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17화 (17/85)

17화. 성적 욕망

희진은 사랑하는 남자를 온전히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피해 심리 때문인지 몰라도, 선아와 재혁에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뒤에서 재혁을 불러냈고,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 강박적으로 사진을 남겨왔다.

그 덕분에 선아의 손엔 과거 그들의 행적이 고스란히 쥐어져 있었다.

과거의 이날, 재혁은 희진과 틀림없이 밀회를 즐겼다.

이날 밀회를 즐긴 걸 알 수 있었던 것은 사진 속 그가 웨딩 촬영을 위해 맞춘 정장을 입고 희진을 만났기 때문이고, 또 사진 하단에 사진이 생성된 날짜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선아는 택시를 타고 재혁을 미행할 생각이었다. 장소를 알기에 집에 갔다가 호텔로 이동해도 되지만, 집 앞은 주택가라 택시가 드물었다.

재혁이 곧바로 호텔로 향할지도 모르는데, 택시를 잡는다고 시간을 허비하다가 중요한 순간을 놓칠지도 모른다.

“정말 택시 타고 가도 괜찮겠어?”

“당연하지. 오늘은 우리 둘 다 피곤했으니까 각자 집에 가서 푹 쉬자. 앞으로도 일정 많잖아. 집 인테리어 현장도 며칠마다 한 번씩 가봐야 할거고.”

재혁은 의외라는 눈으로 선아를 바라보았다.

원래 이 시기의 선아는 그와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빨리 결혼하면 좋겠다고 손꼽던 사람이었다.

“우리 선아 착하기도 하지.”

재혁은 선아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웨딩 촬영을 위해 값비싼 화장을 한 선아는 오늘 유독 아름다웠다.

재혁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려는 순간 선아가 그의 가슴을 슬쩍 밀어냈다.

“길이잖아. 남이 봐.”

“남이 좀 보면 어때, 결혼할 사인데.”

재혁의 얼굴에 낭패감 어린 표정이 떴다.

“난 그런 거 좀 별로란 말이야.”

오늘따라 유난히 순종적으로 굴고, 조금 더 시간을 보내자고 떼도 쓰지 않는 선아에게 마음이 동하던 상태였다.

사실 남자에게 가장 설레는 존재는 새 여자라고, 선아에 대한 성적 호기심은 언제나 충만했었다.

그는 아쉽다는 듯이 선아를 내려다봤다.

“그럼 선아야…….”

바깥이라 이마에 입 맞추는 건 거절 당했지만, 은밀한 공간에서는 허락해줄지도 모른다.

오늘은 웨딩 촬영도 했고, 분위기도 좋았으니까 가능할지도 모른다.

재혁은 선아의 손을 잡고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꼈다. 뭉근하게 손바닥 가운데를 마주 비비며 은밀한 제안을 건넸다.

“우리 같이 있자, 응?”

“뭐?”

선아는 과거와 미래가 이상하게 엇갈림을 느꼈다.

재혁은 오늘 희진에게 가야 한다. 그걸 알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대체 왜 과거와 다른 행동을 하는 걸까.

“요즘 우리 회사 일도 바빴고, 네가 쓰러진 이후에는 데이트가 더 뜸했잖아. 비싼 화장도 했고, 날도 이렇게 좋은데, 데이트라도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선아의 몸을 훑는 그의 눈빛에는 진득한 욕망이 배어 있었다.

선아는 불쾌감을 느끼면서 그에게 맞잡은 손을 떼 냈다.

그와의 관계는 세빈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 할 결혼 첫날밤이면 족하다.

솔직히 말해서 과거에도 재혁과의 관계가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전 삶에서는 외로워서 그의 사랑을 갈망했었다. 그녀도 여자였기에 남편에게 뜨겁게 안기고 싶었었다.

그렇게나 지고지순했던 그녀에게 절망감을 안긴 그였다.

선아는 더욱 매혹적으로 미소 지었다.

