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노골적
“말 그대로 결혼을 꼭 해야겠냐고 묻는 거야. 너 아직 나이도 어리고.”
이런 질문은 이전 삶에서는 들어본 적 없다.
선아는 의아한 듯 도진을 보다가 이내 그의 말에 숨을 뜻을 알아챘다.
원래대로라면 이 시기에 도진은 그녀의 결혼에 대해 지극히 무관심했다.
이 시기의 그는 빅터 프로그램을 가동해 새로운 마케팅을 도입하는 것이 전부인 양 보였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는 한 가지일 것이다.
일에 지장을 주지 말라는 것.
“내일 휴가를 내긴 했지만, 웨딩 촬영이 5시쯤엔 끝난다고 하더라고. 집에 가서라도 못 한 일-”
“선아야.”
도진이 그녀의 말을 잘랐지만, 선아는 기어이 그가 원할 법한 답을 돌려주었다.
“선배, 업무에는 지장이 없도록 할게.”
과거의 도진은 선아와 재혁이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그에 대해 일절 관심 없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는 지금 팀원의 결혼이 팀 업무에 지장이 있을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래.”
“근데 나는 무슨 일을 하면 돼?”
“서버실 증축에 대한 관리 감독.”
“응?”
지난 삶에서 그녀는 빅터의 신뢰도 평가 조사를 맡았었다.
빅터 프로그램에서 분석한 키워드와 실제 설문 결과를 대조하는 일이었다.
서버실 증축에 대한 관리 감독은 선아의 일이 아니었다.
“그게 내가 할 일이라고?”
유투북에서 막대한 양의 데이터가 전송되면 그 데이터를 저장하고 운용할 서버가 필요하다.
지금이야 유투북 사용자가 적다고 하지만 8년 후를 떠올린다면 지금보다도 수만 배나 사용자들이 늘어난다.
그들의 검색어, 그들이 본 동영상, 각 동영상에서 머무른 시간, 또한 이어본 다른 동영상에 대한 정보가 실시간으로 쏟아질 터였다.
이때의 도진은 예상이라도 한 듯 서버실에 대한 막대한 외부 자금 투자를 받아냈다.
“이번 달 안에 20층 사무실이 비면 다음 달 초부터 서버실 공사가 진행돼. 설비야 전문가들이 하겠지만, 우리 측에서도 일의 진행 상황을 파악하고 협의를 진행할 단일 창구가 필요할 테니 그 역할을 네가 해주었으면 해.”
“어…. 그게 말야….”
그 일은 지난 삶에서 도진이 맡은 역할이었다.
누구도 도진의 새로운 전략에 대해 환영하지 않았기에 그 혼자 무거운 짐을 짊어졌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이에게는 찬사보다는 괄시가 따라온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8년 후 세계적인 아티스트 원픽을 있게 한 그의 시도도 지금 시대에선 기행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미래전략팀에선 그 혼자 중차대한 모든 임무를 맡아 했다.
그런 역할 중 하나를 자신에게 나누어준다니…….
선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
“할 수 있지?”
미래가 바뀌고 있다.
도진의 기대만큼 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고, 천재라 불리는 그의 마음에 차게 자신이 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은 다할 수 있었다.
선아는 그의 눈을 바라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떠올랐다.
25세의 윤선아. 그리고 29세의 류도진.
원래의 이 시기에서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 사이가 아니었다.
선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정신을 차렸다.
“내가 특별히 더 신경 써야 할 게 있을까?”
“매뉴얼대로만.”
도진은 서버실 증축 관련 사항을 정리한 문서를 선아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이 업무는 빅터 가동 준비에 있어서 핵심 업무나 다름없었다.
이번 삶에서는 회사 일을 절대로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음에도 처음부터 커다란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잘 부탁해.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하고.”
“응. 선배. 그럼 나가 볼게.”
선아는 얼얼한 얼굴로 회의실을 벗어났다.
문 앞에 서서도 자신이 이 일을 맡게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도진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일한 게 이런 결과를 만든 걸까.
