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18화 (18/85)

18화. 시선

27층 엘리베이터 앞에 선 이는 신유미 대리였다.

“선아 씨?”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선아는 신유미 대리를 향해 고갤 꾸벅 숙였다.

“오늘 웨딩 촬영 있다고 휴가 냈잖아. 근데 왜 회사에 왔어? 피곤했을 텐데 쉬지. 아, 그러고 보니 재혁 씨도 다시 회사로 복귀했던데.”

기혼인 신유미 대리는 웨딩 촬영이 얼마나 진 빠지는 일인 줄 아는 듯했다.

재혁을 따라온 것이었지만, 선아는 다른 이유를 들었다.

“어제 회의에서 업무 배분받았잖아요. 오늘 낮에 일 휴가 내서 업무 계획표 아직 작성 못 했거든요.”

신유미 대리는 기특하다는 얼굴로 선아를 바라보았다.

“업무 계획표야 집에서 작성해도 될 것을.”

“집에 가면 침대랑 한 몸 될 것 같아서요.”

신유미 대리는 이해된다는 듯 작게 웃었다.

“있잖아, 선아 씨.”

“네.”

“나 솔직히 어제 회의해서 선아 씨가 준비해준 거 보고 감탄했거든. 아직 팀장님 입지가 좀 불안하잖아. 나는 유투북 마케팅이 괜찮은 것 같은데, 사내 분위기가 그러니 내색도 못 하다가 선아 씨가 프레젠테이션 자료까지 준비한 거 보고 용기 냈어.”

“에이, 뭘요. 다 대리님이랑 같이 준비한 것들 정리만 한 건데요.”

“절반은 선아 씨 공이야. 자료 준비해줘서 고마워.”

“해야 할 일 한 건데요, 뭘.”

“결혼 준비하느라 바쁜 거 아는데 그 와중에도 열의 있게 일하는 거 보고 내심 다른 사람들도 자극받았을 거야.”

“…….”

어쩌면 이건 사장 딸에 대한 아부 섞인 칭찬일 수도 있고, 의례적인 칭찬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선아는 그 작은 노력에 대한 칭찬이 너무 기뻤다.

지난 삶에서 이번 삶으로 이어지는 8년에 가까운 시간. 전업주부로 살았던 선아의 모든 일은 당연한 걸로 치부되었다.

집이 깨끗한 것도, 늘 영양가 있는 음식이 식탁에 오르는 것도 그녀의 노력이었지만 수고로움에 대한 치하는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

누군가 노력을 알아봐 준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뛴다는 걸 잊고 살았다.

“선아 씨, 우리 앞으로 더 잘해보자.”

“네. 앞으로 더 노력할게요. 대리님이 일 많이 가르쳐주세요.”

“이미 잘하고 있어. 나야말로 잘 부탁해. 그럼 가볼게. 선아 씨. 다음 주에 만나.”

“네. 대리님 들어가세요.”

선아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신유미 대리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신유미 대리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신유미 대리와 이렇게 서로를 격려했던 적이 있었던가.

예전엔 선아가 사장 딸이라는 게 밝혀진 이후로 신유미 대리는 그녀를 어려워했고, 어리석게 선아도 결혼 준비에 흠뻑 빠진 나머지 그 점을 간과했다.

과거의 자신에게 뺨이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보 같은 것. 스물다섯 살씩이나 먹은 게 첫사랑에 흠뻑 빠져서 앞뒤 분간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나 어리석었으니 재혁과 희진이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보았을까.

선아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짝 소리 나도록 한 대 때리곤 사무실을 향해 몸을 틀었다.

되돌아온 삶. 이 작은 변화에 감사하면서 더 잘 해내야 한다.

비단 자신과 세빈이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혹시라도 자신의 바보 같은 태도로 피해를 보았을 누군가가 있다면 이번 삶에서만큼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살고 싶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그것을 지키고 싶다.

‘이미 잘하고 있어.’

신유미 대리의 말에 마법처럼 힘이 솟았다.

