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침대 위
“아.”
문을 열고 비상계단으로 들어온 이는 도진이었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군요.”
도진은 무감한 얼굴로 정장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 통화를 하기 위해 조용한 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그는 전화기를 얼굴로 가져가며 계속 거기 있을 거냐는 눈짓을 보냈다.
“그럼 저희는 퇴근하겠습니다.”
재혁은 도진에 대해 뒷말할 때와 다른 깍듯한 태도로 고갤 숙였다.
선아 또한 사석에서와 달리 도진에게 팀장 대우를 해주며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복도로 나왔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재혁이 또다시 선아를 붙잡았다.
“선아야.”
“응?”
“오늘 바로 집에 가는 거지?”
재혁의 말에 선아는 무슨 의도의 질문이냐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따로 일정이 있는 게 아니면 오랜만에 같이 시간이라도 보내려고.”
또 한 가지, 잊고 있던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올랐다.
이 시기의 재혁은 둘 관계를 확실히 해두기라도 하려는 듯 잠자리를 갖잔 뉘앙스의 말을 자주 했었다.
그가 이러는 게 사랑하는 여자를 원하는 거라 착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몇 번은 그의 꾐에 넘어갈 뻔도 했지만, 천만다행인 것은 연애 한 번 못 해본 여자들이 그러하듯이 첫 연애, 첫 관계에 대한 환상이 컸던 선아는 잠자리를 결혼 첫날밤까지 미루었었다.
“재혁 씨, 집에 가서 쉴 거야. 내일 예쁘게 보여야 하잖아.”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아니었다. 재혁과 연인인 척 행세는 이쯤이면 되었다.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도 진저리날 만큼 싫은 남자에게 눈웃음을 보여가면서까지 애정이 있는 척하는 것은 곤욕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 삶에서 재혁의 처지 또한 자신과 다르지 않았겠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결국 그는 자신을 속임으로써 막대한 재산을 얻었다.
이전 삶에서 이혼 절차를 시작하지 않았었기에 선아의 유산은 모두 재혁에게 돌아갔을 것이었다.
선아 또한 그가 속인 것처럼 이번 삶에서 그를 감쪽같이 속여서 원하는 걸 얻어낼 작정이었다.
재혁에게서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
세빈이. 귀한 내 아이 세빈이.
분하지만 세빈이의 유전자의 절반은 저 몹쓸 놈한테서 기인했다.
세빈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면 지옥 불구덩이에 던지고 싶은 저놈에게 얼마든지 미소 지어줄 수 있다.
“그러니까 내일 봐, 재혁 씨. 내일 멋진 모습 보여줘.”
***
재혁에게 얼마든지 미소 지어줄 수 있다는 결심은 확고했지만, 그 과정이 쉽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한 번 해본 결혼 두 번은 왜 못 하냔 생각을 했지만, 결혼을 두 번 하는 것은 정말 못 할 짓이었다.
특히나 이 웨딩 촬영은 더욱 그랬다.
카메라 앞에서 능숙하게 포즈를 취하는 이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엔터테인먼트사에서 근무했고, 엔터테인먼트사 사장의 딸로 살았다. 그뿐 아니라 엄마는 퇴물 취급을 받긴 했어도 여배우였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나 카메라를 자주 접했고, 이미 한 번 웨딩 촬영을 한 바 있지만, 한 번 해본 일이라 해도 고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한 번 해봤기에 더 미칠 노릇이었다.
이곳 스튜디오의 다섯 섹션 중 세 번째 섹션은 일상 컷 촬영이었다.
미리 준비해둔 시밀러룩으로 커플룩을 차려입은 두 사람은 집 안처럼 꾸며진 실내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작가는 연신 두 사람에게 몸이 밀착되는 포즈를 권했다.
“신부님, 신랑님 어깨에 양손 올리시고요. 그 상태에서 허리를 더 안쪽으로 붙이셔야지만 허리가 얄쌍하게 나옵니다. 더, 더, 더, 더.”
재혁의 어깨에 양손을 올린 채 상체는 그에게서 최대한 떨어트리고, 반면에 아랫배는 맞닿을 듯 허리를 꺾어서 붙인다.
보기엔 쉬운 포즈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온몸의 관절이 다 제각각으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니 더욱 그랬다.
“자, 좋습니다. 자세 픽스 하시고요. 찍습니다.”
사진작가의 말과 동시에 두 번의 플래시가 터졌다.
이 웨딩스튜디오의 촬영 공간은 총 다섯 섹션. 아직 세 번째 섹션의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재혁을 사랑할 적에도 힘들었던 스튜디오 촬영을 사랑하지도 않는 현재에 하려니 곤욕이 따로 없었다.
