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19화 (19/85)

19화. 빨갛게

집으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운 선아는 천장을 수놓은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어둠 속에서 불안한 듯 흔들렸다.

미래가 바뀌고 있다.

미래가 바뀌어버리면 과거의 삶에서 알게 된 정보는 모두 쓸모없어져 버린다.

물론 재혁과 희진의 외도 증거를 잡는 건 어렵지 않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불법적인 방법을 쓸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러다 발각이 된다면…….

기적처럼 얻은 삶에 타인이 개입하면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또한 알 수 없다.

무엇보다도 남편과 자매처럼 믿던 이에게 크게 배신을 당하고 죽은 기억 때문인지 타인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절대로 남의 손에 이 일을 맡길 수가 없다.

더군다나 이 모든 일은 세빈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 하는 일이었다.

다시 만난 세빈이를 그들 곁에서 키우지 않기 위해, 그리고 저를 기만한 그들에게 사회적 망신을 안겨주어 복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세빈아……. 이렇게 하면 정말 다시 널 만날 수 있을까?”

아직도 침대에 누우면 아이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엄마 없이는 잠도 들지 못하던 일곱 살 세빈이.

그런 세빈이가 지금쯤 저승 문턱 어디에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빠르게 걸을 수도 없었던 내 아이가 먼 길을 홀로 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선아는 양손을 왼쪽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심장이 저며왔다.

눈을 감고 이곳에 오게 된 후 매일 밤 읊은 기도문을 되뇌었다.

신이여. 제게 한 번의 기적을 행했듯이 또 한 번의 기적을 행하소서.

제발 세빈이와의 시간을 허락하소서.

다시 눈을 뜬 선아는 천장을 응시한 채,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하기 위해 애썼다.

이번 생에서 재혁을 만나자마자 난동을 피웠다.

다행인 것은 일시적인 기억착오나 충격에 의한 사고 변화로 보인다면서 선아의 행동에 근거가 부여되었다.

혹시나 재혁이 자신의 변화에 대해 의심할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오늘 웨딩 촬영 후에 잠자리 언급을 하는 걸로 보아 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여기까지는 같지만, 딱 하나 달라졌다.

이날 재혁은 희진과 호텔에 가지 않았다.

일하러 회사에 간 건 정말 의외였다.

그렇게 된 데에 대한 원인을 떠올려보니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번 생에서 자신이 지나치게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

퇴원하자마자 밤새 회의를 위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었다.

사실 과거에는 이만큼 회사 일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일보다는 사랑이 우선이었고, 어차피 재혁이 그녀의 가족이 될 것이었기에 재혁이 자신보다 더 중요한 업무를 맡기를 바랐었다.

그가 일을 잘하고 있다는 말이 엄마에게 흘러 들어가길 바라서였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한참이나 잘못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일을 열심히 하자, 성과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는 도진은 선아에게 중요 업무를 맡겼다.

자연스럽게 선아의 업무가 같은 팀 동기인 재혁에게 돌아갔다.

“그러면 다시 일을 설렁설렁해야 해……?”

그렇다고 일을 대충하려니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싫었다.

지난 삶에서 그렇게 살다가 모든 걸 다 재혁의 손에 넘겨주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믿고 일을 맡긴 도진이나, 신뢰 어린 눈으로 보던 신유미 대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결국엔 자신이 변했기에 주변 상황이 조금씩 흐트러지면서 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사실…….

“아! 도진 선배!”

도진이 있었다.

지난 삶에서 선아를 업무를 배제했던 그가 이번엔 선아를 업무의 중심에 놓았다.

다시 돌아온 이번 삶에서 가장 달라진 행동을 하는 이는 도진이었다.

선아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도진과는 악연이 아니었기에 그의 행동에 대해선 크게 의의를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번 생에서 재혁을 다르게 움직이는 이는 도진이었다.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망할 팀장 새끼.]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다음 주부터 설문 다녀야 한다고 설문지 작성해서 토요일까지 보내라잖아. 그 말이 금요일 오후에 할 말이야?]

도진은 과거에 선아가 했던 일을 재혁에게 넘겼다.

표본집단 2,000여 명을 뽑아 설문을 진행하면서 빅터의 신뢰도를 재조사하는 중요한 일이었지만, 사실상 그 일을 맡은 이의 역량이 크게 좌우하는 일은 아니었다.

설문 내용의 초안은 재혁이 만들겠지만, 그 초안을 검토하고 보충하는 것은 팀원들과 회의를 통해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생에 선아가 맡은 일은 과거의 도진이 홀로 진행하던 서버실 업무였다.

사실 서버실에 대한 일은 머리를 쓰는 일이라기보다는 20층에서 퇴거할 회사들의 일정을 확인하고, 서버실 설비를 맡은 회사 간 일정을 조율하는 일이었다.

회사 간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일이 까다롭다 보니 업무 난이도는 더 높을 듯 보였다.

그러나 까다롭다고 해서 대충할 수 있는 업무도 아니었다.

빅터의 서버실은 앞으로 8년 후, 지금보다 수백 수천 배의 데이터가 쏟아져 나오는 그때까지도 프로그램 가동에 핵심 역할을 할 곳이다.

매초 생성되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며 빅터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곳이기에 서버실 업무의 중대함을 도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업무를 결혼을 앞둔 자신에게 맡긴다는 건 도진으로서도 도박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과거처럼 결혼을 더 중요시하고 일을 대충하진 않을 것이다.

미래를 모른다면 다르겠지만, 이제는 누구보다도 선아가 도진의 마케팅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현재에서 가장 행동이 달라진 건 도진이 확실했다.

