면서도 프로그래밍 동아리 활동을 하고 빅터 프로그램을 개발했으니 말이다.
“서 회장님이 늦게 낳은 자식이라고 도진이한테 신경을 많이 썼지. 아들 셋 중에 머리가 제일 좋아서 기대도 제일 컸을 거야.”
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아와 도진이 처음 만난 건 대학 동아리 활동에서였다.
프로그래밍 동아리와 마케팅 동아리가 협업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대학에서 동아리 지원금을 주는 프로젝트였다.
잘생긴 선배가 있다는 말에 활동에 지원했지만, 정작 그 잘생긴 선배는 프로그래밍에만 미쳐 있었고, 그게 도진이었다.
“도진이가 은근히 괴짜야. 그 집 어른들이 도진이 어릴 적부터 재롱 한번 보겠다고 사정사정을 하는데도 컴퓨터를 갖고 놀던 애야. 듣기론 말 배울 때부터 컴퓨터 만졌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천재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잘생긴 선배와는 부모끼리 연이 닿아 있었다.
도진네 재단 병원에 원정 치료를 온 외국 VIP들이 한류스타를 만나길 바라는 일이 종종 있었다.
UAE에서 온 왕족이 입원했을 때 병원 재단에서 현숙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당시 현숙이 승낙해 HS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들이 병문안을 갔었는데, 그런 일이 몇 번 있은 뒤로 류 이사장과 현숙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몇 해 전, 도진이 HS 엔터테인먼트에 입사지원서를 냈을 때도, 현숙은 류 이사장에게 연락을 넣어 도진을 어떻게 할지 상담하기도 했다.
도진이 자기소개서에서 소개한 빅터 프로그램을 마케팅에 써보고 싶었지만, 류 이사장과도 척질 수 없었던 현숙은 어렵게 류 이사장의 허락을 받아 도진의 입사를 성사시켰다.
“원래 세상은 그런 괴짜가 이끌어간다는데. 나는 도진이가 일을 한번 칠 거 같긴 해.”
현숙의 말대로 미래에 도진은 큰 사고를 친다. 빅터 프로그램으로 분석한 빅데이터를 가지고 비틀즈에 버금간다는 보이 그룹을 탄생시켰으니 말이다.
“그런 류 팀장이랑 우리 희진이가 이어지면 참 좋을 텐데…….”
성구는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런 성구를 보던 선아는 고개를 돌려 재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그는 턱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다.
그게 자신의 애인을 도진에게 붙이는 데 대한 질투인 건지, 아니면 도진에 대한 열등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저렇게 못나 보이는 남자를 과거에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마도 재혁의 반응 때문이었나 보다. 선아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희진이도 도진 선배 같은 사람이 이상형이야?”
닭고길 씹고 있던 희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진짠가 보네?”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선아는 희진을 몰아붙였다.
“하긴 도진 선배가 눈 돌아갈 만큼 잘생기긴 했잖아. 재혁 씨보다도 키가 10cm나 클 만큼 훤칠하기도 하고.”
그 말에 희진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선아를 바라보았다. 저로서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남자를 아무렇게나 말하는 선아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선아야, 재혁이 들으면 기분 나쁠라.”
현숙이 슬그머니 말렸다.
“엄마, 남이 그러면 안 되지만 나는 그래도 돼. 재혁 씨는 내 남자잖아.”
이번엔 희진의 턱뼈가 도드라졌다. 저렇게 이를 악물면 사각턱 될 텐데…….
선아는 쓸데없는 걱정을 집어치우고, 보란 듯이 재혁에게 질문했다.
“재혁 씨, 재혁 씨는 내 남자니까 나는 이런 말 해도 되지?”
“그럼. 다른 사람이 그러면 기분 나빠도 선아 네가 하는 말은 다르지.”
“난 재혁 씨가 이런 말 할 때 참 좋더라. 사랑해, 재혁 씨. 재혁 씨도 그렇지?”
희진 들으라는 듯 일부러 한 말이다. 재혁 또한 곧바로 대답했다.
“응. 나도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당연하지. 세상에서 윤선아를 제일 사랑하지.”
깨가 쏟아지는 예비 부부의 모습에 현숙과 성구는 기분 좋은 듯 미소 지었다.
다만 한 사람.
“저는 화장실 다녀올게요.”
희진만은 그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
화장실 핑계를 대고 거실에 나온 희진은 거짓말을 하는 게 머쓱해 화장실에 갔다가 거실로 나왔다.
다이닝룸으로 다시 가야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재혁과 선아가 시시덕거리는 꼴이 보고 싶지 않았다.