입사한 지 갓 1년이 된 자신이 맡기에는 말도 안 되게 중대한 업무였고, 사장의 딸이라는 배경을 쳐주지 않는 도진이기에 더욱더 제 손에 들린 서류가 믿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의욕이 솟았다.
잘 해내고 싶었다.
선아는 회의실 앞에서 심호흡을 크게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회의실 앞 복도를 지나 사무실 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딜 때였다.
누군가 선아의 손을 잡아챘다.
“잠깐 이야기 좀 해.”
재혁이었다.
선아는 자신의 손목을 세게 잡은 채 복도를 가로지르는 그를 당황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재혁이 선아를 데리고 간 곳은 건물 비상계단이었다.
오피스 건물로 지어진 HS 엔터테인먼트에는 비상계단 세 곳이 있었고, 그중 오른쪽 끝에 있는 비상계단은 평소에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인적 없는 비상계단에서는 퀴퀴한 먼지 냄새만이 났다.
비상계단의 문을 닫고 돌아선 재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선아를 바라보았다.
“윤선아, 너 왜 이래?”
“뭐가?”
“너 원래 이렇게까지.”
회사 일에 의욕 있던 사람이었냐고 말하려던 재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쩐지 너무 노골적으로 자기 속내를 드러내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결혼 전이었기에 선아보다도 그녀가 가진 것들을 더 탐내는 듯한 태도는 지양해야 했다.
그런 말은 결혼한 후에 해도 충분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선아의 채근에 재혁은 표정을 풀고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너 이렇게까지 무리하면 안 되잖아.”
재혁의 말과 동시에 선아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재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이어트로 인한 영양실조로 쓰러졌던 선아는 깨어난 이후에 확연히 달라져 그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특히나 미친 사람처럼 물병을 집어 던지면서 난동 피우던 모습은 공포까지 불러일으켰다.
결혼을 앞두고 파혼하는 일이 꽤 많다던데, 하물며 집안 경제력이 하늘과 땅만큼 격차가 벌어지는 선아와의 결혼이었다.
운 좋게 선아의 마음을 얻었지만, 사실 그는 선아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선아와 함께하는 모든 것이 그의 자격지심을 불러일으켰다.
신혼여행지 이야길 할 때도 선아는 자신이 다녀본 외국 이야기를 했지만, 재혁은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결혼 준비를 하느라 물건을 고르고, 신혼여행지를 고를 땐 형편없는 제 안목이 탄로 날까 전전긍긍했다.
일상생활에서조차도 선아와는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커피숍에 가서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원두를 선아는 척척 구별해내었고, 그녀가 옷을 사 입는 매장에 가도 선아를 대하는 직원들의 깍듯한 태도가 그를 긴장시켰다.
뒤늦게 대학을 졸업해 사회 초년생으로 HS 엔터테인먼트에 발을 들인 게 재혁이었다.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휴학을 반복하면서 학교에 다녔고, 그랬기에 돈이 들어가는 경험을 할 수 없었다.
선아의 삶은 자신이 동경해마지않는 삶이면서도, 자신이 살아보지 않은 삶이었기에 그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들었다.
“그보다 에스테틱도 다 취소했다길래 컨디션 안 좋은 줄 알았는데, 언제 그렇게 회의 준비를 했어?”
사랑하는 척, 걱정하는 척을 하지만 그는 선아가 불편했다.
자신과 너무도 다름 삶은 살아온 선아에게는 부러움과 동시에 자격지심이 들었다.
“결혼이 중요하긴 해도 할 건 해야지. 재혁 씨도 일하면서 결혼 준비하잖아.”
“어머님께서 회사 일에 소홀하지 말라고 하시니까 그런 거고.”
“아무리 그래도 결혼 준비를 거의 나 혼자만 하는 것 같아.”
“내가 결혼 준비에 무성의해서 화난 거야?”
재혁과 마주 선 선아는 이전 삶에서의 기억을 반추했다.
