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20화 (20/85)

20화. 예민한 반응 @AW

재혁은 당황한 얼굴로 선아의 어깨를 잡고 흔들고 있었다.

“대체 무슨 꿈을 꾸길래 이렇게 식은땀을 뻘뻘 흘려? 세빈이는 또 누구고?”

재혁의 입에서 나온 세빈이의 이름에 선아는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엄마이기에 다른 삶을 살면서도 한시도 자식을 잊은 적이 없다.

세빈이는 그녀의 목숨보다 귀한 아이였다.

지금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제 생명을 다 주어서라도 세빈이를 살려내고 싶었다.

그렇게나 귀했던 세빈이.

세빈이는 선아의 자식이기도 했지만, 재혁의 자식이기도 했다.

그가 만약 다른 아버지처럼 세빈이를 사랑했더라면, 어쩌면 지금 제게 일어난 기적이 그에게도 찾아왔을지 모른다.

그러나 재혁에게는 그런 기적이 찾아오지 않았고, 그는 자식인 세빈이를 모른다.

“뭐야, 너 울어? 무슨 꿈을 꿨길래 눈물까지 흘려?”

재혁이 선아의 눈가를 손바닥으로 닦았다.

그 순간 지난 삶에서 그의 말이 떠올랐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는 게 사지도 제대로 못 쓰는 놈이라니…….’

술 취해 세빈이에 대해 말하던 재혁의 모습이 떠오른 선아는 그의 손을 쳐냈다.

“왜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

세빈이의 말을 들으려던 순간이었다. 세빈이의 길을 대신 걷던 시간이었다.

재혁만 아니었더라면 그 꿈을 더 오래 꾸었을 것이다.

“내가 널 해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뭘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자다 놀라서 깼는데 예민하지 않게 생겼어?”

“식은땀 흘릴 정도면 좋은 꿈 꾼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날이 섰는데?”

좋은 꿈이 아니라니.

세빈이의 꿈만 내내 꿀 수 있다면 천금을 내어줄 수도 있다.

제가 가진 모든 걸 걸고서라도 다시 꾸고 싶은 꿈이었다.

하기야. 자식을 잃고도 또 낳으면 된다고 말했던 게 그였다.

그런 남자에게 죽은 아들의 꿈이 좋은 꿈일 리가 없었다.

금수도 제 자식을 사랑한다는데……. 짐승만도 못한 놈.

선아는 재혁에 대한 분노가 감추어지지 않았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재혁은 분명 각박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맞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고, 아버지는 무능력했으며 어머니는 홀로 가정을 책임지느라 재혁을 돌보지 못했다.

그랬던 그에게 생존은 본능이었을 것이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을 구분해 취하는 것이 버릇되었을 것이다.

결혼 생활을 하다 보니 재혁의 사고가 자신과 다른 것이 드러날 때가 종종 있었다. 한때 선아는 그런 재혁을 안타깝게 생각하기도 했다.

어쩌면 자신의 성공 가도에 몸이 불편한 아들은 불편한 존재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재혁은 끝끝내 불우한 사람이 아니었다.

결혼 후 HS 엔터테인먼트의 후계자가 되었고, 종국에 가서는 사장직에 올랐다.

주식을 가진 경영권자는 아니었지만, 부인이 대주주였기에 자신 마음대로 하지 못한 것이 없었고, 남부러울 게 없는 삶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불우한 과거를 털어버리고 사람으로서 도리를 하고 살았어야 했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건 변모하고 나아가기 때문이니까. 그러니까 그는 과거를 털어버리고 사람답게 살았어야 했다.

마땅히 자식을 사랑해야 했고, 아내에게 충실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재혁 씨. 미안하지만 내 앞에서 좀 꺼져줄래?”

꺼져달라는 선아의 말에 재혁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꺼지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후…….”

선아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말 그대로 꺼지란 뜻이었지만, 지금은 그러면 안 될 때였다.

안다. 알기에 화를 꾹꾹 눌렀다.

“내가 살을 뺀 뒤로 저혈압이 심해.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기분이 별로야. 그러니까 제발 좀 내 눈앞에서 좀 사라져줘. 말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깨질 것 같단 말이야.”