‘일단은 이재혁이 회사에 와서 뭘 하는지, 왜 과거와 다른 짓을 하는지 알아내는 게 우선이야.’

사무실로 향하는 선아의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사무실에 들어선 선아는 창가 자리에 앉은 도진과 눈이 마주쳤다.

팀원들의 책상과 달리 도진의 책상은 창가에서 입구가 바라보이도록 놓여 있었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남자인 터라 짙은 눈썹을 움찔거리는 게 다였지만, 그의 눈이 왜 왔냐고 묻고 있었다.

선아는 고개 한 번 끄덕이는 걸로 도진에게 인사한 후 자리로 가서 앉았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타이핑을 하던 재혁이 기척을 느끼고 파티션 너머로 선아를 바라보았다.

“어?”

팀원들이 퇴근한 사무실에 재혁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왜…….”

재혁은 급히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내렸다. 현숙의 말이 생각난 까닭이었다.

현숙은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면서 두 사람에게 신신당부했었다.

결혼 전까지 회사에 사내 연애를 절대 티 내지 말 것. 결혼하고 난 후에도 가정 문제를 절대로 회사로 가져오지 말 것.

현숙은 회사가 가족경영을 하는 듯 비치는 것을 걱정했다.

가족들이 회사의 요직을 차지할 때 부조리가 생기고, 직원들의 사기가 저하될지도 모른다.

선아가 쓰러진 일을 계기로 회사 사람들이 현숙과 선아의 관계뿐 아니라 재혁과의 관계까지 모두 알게 되었지만, 현숙의 당부를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재혁이 입을 꾹 다문 사이, 선아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일단은 재혁이 무얼 하는지 탐색을 할 생각이었다.

컴퓨터를 켜자마자 바탕화면에 깔아둔 스케줄표에 그녀의 업무 보고 일정이 떴다.

어젯밤 내내 정리해서 연동된 스케줄표에 올려둔 것이었다.

과거보다 월등히 많은 일을 맡게 된 선아의 캘린더는 스케줄로 꽉 차 있었다.

선아는 사내 인트라넷 로그인 페이지를 열고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해 넣었다.

인트라넷에 로그인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인트라넷 쪽지가 날아왔다. 재혁에게서 온 쪽지였다.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쉰다더니 회사엔 왜 왔어?]

오히려 선아가 묻고픈 말이었다.

희진과 만나서 저 살던 대로 살 것이지, 회사엔 왜 온 것인지 그녀야말로 무척이나 궁금했다.

[잠깐 주변에 볼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안 해놓은 일이 생각나서 들렀어. 재혁 씨는?]

메시지를 전송하자마자 파티션 반대쪽에서 현란한 타이핑 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자판을 누르는 손에 분노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사무실을 울릴 정도의 커다란 엔터 소리와 동시에 다음 쪽지가 날아왔다.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망할 팀장 새끼.]

무슨 말이냐는 질문을 할 틈도 없이 다음 메시지가 연달아 모니터에 떴다.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다음 주부터 설문 다녀야 한다고 설문지 작성해서 토요일까지 보내라잖아. 그 말이 금요일 오후에 할 말이야?]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심지어 웨딩 촬영한다고 휴가 낸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린가? 선아 네가 봐도 그렇지?]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선아야, 너 저 새끼랑 알던 사이라고 했지? 저 새끼 원래 저렇게 경우가 없어?]

세 개의 쪽지를 연달아 보낸 재혁은 반대편 책상에서 거친 숨을 뱉었다.

그 순간이었다.

탁. 도진의 자리 쪽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아와 재혁은 동시에 소리 난 쪽을 바라보았다.

떨어진 물건이 무언지는 몰라도 물건을 집을 거라 생각했던 도진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움찔거리며 고갤 돌린 재혁은 또다시 타이핑을 시작했다.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류도진 왜 저래? 저 새끼 우리가 자기 씹는 거 알고 있나?]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선아야. 인트라넷 쪽지는 사측에선 못 들여다본다고 했잖아. 그 말 맞지?]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아 왜 답답하게 답이 없어.]