희진의 아빠가 HS 엔터테인먼트 사장과 결혼했다는 소식에 재혁은 성구의 덕을 봐야겠다면서 HS 엔터테인먼트에 입사 지원을 했다.
재혁에게 종종 부모의 재혼으로 만난 선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엄마가 없는 자신과 달리 선아는 아빠가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콧대가 높단 시답지 않은 말들이었다.
그때는 그저 그런 관심인 줄 알았는데, 그러고 나서 얼마 뒤, 선아와 재혁이 사귄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아빠에게 재혁을 드러내고 공개 연애하는 거였는데…….
재혁이 첫사랑이냐고 묻는 선아의 말에 둘러대긴 했지만, 사실 희진의 첫사랑은 재혁이었다.
시장 점포에 딸린 작은 방에서 살던 시절. 그 동네 아이들은 모두 전문계 고등학교에 간 뒤 취업했지만, 재혁만이 대학에 갔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가방을 집어 던지고 작업복을 입고 출퇴근하던 다른 이들에 비해 커다란 백팩을 메고 다니던 재혁이 그녀의 눈엔 백마 탄 왕자님으로 보였다.
형편이 어려웠던 재혁이 용돈벌이를 할 겸 과외를 해주었을 땐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좋은 남자를 만나려면 좋은 곳에 가야 한다는 아빠의 말에 악착같이 공부를 했지만, 그녀의 눈엔 재혁이 자신을 가난에서 구제해줄 남자로만 보였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오빠.’
스무 살이 되자마자 재혁에게 고백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그들이 데이트로 즐길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동네 어귀나 공원에서 만났다. 아빠의 눈을 피하고자 점점 더 어스름한 곳에서 데이트했고, 그러다 보니 스킨십 진도도 빠를 수밖에 없었다.
재혁은 그녀의 첫사랑일 뿐 아니라 모든 첫 경험의 대상이었다.
사실 선아가 재혁을 만나기 전만 해도 그 애에겐 별다른 마음이 없었다. 그저 자신과 다르게 살아온 부러운 아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재혁의 옆에 선 그녀를 본 후로는 맹렬한 질투심이 희진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질투와 함께 미움이 자랐다.
선아의 하나하나가 다 싫어졌다.
그녀와 같은 나이인 것도, 그녀와 키가 같은 것도, 심지어는 아빠의 재혼으로 인해 그녀와 부모가 같아진 것까지도 다 싫었다.
오히려 그렇게 같은 게 많아서 자신과 선아가 더 비교되는 것 같았다.
같은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어도 선아는 부자 엄마를 두어 저보다 조금 낫게 살았을 뿐이다.
겨우 그 차이일 뿐인데, 선아와 자신을 대하는 재혁의 태도는 천지 차이였다.
그뿐 아니었다. 재혁의 옆에 있던 게 언제나 감사했던 희진과 달리, 선아는 재혁이 자신의 옆에 있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여겼다.
자신을 맘껏 휘두르던 재혁은 선아에게만은 어쩌질 못하고 끙끙댔다.
그러다 둘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땐 모든 사실을 다 폭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희진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제발 좀 궁상 좀 떨지 말자! 너랑 나랑 결혼하면 그저 입에 풀칠하면서 사는 게 다야! 너랑 나랑 자식 낳아봤자 이재혁, 정희진밖에 안 된다고! 윤선아같이 드센 여자 한 트럭을 줘도 싫은데, 윤선아보다 가난이 더 지긋지긋하다고!’
재혁은 어떨 땐 화를 내고, 또 어떨 땐 어르면서 희진을 달랬다.
‘내가 사랑하는 거 너뿐인 거 알잖아. 3년만. 딱 3년만 살고 챙길 거 다 챙기고 이혼할게. 그때 가선 도망쳐서라도 너랑 살 테니까……. 제발 희진아. 나 더는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 않아…….’
희진은 잘나 보이는 윤선아보다도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그 감언이설에 넘어가고 말았다.
다른 때와 다르게 제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춰주는 것도 좋았다.
윤선아와 결혼 약속을 한 남자인데, 오히려 그 결혼 약속 이후부터 제게 더 다정해졌다.
선아가 잠자리해주지 않자 안달 난 그는 더욱더 자신을 원하기 시작했다.
탈 나지 않을 상대를 찾아 제게 오는 걸 알면서도 희진도 언제부터는 그 짜릿함을 즐겼다.
윤선아를 바보 만드는 게 즐거워서 선아는 죽었다 깨어나도 해주지 않을 것 같은 행위를 재혁에게 해주었다.
재혁을 제 남자라 말하는 선아가 눈꼴시지만, 재혁과 둘이 공유하는 비밀이 생기자 사랑은 어느 때보다도 돈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