자신이 나서서 파혼하지 않는 이상 재혁은 이 결혼을 깨트리지 못한다.

자신이 아니라면 그가 원하는 부와 명예를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다.

선아가 원하는 건 첫날 밤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지, 관계를 더 발전시키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어서 다시 잠들고 싶었다.

“너 대체 왜 이래? 네가 오라고 불러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인데?”

“내가 재혁 씨를 불렀다고?”

“2주 전에 집으로 오라며. 가족들이랑 식사하자고.”

“아…….”

약속을 잡은 게 재혁에게는 2주 전이지만, 선아에게는 8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그러니 그 기억이 온전히 존재할 리 없었다.

“내가 뇌진탕이었잖아. 요즘은 어제 일도 기억이 가물가물해. 그러니까 제발 좀 나가. 나 머리가 너무 아파. 30분이라도 더 누워 있어야 할 거 같아.”

지금이라도 다시 잠들면 세빈이의 꿈을 꿀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빈이에게 저를 다시 살게 한 이유를 들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선아야, 너 대체…….”

“좀 나가라고!”

선아는 침대맡의 인형을 힘껏 집어 던졌다.

재혁은 난생처음 보는 선아의 모습에 놀라며 돌아섰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고 방문 앞에 서서 씨근덕거리며 숨을 골랐다.

한참 만에 분이 좀 가라앉은 재혁은 다시 한번 뒤돌아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선아가 미묘하게 변했다.

사실 언제부턴가 그녀가 변했다는 걸 재혁은 눈치채고 있었다.

선아가 변한 것은 무리한 다이어트로 인해 쓰러진 날 다음부터였다.

“챙겨주지 않은 게 서운해도 그렇지…….”

선아가 쓰러진 걸 알았지만 재혁은 곧장 병원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사내에선 연애 사실을 내색하지 말란 현숙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다 알면서도 저렇게…….”

문제는 선아의 태도였다. 그 뒤로 묘하게 자신을 배척하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류도진 왜 저래? 저 새끼 우리가 자기 씹는 거 알고 있나?]

[선아야. 인트라넷 쪽지는 사측에선 못 들여다본다고 했잖아. 그 말 맞지?]

[아 왜 답답하게 답이 없어.]

[윤선아 사원 / 미래전략팀 : 나는 팀장님 씹은 적 없거든. 재혁 씨만 씹었지.]

쓰러진 일이 있기 전에도 재혁은 종종 도진의 흉을 봤다. 솔직히 도진만 보면 배알이 뒤틀렸기 때문이다.

그는 재혁이 선망하지만 갖지 못한 모든 걸 갖고 있었다. 집안과 재력, 능력과 키, 그런 것들을 다 가지고도 당연하다는 듯 무심한 태도까지.

무엇이든 악착같이 조르고 졸라야지만 가질 수 있었던 재혁과 달리, 도진은 날 때부터 무엇이든 가진 이였다.

더군다나 겨우 그보다 한 살 많은 그는 회사의 팀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실험적인 일을 하는 팀이고 TF팀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그가 보기엔 아니었다.

임시조직에 불과한 TF팀을 위해 강남 노른자 땅 위에 건물 한 층을 비우고, 서버 설비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도진이 투자금을 끌어왔다고 하지만 이건 어지간한 배려가 아니고서야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사장의 사위가 될 자신도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아닌 그가 떵떵거리며 콧대를 세우고 있는 게 눈꼴시었다.

그랬기에 선아 앞에서도 도진을 스스럼없이 흉보았지만, 당연히 저를 두둔할 줄 알았던 선아가 제 편을 들지 않았다.

선아가 변한 건 분명 다이어트로 쓰러졌을 때부터였다.

심지어는 회의 테이블에서 팀원들 보란 듯이 도진의 편을 들면서까지…….

“저게 제 편이 누군지도 모르고…….”

재혁은 아래턱이 불거질 정도를 이를 꽉 물고 2층 계단에 가서 섰다.

계단 아래 거실에서 현숙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희진아, 요즘 한다는 공부는 잘돼 가고 있고?”

희진이라고?