“우리 지금까지 잘 참았잖아. 결혼까지 이제 2개월도 안 남았어. 나 그날까지 고이고이 순결 간직했다가 재혁 씨한테 주고 싶어.”

“…….”

“나 정말 재혁 씨와의 첫날밤 기대 많이 된단 말이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

그의 손에서 떼어낸 자신의 손으로 그의 팔뚝을 쓸면서 고혹스러움을 연기했다.

***

선아는 재혁이 주차장으로 사라지자 길 건너편에 서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오늘따라 살갑게 택시를 잡아주겠느니 하는 그를 떼어내는 게 곤욕이었다.

노골적으로 질척거리는 재혁을 떼어내는 데 성공한 선아는 택시에 올라타 뒷좌석에 몸을 숨겼다.

“기사님,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렸다가 출발해주세요.”

“차요?”

“네. 저기 스튜디오 건물 뒤편에서 곧 차 한 대 나올 거거든요.”

선아는 갓길에선 택시 안에서 차가 주차장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하얀색 세단 한 대가 스튜디오 건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님. 저 차 좀 따라가 주세요.”

“저 하얀 세단요?”

“네. 외제 차요.”

“아, 네. 알겠습니다.”

이런 손님들이 종종 있었는지, 택시 기사는 능숙하게 재혁의 차를 뒤따랐다.

선아는 앞 유리를 통해 재혁의 차를 확인하면서 보스턴 백을 열었다.

인조 속눈썹을 떼어내고 보스턴 백에서 꺼낸 클렌징 티슈로 값비싼 화장을 지웠다. 두툼한 티슈에 색조 화장이 묻어났다.

가면처럼 두꺼운 화장. 답답한 화장은 꼭 그녀의 이전 삶 같았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믿으면서 인내하고 인내하던 삶 말이다.

클렌징 티슈로 화장을 지운 선아는 고개를 들어 앞 유리를 응시했다.

진한 화장이 오일에 녹으면서 얼굴이 얼룩덜룩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재혁과 있을 때보다 한결 편안해졌다.

물티슈로 얼룩진 화장까지 모두 지워낸 선아는 긴 머리를 돌돌 말아 하나로 묶고는 머리카락이 가려지도록 버킷 햇을 눌러썼다.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보스턴 백에 꽉꽉 눌러 담고 가방 안에서 색이 다른 코트를 꺼내 입었다.

마지막으로 마스크까지 쓰니 웨딩 스튜디오 앞에서의 모습과 확연히 달라졌다.

코트 주머니에 작은 크기의 디지털카메라를 넣는 거로 준비를 마쳤다.

이대로 호텔에서 내려 재혁과 희진이 만나는 장면만 포착하면 된다.

두 사람의 밀회를 잡아낼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클라우드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다정한 모습을 포착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사람이 많은 공간에서 두 사람이 붙어 있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결혼을 위해 맞춘 예복을 입고 호텔에 들어서는 모습만 찍어도 성공한 것이다.

그런 증거들을 하나하나씩 모아 빠져나가지 못할 촘촘한 그물을 짜는 게 선아의 목표였다.

마침내 화장을 다 지우고 민얼굴이 된 선아는 결연한 눈빛으로 재혁의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

그러나 그렇게 수 분 뒤…….

“어……. 왜 이쪽으로…….”

선아의 기대가 무참하게 깨어졌다.

재혁의 차가 향한 곳은 호텔이 아니었다.

재혁의 차가 그가 사는 원룸의 필로티 주차장에 들어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차에서 내린 재혁은 곧장 집으로 들어갔다. 선아는 당황한 얼굴로 택시 바깥을 주시했다.

선아가 기억하는 사진 속에서 재혁은 이날 분명 희진과 호텔에서 만났다.

호텔 룸에서 와인을 두고 찍은 사진에는 예복을 입은 재혁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클라우드 시스템에 나온 날짜도 이날과 같은데 왜…….

“저기 손님?”