이맘때쯤 선아는 재혁을 붙잡고 자주 투정을 부렸다.
결혼 준비에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참여를 해달라는 투정이었다.
재혁은 결혼식 관련한 선택도, 신혼집에서 쓸 물건을 고를 때에도 그녀와 거의 동행하지 않았었다.
꼭 신랑이 있어야 하는 예복 피팅이나 스튜디오 촬영 같은 건 함께해주었지만 물건을 사거나 고르는 일은 항상 선아 혼자서 해결했다.
처음엔 그게 가진 게 없어서 미안한 마음 때문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는 선아와의 결혼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회사와 선아의 배경이었다.
어차피 결혼만 성사된다면 그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손에 들어온다고 믿어서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회사 일에 매진했다.
책임감 있는 모습인 줄 알았지만, 그건 기만행위에 불과했다.
정말로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하면 그럴 수는 없었다.
선아가 믿었던 사랑은 허상이었다.
“아무 소리 안 하는 거 보니까 진짜 화났나 보네. 앞으로 성의 있게 잘할게.”
그가 자신을 기만한다는 걸 알지만 선아는 이 연극을 계속해야만 했다.
“나한테 무성의했던 거 알긴 알아?”
그녀는 재혁을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게 기특하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재혁의 입매도 선아를 따라 둥글게 휘었다.
“그럼. 너 쓰러지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알지? 내 마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사랑 운운하는 그를 보니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그러나 복수를 위해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러엄, 잘 알지, 재혁 씨 마음.”
“퇴근 같이하자. 집까지 데려다줄게.”
“아니야. 재혁 씨도 오늘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어. 그래야 내일 사진 잘 나오지.”
“나 신경 써주는 거야?”
“누구 남편 될 사람인데 당연히 신경 써야지. 사실 회사 일도 엄마 체면 봐서 하는 척 정도만 하는 거야. 괜히 책잡힐까 봐.”
“누가 널 책잡아.”
“이제 회사 사람들도 내가 엄마 딸인 거 알았으니까 엄마 봐서라도 일하는 척은 해야지. 게다가 쓰러져서 며칠이나 일 못 했잖아.”
“어휴, 우리 착한 윤선아.”
재혁은 선아가 예뻐죽겠다는 듯 그녀를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선아야, 대신 몸에 무리 되지 않을 정도로만 일하는 거다? 힘든 일은 다 나한테 떠넘기고. 알았지?”
“응. 알았어.”
이렇게나 그가 다정하게 굴었으니 연애 경험이 전무했던 선아가 그에게 홀딱 넘어간 것이었다.
“근데 재혁 씨, 회사에서 이렇게 안고 있다가 엄마한테라도 걸리면 집에서 혼나.”
“알겠어. 알겠어.”
선아에게서 팔을 푼 재혁은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근데 아까 류도진이 너한테 뭐 시킨 거야?”
재혁의 입에서 도진의 이름이 나오자 선아는 그가 도진을 못마땅해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미래의 삶에서 재혁은 기회만 있으면 도진을 쫓아내려 했었다.
처가의 후광으로 사장 자리에 있는 그와 HS 엔터테인먼트를 제 손으로 키우고, 3대 대주주로 있던 재혁의 입지는 천지 차이였다.
사실 도진은 마음만 먹으면 재혁을 사장 자리에서 해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반면에 재혁은 선아의 주식을 제외하고서는 HS 엔터테인먼트의 주식 한 주 가지지 못한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재혁이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도진을 따라잡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선아의 죽음 이후 도진이 자진해서 회사를 나가긴 했지만, 그의 퇴장마저도 재혁이 못마땅해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선아는 재혁이 도진을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여간 못났다.
이 삶으로 돌아와서의 목표는 세빈이지만 선아는 능력만 닿는다면 도진에게도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였다.
달칵 소리와 함께 비상계단의 문이 열렸다.
지근거리에서 이야길 나누고 있던 선아와 재혁이 한 발짝 물러서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