“요즘 취업난이 심각해서……. 공부는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희진의 방문에 재혁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정말로 희진이 와 있었다.

그녀는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현숙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혹시 학원 수강이 더 필요하면 아줌마한테 말해.”

“네. 아줌마.”

희진은 현숙을 새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한집에 살면서 빠르게 가까워진 선아와 성구 같지 않고 희진은 현숙을 데면데면 대했다.

“용돈 부족하면 아빠한테 비밀로 하고 말하고. 네 아빠가 짠돌이인 거 아줌마도 잘 알고 있으니까.”

“이미 많이 주시고 계시잖아요.”

현숙을 향해 미소 짓던 희진이 기척을 느끼고 고갤 들다가 재혁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녀의 눈빛에 불안한 기색이 들어찼다.

그 기색을 읽은 재혁의 얼굴엔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희진은 재혁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였다. 재혁이 어떤 변덕을 부려도 희진은 한결같이 그에게 충실했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재혁은 희진과의 호텔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갑작스럽게 회사로 출근하게 된 게 짜증이 나서 이유조차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불안감을 느낀 희진은 그를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다.

선아의 방에서 내려오는 자신을 바라보는 희진의 눈빛은 마치 주인 잃은 강아지의 눈빛과 같았다.

재혁은 이렇게 순종적인 여자가 좋았다.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재혁아, 선아는 안 일어난대?”

그에 비해 선아는 여러모로 까탈스러웠다. 지금 자나 결혼하고 자나 똑같은데도 잠자리를 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방금처럼 예고 없이 성질을 부릴 때도 그랬다.

“네. 어머님. 어제 결혼사진 촬영이 피곤했었나 봐요.”

“그래도 그렇지. 너까지 불러놓고 아직까지 자는 게 어딨어. 그나저나 희진이 왔으니까 인사해. 희진이만 빼놓고 식사하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날이 날인 모양이야. 희진이가 온 걸 보면 말이야.”

재혁은 현숙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희진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아 참 어머님, 선아가 저혈압이 있나 봐요.”

“나도 저혈압 때문에 선아 낳을 때 힘들었어. 만삭 땐 어찌나 심하던지 세 발짝 걷기도 힘들었다니까. 그나저나 나는 주방에 가서 희진이 온 거 알리고 올 테니까 재혁이가 희진이랑 이야기 좀 나누고 있어.”

희진이 현숙을 붙잡았다.

“아뇨. 제가 가서 아빠한테 이야기할게요.”

“겸사겸사 네 아빠 일손 좀 도우려고 그래. 사람을 쓰라고 해도 쓰질 않고 혼자 집안일을 다 하니 안쓰러워서 말이야.”

바깥일을 하는 현숙을 대신해 성구가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다.

홀아비로 25년을 산 이답게 살림 솜씨가 어찌나 훌륭한지, 성구가 만드는 들깨 삼계탕 냄새의 고소한 냄새가 집 안에 넘실거렸다.

그 냄새에 현숙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미혼모로 살았던 그녀에게 온 늦사랑이 성구였고, 현숙은 결혼 생활에 크게 만족했다.

“어머님 주방에 다녀오세요. 제가 희진이 말 상대 해주고 있을게요.”

“그래. 고마워.”

현숙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해갔다. 코너를 돌아 주방으로 간 그녀의 뒷모습을 본 재혁은 몸을 앞으로 쏠리게끔 앉아 목소리를 낮추었다.

“오늘 저녁때 뭐 해?”

“저녁때?”

“응.”

“할 일 딱히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성욕이 절절 끓었다. 아마도 웨딩 촬영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혼전순결을 철석같이 지키는 선아와 달리 희진은 그에게 모든 걸 내주었을 뿐 아니라 재혁의 사랑을 더 받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웨딩 촬영 날 호텔에서 보자고 제안한 것도 희진이었다.

자신의 마음이 선아에게 갈까 봐 애달파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니 오늘도 이렇게 달려왔을 것이고, 몇 날 며칠 성욕을 풀지 못해 끙끙대는 자신의 욕구 또한 풀어줄 것이다.

“이따 호텔 갈 수 있지?”

“호텔?”

“어제 못 했잖아. 나 요즘 좀 쌓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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