도진이 재혁을 회사로 불러들여서 희진과의 밀회가 불발되었으니, 재혁의 행동에까지 직접적인 변화를 부여했다.

“대체 도진 선배가 왜 이러는 걸까. 도진 선배가 왜…….”

문득 이 세상에서 깨어나고 난 후의 일들이 떠올랐다.

‘선배 올해 몇 살이야?’

‘뜬금없이 무슨 질문이 그래. 스물아홉이잖아. 엊그제 네가 아홉수라고 놀린 거 기억 안 나?’

선아는 도진에게 이해 못 할 행동을 많이 내보였다.

병실에서 깨어나자마자 뛰쳐나온 것부터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악! 아악! 아아아악!’

‘선아야, 진정해, 선아야. 이러지 마.’

‘선배……. 나 너무 혼란스러워, 나 너무…….’

지금의 선아와는 일절 관계가 없는 유치원에 가서까지 도진이 알 리 없는 세빈의 이름을 부르며 난동을 피웠다.

‘세빈아!’

‘누구신데 유치원 놀이터에 함부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는 아인 줄 알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손바닥을 뒤집기라도 한 듯 회사 업무에 열성을 보였다.

‘윤선아 사원과 제가 지난주 내내 자료를 모아 본 결과 원픽의 유투북 마케팅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입니다. 아니, 승산 정도가 아니라 블루오션을 선점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 장담합니다.’

자신이 변해서 도진이 변한 것이다.

나비의 미세한 날갯짓이 태풍이 된다는 가설처럼 자신의 변화가 주변 사람들 모두의 변화를 만든 것이다.

분명 과거보다 나은 변화긴 했다.

다시 나가게 된 회사도 좋았고, 의욕적으로 일하는 것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모두 즐겁고 행복했다.

그렇지만 이 변화가 세빈이를 만나는 데 도움이 되는 변화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불안해진 선아는 손끝을 입에 가져다 댔다.

불안할 때마다 뜯기 시작한 손끝은 빨갛게 해져 있었지만, 가시지 않는 불안감 때문에 더욱 강박적으로 손끝을 깨물었다.

***

온종일 세빈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였을까.

선아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노란 달맞이꽃이 핀 들판을 걸었다. 등에는 세빈이가 업혀 있었다.

세빈이가 일곱 살이 되면서는 몸무게가 많이 늘어서 업어주는 일이 드물었다.

팔다리가 길어진 세빈이도 굳이 엄마의 등에 업히려 들지 않았다.

꿈이라 그런 걸까.

선아는 세빈이가 무거운지도 모르고 노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벌판을 걷고 또 걷고 하염없이 걸었다.

하늘에 뜬 달이 길을 비추었다.

쏟아질 듯이 무수한 별이 하늘에 떠 있었고 등 뒤에 업힌 아이의 체온은 따뜻했다.

너무도 그리웠던 아이의 노랫소리가 발걸음을 따라 이어졌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혹시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도 아름답지만

사랑하는 우리 엄마 더욱 아름다워라.

바람 한 점 없는 밤이었지만 세빈이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선아는 가늘고 보드라운 세빈이의 머리카락이 목에 닿을 때마다 간지러워 목을 움츠렸다.

그저 아들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행복하다.

아이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그저 걷기만 하는 건데도 눈물이 나올 만큼 행복하다.

사실 그녀는 아이를 등에서 내려놓고 그리웠던 얼굴도 보고 싶었고, 먼 길 걷느라 발에 물집이 잡히진 않았는지, 엄마 없이 무섭진 않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게 꿈이라는 걸 선아도 자각하고 있었다.

세빈이 없이 홀로 잠들었던 밤, 그 수 밤 동안 아이가 너무 그리워서 이렇게나마 아이의 온기를 꿈꾸고 있다는 걸 선아도 알고 있었다.

꿈인 걸 아는데도 걸음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은…….

이렇게라도 아이의 저승길을 대신 걸어주고 싶은 게 엄마의 마음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달맞이꽃밭 사이로 이어졌다.

그 앞으로는 능선에 능선에 능선.

어디에서 끝날지 모르는 길이 굽이굽이 흘러가고 있었다.

선아는 발끝에 힘을 주었다.

조금이라도 더 걸어야 해.

잠에서 깨기 전에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야 해.

세빈이 홀로 걷지 않도록 내가 더 힘을 내야 해.

현실에서도 세빈이를 만나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그녀는 꿈에서도 세빈이를 업은 채 힘을 짜냈다.

그대만을 기다리리. 내 사랑 그대만 기다리리.

그대만을 기다리리. 내 사랑 그대만 기다리리.

세빈이의 노랫소리가 그 길처럼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노랫소리가 끊겼을 때, 세빈이는 등 뒤에서 선아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엄마, 있잖아…….’

선아는 세빈이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세빈이가 죽어가던 그때, 아이가 남기는 마지막 말조차 다 듣지 못했기에 이곳에서라도 아이의 말을 듣고 싶었다.

이게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라 해도, 아이의 말을 들으면 힘이 날 것 같았다.

무슨 일이든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왜 자신을 다시 살게 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 순간,

“선아야. 선아야.”

누군가 선아의 몸을 흔들었다.

커다란 손이 선아의 몸을 잡고 앞뒤로 그녀를 흔들었다. 그 손에 의해 선아는 정신없이 흔들렸다.

굽이굽이 이어지던 길이 신기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눈앞에서 달맞이꽃밭이 사라졌다.

암전되었던 시야로 강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

눈을 뜬 선아의 시야에 들어온 건 재혁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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