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남녀의 일
호텔에 가겠다고 수긍하는 희진을 보면서 재혁은 미소를 지었다.
선아의 앞에 있을 때 다정스럽던 얼굴과 달리 한쪽 입술만 끌어 올린 삐뚤어진 미소였다.
역시 희진은 고분고분한 맛이 있었다.
오늘은 희진을 상대로 어떤 것을 요구할까 고민하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주방에서부터 기척이 느껴졌다.
재혁은 허리를 세워 희진을 향해 기울이고 있던 상체를 바로 세웠고, 주방에 있던 현숙과 성구가 나란히 거실로 모습을 드러냈다.
“희진이 왔구나. 그러잖아도 오늘 재혁이 온다고 해서 들깨 삼계탕 했거든. 학원 시간이랑 겹칠까 봐 연락 안 했는데, 잘됐다. 오늘 날 잡고 다 같이 몸보신하자.”
재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성구를 바라보았다.
재혁이 알던 성구는 저렇게 편안한 얼굴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피로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랬던 성구가 현숙을 만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사람의 형편이 사람 얼굴을 접고 편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다시 봐도 놀라울 정도로 그의 팔자가 변했다.
그가 입은 옷들조차도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고가였다.
재혁은 성구처럼 되고 싶었다. 한 번 사는 인생 제대로 폼 나게 살고 싶었다.
“그나저나 선아는 아직 안 일어났어?”
성구의 질문에 재혁이 나섰다.
“깨우려고 올라갔었는데, 피곤한가 봐요.”
“점심시간이 됐는데……. 아무래도 내가 올라가 봐야겠어.”
성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현숙이 만류했다.
“선아가 저혈압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는 거 원래 힘들어해. 괜히 짜증도 부리고. 내가 올라가서 깨울 테니 당신은 희진이랑 밀린 이야기 하고 있어요.”
재혁은 선아가 자신에게 짜증 부린 것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안심했다.
그는 결혼이 확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입 안에 든 사탕처럼 선아를 대하면서 신경을 많이 썼지만, 결혼식 날짜를 잡으면서부턴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해서 소원했었다.
오히려 결혼 날짜를 잡은 뒤엔 선아야말로 그에게 더 열성적이었다.
현숙이 계단을 올라 2층으로 모습을 감추었을 때였다. 성구가 재혁을 불렀다.
“재혁아.”
“네. 아버님.”
“선아가 다치고 회복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너무 무리하는 거 같아. 퇴원한 날도 밤새 회사 일을 하는 거 같더라.”
“며칠 회사 쉰 게 미안해서 그런가 봐요. 선아 복귀하는 날 팀 회의도 있었고요.”
“그렇게까지 무리해가면서 해야 할 일인 건가?”
“결혼하면 살림만 해달라고 하려고요.”
재혁은 결혼으로 인해 팔자 편 성구를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성구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바깥일 하는 와이프를 내조한다고 집에서 살림이나 하는 성구가 한심해 보였다.
재혁은 제 아빠의 말대로 결혼하자마자 선아를 집에 들여앉힐 계획이었다.
그래야 선아에게로 갈 몫까지 더해져 제 몫이 커질 테니까.
“선아가 아빠 없이 자라다 보니 남자에 관해서 모르는 게 많아. 어쩌면 환상도 갖고 있을 거고. 그러니까 네가 각별히 신경 좀 써줘.”
“네.”
이 염려 또한 성구에게서 몇 번이나 들은 말이었다.
현숙이 홀로 선아를 낳았고,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선아는 아빠 없이 자랐다.
당당한 엄마를 두었다고 하나 아빠로부터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은 선아에게 결핍일 것이었다. 재혁은 그 점을 이용해 선아를 꾀어냈다.
바깥일을 하는 엄마와 소통이 적었던 선아에게 다정함을 가장해 접근했고, 세세하게 챙김 받아본 적 없는 그녀에게 거짓으로 꾸며낸 사랑을 보여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다.
결혼하면 외롭지 않을 거라고, 우리는 완벽한 가정을 꾸려내자고 설득한 끝에 선아는 결혼을 승낙했고, 그에게 온 마음을 내주었다.