해야만 하는 거니 하지만, 정말이지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자, 이번 섹션의 마지막 촬영입니다.”
그렇게 두 번이나 더 옷을 갈아입은 끝에 마지막 섹션의 촬영까지 왔다.
“저희 스튜디오 시그니처 컷이죠! 신부님 침대에 누워주시고요. 신랑님 그 옆에서 신부님을 내려다보겠습니다.”
다시 드레스 차림이 한 선아는 스튜디오 한가운데 놓인 침대를 바라보았다.
한때 유행하던 노르딕 디자인의 나무 장식이 돋보이는 침대였다.
선아는 한동안 침대를 바라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스튜디오의 시그니처 컷은 바로 이 침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신부와 신랑이 다정하게 침대에 누워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사진. 따뜻한 느낌의 조명 덕분에 평온해 보이는 듯한 사진 때문에 수많은 신혼부부가 이 스튜디오를 선택했다.
선아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삶에서 선아는 이 침대 컷을 큰 액자로 만들어 안방에 걸어둘 정도로 좋아했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이곳에 와서 사진 촬영을 한 후, 침대 디자인에 반한 선아는 배송에만 2개월이 걸린다는 이 침대를 이탈리아에서 공수해 신혼집에 놓았다.
원목 헤드가 높다랗게 솟은 침대에 안전가드를 설치해 매일 밤 세빈이와 함께 잠들었다.
8년 전으로 돌아온 두 번째 삶. 생각지도 못하게 과거에 쓰던 물건과 같은 걸 보고 나니 가슴이 조여왔다.
저 침대와 같은 디자인의 침대에서 매일 밤 세빈이를 재웠다.
남편인 재혁이 저 침대에 내연녀를 끌어들여 그 짓을 한 것도 모르고 그 침대에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이를 눕혀 자장가를 불러 재웠다.
손끝에 닿았던 촉촉한 아이의 뺨. 손바닥으로 매만지던 부드러운 머리카락. 세빈이의 향기…….
“선아야, 뭐 해?”
재혁이 다가와 선아의 손목을 잡았다. 선아는 깜짝 놀라며 투박한 그의 손을 뿌리쳤다.
“선아야?”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향해 선아는 또다시 억지 미소를 짜낼 수밖에 없었다.
세빈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재혁의 시선이 선아의 입술 끝에 닿았다. 선아는 손등으로 입가를 꾹 눌렀다.
“너무 긴장했나 봐. 재혁 씨도 알잖아. 내가 스튜디오 촬영 엄청 기대했던 거. 그래서 그래.”
재혁은 안심한 듯 웃었다.
“그랬지. 너 여기 사진에 반해서 사진 예쁘게 찍는다고 준비 많이 했잖아. 다이어트하다 쓰러질 만큼.”
“응. 그랬지.”
“힘들어도 조금만 더 힘내보자.”
재혁이 선아의 손을 잡았고, 선아는 지나치게 따뜻한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온기를 진짜라고 믿은 시절이 있었다. 이 남자의 다정함에 기대 살아보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 이 남자는 그저 자신을 기만하는 사람일 따름이었는데.
“자 그럼 두 분 다 침대에 누워주시고요. 팔베개 컷부터 먼저 촬영하겠습니다.”
사진작가의 주문에 맞추어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재혁이 선아의 머리에 자신의 오른팔을 대주었고, 선아는 옆으로 누워 그를 바라보았다.
재혁은 얼굴로 쓸려 내려온 선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져 이마 뒤로 넘겨주었다.
하얗고 작은 얼굴이 드러났다. 눈매를 강조하는 화장 덕에 오늘 선아의 이목구비는 더 뚜렷해 보였다.
“오늘 정말 예쁘다.”
선아는 입술만을 움직여 웃었다.
임신 후, 임신 중독증으로 10kg 가까이 살이 붙었을 때, 그리고 아픈 세빈이를 데리고 병원 치료를 받느라 산후조리를 거부하고 병원 다니던 그 시절에 재혁은 선아를 볼 적마다 타박했다.
‘네 볼 좀 봐. 터질 것 같다. 그 얼굴을 하고도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남들은 애 낳고도 잘들 살 빼던데. 여자가 얼마나 게으르면 자기 몸 관리 하나 못 하냐. 너만 보면 밥맛 떨어져.’
‘거울 좀 봐라. 거울 좀. 누가 보면 사람이 아니라 드럼통인 줄 알겠네.’
아픈 세빈이를 보면서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갔던 선아는 그의 말에 위축되어갔다.