선아는 한숨을 내쉬며 재혁에게 답신을 했다.

[나는 팀장님 씹은 적 없거든. 재혁 씨만 씹었지.]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관리자들은 쪽지 볼 수 있는 거냐니까?]

원칙적으로라면 인트라넷의 쪽지는 저장되지 않고 상부에서도 볼 수 없다.

[못 봐. 걱정하지 마.]

그러나 프로그래밍 능력자인 도진이라면 또 모르는 일이긴 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재혁에게 상기시키고 싶진 않았다.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진짜?]

[응. 진짜.]

업무 계획표를 만들려고 했던 선아는 마음을 접고 컴퓨터를 껐다.

재혁이 회사에 들어온 이유를 알았다. 그녀의 생각보다도 더 허탈한 이유였다.

팀장이 불러서 밀회가 어그러진 거다.

설문조사 내용을 내일까지 만들려면 재혁의 야근은 불가피해 보였다. 과거 그 일이 선아가 맡았던 업무였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설문 내용을 뽑기 위해서는 TF팀 아이디로 접속해 자료를 보아야 했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문서에는 보안등급이 있었고, 재혁이 보아야 하는 자료는 보안등급이 매겨진 자료이기에 바깥에서 작업할 수도 없을 것이다.

회사에서 꼼짝할 수 없을 것이니 그에겐 더 얻을 게 없었다.

선아는 미련 없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도진 쪽을 향해 퇴근하겠다 말하고, 재혁에겐 눈으로 간단하게 인사를 했다.

재혁이 도와달란 눈빛으로 선아를 바라보았지만, 선아는 그를 외면한 채 고갤 돌렸다.

설문조사지 작성은 지난 삶에서 퇴사 전 선아의 마지막 업무였다.

유투북에서 빅데이터를 받지 않을 적에도 빅터 프로그램에서 추출한 키워드의 신뢰도는 98.23%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지만, 원픽 마케팅을 위해 다시 한번 신뢰도 조사가 필요했다.

지금까지는 빅터는 바탕 값이 되는 데이터를 스스로 서치해 취합하는 방식으로 가동되었지만, 유투북 측에서 방대한 데이터 자료가 넘어오면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사용자가 원하는 키워드를 추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데이터의 신뢰도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TF팀에서 테스트해야 했다.

그렇게 해 유투북 사용자들, 그중에서도 원픽의 팬이 될 확률이 높은 연령대의 관심사를 정확히 알아내고, 그 내용으로 영상을 만들어 유투북에 올린다.

사용자의 입맛에 맞춘 마케팅은 실패할 확률이 극히 적다는 것은 이 바닥의 불문율이었다. 그랬기에 드라마를 만들더라도 타깃층이 선호하는 배우를 섭외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UCC 열풍이 사그라들면서 유투북 같은 영상 콘텐츠에 대한 신뢰도가 적어서 그렇지, 사실 미래의 세상을 생각해보면 유투북에서 빅데이터를 받는다는 것은 마법 지팡이를 얻는 것과 다름없었다.

호박을 호박 마차로 만들고, 누더기를 드레스로 만드는 것이 마법 지팡이인데, 데뷔 전부터 한국 팬층이 탄탄할 정도로 완성형에 가까운 원픽에게 그 마법을 쓴다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이미 선아는 그 기적 같은 일을 경험했다.

한국의 아이돌이 전 세계 음악시장을 제패했다. 세상이 원픽에 열광했고, 원픽은 대중가수를 넘어 아티스트라 칭송받았다.

그 기적을 만드는 시초 작업이 지금 시작되는 것이었고, 선아는 자신이 참여했던 설문조사 업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도우면 재혁의 일도 금세 끝날 것이고 예정대로 희진을 만나러 갈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미 과거와 일이 어긋나 버렸다.

아쉽다.

미치도록 아쉽지만, 기회는 또 있을 것이다.

더는 재혁과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은 선아는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고, 그녀의 뒤로 원망 어린 재혁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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