“그나저나 희진이 넌 또 왜 그렇게 뾰로통해 있는데?”
성구의 지적에 재혁은 시선을 돌려 희진을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뾰로통해 있었다고 그래.”
희진은 부정했지만, 재혁은 그녀의 속내를 눈치채고 미소 지었다.
재혁에게 성구가 한 조언이 못마땅한 것이다.
재혁은 자신과 선아를 두고 질투를 불태우는 희진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선아에게 더 잘할수록 자신을 향한 희진의 마음이 불에 휘발유를 부은 듯이 맹렬해졌다.
선아는 제 마음대로 휘두를 수가 없는데, 희진은 재혁의 멋대로 휘둘렸다.
이렇듯 한평생을 제멋대로 살아온 재혁에게 선아는 가져야 하지만 부담스러운 사람이었고, 희진은 숨구멍이었다.
***
아침 식사 자리, 선아는 결국 현숙의 손에 이끌려 다이닝룸으로 내려왔다.
세수를 마친 그녀는 잠 깬 개운한 얼굴로 식탁 위에 올라온 삼계탕을 바라보았다.
“와, 아빠, 이게 다 뭐예요?”
“오늘 재혁이 온단 말 듣고 준비한 거야. 새신랑 새신부가 될 건데 좋은 거 먹고 체력단련 해놔야지. 선아 너 들깨 삼계탕 좋아하잖아.”
“그럼요. 없어서 못 먹죠.”
성구는 푹 삶은 닭 위에 들깨 국물을 가득 퍼 선아의 앞에 놔주었다.
“네가 다이어트 그만뒀다니까 마음이 놓여. 회사 일에 결혼 준비에 애 많이 쓰는데, 많이 먹어둬.”
“잘 먹을게요. 아빠.”
“그래. 많이 들고, 자 다들 많이 들자.”
세수만 하고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의 선아는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과 이질적으로 보였다.
모두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반듯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지만, 선아는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이들에게 오늘의 약속은 얼마 전에 한 약속이었겠지만, 선아에게는 8년 전의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스케줄표에라도 표시해두었다면 모를까. 그 시절 선아는 재혁의 말이라면 무엇 하나 잊지 않고 재혁과의 약속만을 기다릴 정도로 그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기억에도 없는 약속이었기에 미리 준비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반면에 재혁은 그런 선아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선아를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도리어 그가 잡힌 물고기인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늘 우리 식구들 다 모이니까 참 든든해. 예전에는 선아랑 둘이 썰렁하게 식사했었는데.”
오랜만에 시끌벅적한 자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현숙은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구는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당신 기뻐하는 모습 보니까 음식 차려서 낸 보람 있어. 많이 먹어, 현숙 씨.”
현숙과 성구는 언제나 깨가 넘쳤다. 선아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다가 아빠의 옆에 앉아 있는 희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근데 희진이 넌 재혁 씨랑 안 친해? 전에 과외했었다면서. 근데 둘이 대화하거나 인사 나누는 거 한 번도 못 본 거 같아.”
선아의 말에 식사하던 재혁과 희진이 고개를 들고 서로를 어색하게 마주 보았다.
“과외를 1년이나 했으면 친할 만도 한데 둘은 되게 데면데면하네?”
“그냥 한동네 살고, 재혁이가 좋은 학교 다니니까 내가 부탁한 거지.”
그녀의 말에 대답한 건 새아빠였다.
“희진이가 성격이 내성적인 구석이 있잖아. 그래서 그런가, 아직도 저렇게 재혁이를 어색해해.”
이전 삶에서 선아는 새아빠의 말대로 둘이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뒤에선 별 짓거릴 다 하는 연놈들이었지만, 선아 앞에만 서면 이렇게 입을 꾹 다무니 꼼짝없이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아빠. 남녀 일은 모르는 거예요. 혹시 알아요? 재혁 씨가 희진이 첫사랑이었다든가.”
그 순간 삶은 닭에서 살을 발라내던 희진이 젓가락을 떨어트렸다.