육아 도우미라도 썼더라면 몸 관리할 시간이 있었겠지만, 아픈 아이를 차마 남의 손에 맡길 수 없어서 홀로 육아를 했다.
그렇게 많은 재산을 갖고도 남편이 밖에서 벌어오는 돈을 쓰는 게 미안해 육아에 관련한 지출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위한 작은 사치도 하지 않았다. 아니 사치도 할 시간이 없었다.
세빈이가 입고 쓰는 모든 것을 유기농과 친환경으로 준비했고, 교육과 육아에 관한 정보를 끊임없이 모았다.
당장은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쓸 수 없었지만, 세빈이가 조금 더 자라서 학교생활에 익숙해지면 시간이 날 테니 자기 관리는 그 뒤로 미루었다.
그렇게 몸무게가 불어난 그녀를 재혁은 여자로 대하지 않았다.
트로피 와이프였지만, 이제는 모양마저 형편없어진 트로피. 혹은 유행이 한참 지난 순금 반지처럼 재혁은 선아를 방치했다.
세빈이를 출산한 후부터 선아가 죽는 그 날까지, 재혁은 선아와 부부관계를 거부했다.
인간으로서도 여자로서도 자존감이 떨어졌지만, 결혼 생활을 지키고 싶었던 것은 출산 과정에서 의료사고를 겪은 세빈이 때문이었다.
얻지 않을 수도 있었던 장애를 얻은 세빈이에게 있는 아빠마저 빼앗을 수가 없어서 가정에 최선을 다했다.
그 시절 선아에게는 아들이 전부였다. 남편으로 인한 외로움을 세빈이가 채워주었고, 아들의 사랑 덕에 남편의 무관심도 견딜 수 있었다.
견뎌야 한다.
견뎌야 한다.
그래야지만 세빈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신이 과거로 돌아오는 기적을 행했듯 또 한 번 그녀의 삶에 기적을 행할 것이다.
선아는 침대 위로 올라가 과거에 했던 대로 포즈를 취했다. 재혁은 구겨진 선아의 옷자락을 손수 펴 주었다.
그 모습을 본 사진작가가 한마디 해왔다.
“신랑님이 정말 다정하시네요. 신부님이 신랑님 사랑하시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두 분 정말 보기 좋습니다. 자, 그럼 절반 이상 왔으니까 힘내서 나머지 촬영해 봅시다!”
사진작가의 활기찬 말과 함께 다시 또 촬영이 시작되었다.
사진에 나오는 곳들만 멋들어지게 장식해놓은 허구의 공간. 그 안에서 선아도 거짓 미소를 지었다.
***
마지막 웨딩 촬영을 마친 선아는 탈의실로 가 가져온 가방을 열어 보았다.
보스턴 백 안에는 입고 온 옷 외에도 여벌 옷과 마스크, 커다란 버킷 햇이 들어 있었다.
날이 따뜻했더라면 이렇게 가방 부피가 커지지 않았을 것인데, 몸을 가릴 외투를 담아오느라 한 짐이 되었다.
다행히 웨딩 촬영에 쓸 것들을 준비해왔단 핑계로 큰 가방은 의심을 사지 않았다.
옷가지 사이로 손을 넣은 그녀는 작은 크기의 디지털카메라를 손으로 매만져 보았다.
핸드폰 카메라보다도 훨씬 큰 해상도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로, 그녀는 오늘 이 카메라로 재혁과 희진의 연애 증거를 수집할 생각이었다.
처음엔 심부름센터 같은 데 맡겨 볼까도 생각했지만, 그쪽 업계의 사람들을 믿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괜히 협박만 당하거나 정보가 유출될 위험이 있기에 선아는 스스로 증거를 모으기로 했다.
과거에 보았던 클라우드 속 사진 덕분에 그들이 행적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꿰고 있기에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선아는 결연한 표정으로 올 때 입고 왔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탈의실 밖으로 나가니 재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집으로 데려다줄게.”
선아는 어깨에 멘 보스턴 백의 가방끈을 꽉 쥐었다. 재혁과 다정한 척을 할 때마다 손에서 진땀이 났다.
너무 싫은 것을 참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아니야. 재혁 씨. 오늘은 택시 타고 갈게.”
“웨딩 촬영하면서도 내내 피곤해 보였는데 택시를 왜 타.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
“나 못지않게 재혁 씨도 힘들었잖아. 택시 타고 가면 바로 가는데, 뭘.”
그가 데려다준다고 하는데도 버티는 것은 오늘 이 자리에 온 목적이 있어서였다.
그녀의 기억대로라면 웨딩 촬영이 끝나고 재혁은 희진과 호텔에서 밀회를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