택시 기사가 선아를 불렀다.

상념에서 깨어난 선아는 택시 기사에게 또 다른 제안을 건넸다.

“기사님, 죄송하지만 여기서 6시까지만 함께 대기해주시면 안 될까요? 택시비에 15만 원 얹어드릴게요.”

“15만 원이요?”

“네.”

룸미러를 통해 선아의 얼굴을 힐끔 쳐다본 택시 기사는 선아의 사정을 미루어 짐작한 듯했다.

“혹시 저 차가 또 이동하면 따라가면 되는 건가요?”

“네. 맞아요.”

“15만 원 선금으로 주신다면…….”

선아는 지갑에서 지금까지의 택시비와 15만 원을 꺼내 기사에게 건넸다.

만약에 재혁의 차가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따라가는 비용은 추가로 결제한다고 했지만, 택시 기사는 6시 안에 움직이기만 한다면 추가 비용 없이 미행을 도와준다고 했다.

“청담동 웨딩 스튜디오 앞에서 택시 타시던데……. 혹시 결혼할 놈이 헛짓거릴 하는 거면 조상님이 도운 거네요.”

선아가 쓰게 웃었다.

조상님이 아니라 아들이 도왔다. 저놈의 피를 받아 태어난 아들이…….

“제가 최선을 다해 손님을 돕긴 할거지만, 사실 회사 택시라 7시까진 반납해야 하거든요.”

“네.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할 거 같아요.”

어차피 그의 집 앞에서 밤새도록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선아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차장에 덩그러니 서 있는 재혁의 차를 응시했다.

미래가 달라지고 있다.

앞으로의 미래가 선아가 알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달라진다면 어떡해야 할까.

죽어서 이곳까지 온 게 허사가 되는 건 아닐까.

세빈이가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자신을 여기로 보냈는지 모르는데……. 세빈이의 노력마저 물거품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불안함에 사로잡힌 선아는 계속해서 자신의 손끝을 뜯었다.

그렇게 20분이 흘렀다.

“손님. 손님. 아까 그 남자 내려왔는데요?”

“정말요?”

기사의 말대로 필로티 주차장으로 내려온 재혁이 차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또 어디 가려는 모양인데요. 따라갈까요?”

“네. 부탁드려요.”

겨울 해는 짧았다. 이미 주변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선아가 본 사진에서 두 사람은 해 질 녘에 밀애를 즐겼지만, 그보다도 한참 더 어두워진 시간이었다.

그나마도 미래가 완전히 어긋난 게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 안도하던 선아의 기대는 30분 후에 또다시 박살 나 버렸다.

재혁의 차가 HS 엔터테인먼트 사옥으로 들어섰다.

***

택시에서 내린 선아는 강남 한복판에 선 HS 빌딩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재혁의 차가 도착한 곳은 회사 사옥이었다.

호텔이 아니라 모텔, 혹은 희진의 집에 간다면 이해하겠지만, 회사는 그녀의 예상 밖에서 훨씬 벗어난 곳이었다.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아내의 눈을 속이고 외도를 해온 남자라고 하나, 그때는 사장 전용 사무실이 따로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평사원이 회사 건물에서 회사 직원도 아닌 이와 그 짓거릴 할 것 같진 않았다.

황망한 얼굴로 회사 안에 들어선 선아는 로비 화장실에 들어가 모자를 벗고 긴 머리를 내렸다.

웨딩 스튜디오에 입고 갔던 코트를 꺼내 입고, 잠행을 위해 가져온 여벌 옷을 돌돌 말아 다시 보스턴 백에 넣었다.

과거가 달라졌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달라진 것인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다시 세빈이를 만나야 하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에게 복수해야 한다.

이번 삶은 그녀에게 천금 같은 기회였다.

과거 자신이 잃은 모든 것을 되찾아야 하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이기에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대응해야 했다.

화장실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선아는 27층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립니다.

안내음과 함께 27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 앞에 서 있던 이가 선아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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