대리석 바닥에 놋젓가락이 떨어지면서 챙,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성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새 젓가락을 가져와 희진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첫사랑은 무슨. 더군다나 너랑 재혁이가 곧 결혼할 건데 설사 그렇더라도 희진이가 마음을 접어야지. 안 그러냐, 희진아?”
“아, 응……. 당연히 그래야지.”
“근데 그보다 더 걱정인 건 희진이가 좀 순진한 면이 있어서 연애를 한 번도 못 해봤단 거야.”
성구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요?”
선아는 모든 사실을 다 알면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희진아 너 진짜 연애 한 번 안 해봤어?”
이번에도 역시 희진이 대신 대답한 것은 성구였다.
“선아도 재혁이가 첫 연애잖아. 사실 희진이는 아르바이트하면서 학교 다닌다고 편할 날이 별로 없었어. 취업을 여태 못 한 것도 괜히 아르바이트했다가 그때부터 학자금대출 상환 통지서가 날아왔지 뭐냐. 120만 원 버는데 그중 50만 원 뜯어가면 뭐가 남아. 그거라도 갚는다고 아르바이트에 목매다가 취업 준비도 못 하고…….”
성구는 목이 메는 듯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옆에 있던 현숙이 성구의 손을 잡았다.
“희진아, 네 아빠 봐서라도 취업 준비 열심히 하고 보란 듯이 좋은 데 취업해야 해. 알았지?”
희진의 학자금을 다 갚아준 게 현숙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성구의 바람대로 희진의 취업 준비를 돕고 있었다.
남들이 본다면 감격스러운 가족드라마 같은 이 모습을 선아는 감흥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새 아빠가 딸을 띄엄띄엄 알아도 너무 띄엄띄엄 알고 있었다.
저 천치 같은 게 스물다섯에만 그런 게 아니라 나이 서른이 넘도록 유부남한테 목을 매면서 살았다.
하기야 어디 희진 잘못이기만 한가.
희진과 자신의 사이를 알면서도 두 여자 사이에서 즐긴 이재혁도 만만찮은 미친놈이었다.
이런 식이 촌극이 싫었던 선아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그럼 제가 희진이 소개팅이라도 해줘 볼까요?”
“컥.”
의외로 반응이 돌아온 건 선아의 옆자리에서였다. 재혁이 고기가 목에 걸린 듯이 캑캑거렸다.
물론 재혁더러 들으라고 한 말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이 나올 줄 몰랐던 선아는 물잔을 재혁의 앞에 놓았다.
“재혁 씨는 갑자기 왜 그래? 설마 희진이가 아니라 재혁 씨가 희진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첫사랑이라든가?”
물론 이들의 사랑은 첫사랑일 뿐 아니라 세기의 사랑이었다.
제 처를 죽이고 자식마저 나 몰라라 하며 한 대단한 사랑이었으니 말이다.
재혁은 물잔을 쥐며 기분 나쁘다는 듯 받아쳤다.
“너는 무슨 그런 소릴 해.”
선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재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희진이 소개팅해준다는 말에 놀라니까 농담해본 거야.”
“놀라긴 누가 놀랐다고 그래.”
“그래? 그럼 내가 진짜 희진이 소개팅 시켜줘도 되는 거야?”
“희진이 소개팅이 나랑 무슨 상관이야. 네 맘대로 해.”
재혁의 말에 희진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선아는 느긋하게 물을 마시면서 희진의 반응을 감상했다.
솔직히 말해 선아가 제일 이해되지 않은 건 희진이었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3년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결혼해서 살아보니 그 말이 무언지 알 것 같았다.
뜨겁던 사랑이 식으면서 남편에 대한 다른 감정으로 치환됐다. 아이의 아빠, 가족애라는 감정으로 말이다.
언젠가 식어 빠질 사랑 따위가 뭐가 좋다고 자신을 망치면서까지 목을 맬까.
선아는 진심으로 딱하다는 듯이 희진을 바라보았다.
“왜……. 왜 그렇게 봐……?”
희진은 당혹스럽다는 얼굴로 선아에게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