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13화 (13/85)

13화. 붉은 빛

“좋은 아침입니다.”

유리 파티션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선아와 신유미 대리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 난 방향을 향해갔다.

재혁이 출근해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신 대리님 안녕하세요.”

“재혁 씨, 좋은 아침.”

신유미 대리와 인사를 나눈 재혁은 선아를 향해 웃으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선아는 집에서 거울을 보고 연습한 미소를 지었지만, 아직까지는 입꼬리가 빳빳하여 어색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선아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재혁은 서류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으며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오늘까지 네가 쉬는 줄 알았어. 집에서 회복하고 내일 스튜디오로 바로 오려나 하고 생각했는데.”

선아는 재혁의 말을 잘랐다.

“재혁 씨, 여기 회사야.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해.”

두 사람이 사귀는 것도, 결혼하는 것도 다치기 전까지는 비밀이었다.

선아가 곧 결혼한다는 건 회사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상대가 재혁이라는 것은 이번에 선아가 쓰러지며 알려졌다.

재혁이 일부러 내색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를 알리고, 자신이 사장의 사위가 될 사람임을 회사에 드러낸 것이다.

이미 지난 삶에서의 기억으로 둘 사이를 재혁이 알렸다는 걸 알게 된 선아는 그의 뜻대로 놀아날 마음이 없었다.

재혁이 회사에 둘의 사이를 알린 의도는 회사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함인 걸 알기에 그의 행동에 조금도 협조하고 싶지 않았다.

선아가 말을 자르자 재혁은 이번에는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쪽지를 보냈다.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아직도 컨디션이 안 좋아? 어제 통화할 때 목소리 괜찮길래 마음 놨는데.]

파티션 너머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선아는 표정 관리를 했다.

아직까지는 억지로 웃는 것이 어색해 입꼬리가 달달 떨렸다.

[회사에 내가 엄마 딸인 것도, 결혼상대자가 재혁 씨인 것도 알려졌잖아. 굳이 남들 이목 끌어서 좋을 거 없잖아.]

엔터를 누르는 손에 유독 힘이 들어갔다.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하긴, 어머님께서 회사에서는 사내 연애 내색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지.]

그걸 아는 사람이 선아가 쓰러지자마자 그녀와 현숙의 관계며 자신과의 관계까지도 떠벌리듯 소문냈다.

물론 그랬단 것도 미래에 안 사실이었지만, 이제야 생각해보니 재혁의 목표가 사랑보다는 그녀가 가진 배경에 있었기에 당연한 행동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우리 당분간은 너무 티 나게 굴지 말자.]

딱 선을 그어놓은 것은, 일말의 애정도 남지 않은 그와 마주하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를 참아주는 건 세빈이를 만나기 위한 2개월이 전부고, 어디까지나 첫날밤까지였다.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 사랑해, 선아야. 오늘도 우리 힘내자.]

가증스러운 자식.

[응ㅗㅗㅗㅗㅗㅗ]

[이재혁 사원 / 미래전략팀 : ?]

[미안. 손이 미끄러져서.]

그러나 저 가증스러운 인간에게 복수하기 위해선 자신도 가면을 쓸 필요가 있었다.

선아는 입술 끝에 힘을 주고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모니터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어느덧 입가 주변 근육이 풀어지고 미소가 제법 자연스럽게 변해 있었다.

***

도진은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출근했다.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에 미래전략팀 부서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도진에게로 향했다.

네이비 컬러 정장 위에 코트를 겹쳐 입은 도진이 책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코트 깃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이 묻어났다.

현재 도진은 사내에서보다도 사외에서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외부와 협의해 새로운 마케팅법을 도입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TF팀 팀장으로서의 그의 역할이었다.

올해 도진이 진행하는 사업이 향후 HS 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한 선아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빌보드 차트 1위에 빛나는 아이돌 그룹 ‘원픽’을 만든 마케팅. 도진이 지금 하는 일이 그 일이었다.

다만 지금 도진이 하는 일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은 앞서가는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이전 삶에서의 선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HS 엔터테인먼트를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사로 성장시키고 선아의 자산을 한국 제조업 기반의 기업 대표들과 견줄 정도로 만든 게 도진이었다.

그러나 앞에 이야기했듯, 현재의 그는 남들과 다른 행보를 걷는 독불장군에 불과했다.

지금부터 8년, 자신의 삶과는 떼려야 뗄 수 없었던 도진의 행보를 선아는 기억하고 있었다.

선아는 책상에 앉은 도진을 지켜봤다.

그의 책상 위엔 그사이 보고 자료가 빽빽하게 올라와 있었다.

도진은 책상 한쪽으로 브리프 케이스를 치우고 보고 자료를 한데 모아 펼쳐보기 시작했다.

팀장 자리에 앉아 보고 서류를 들춰보기 시작하는 그의 등 뒤로 겨울의 짧은 해가 저물고 있었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카락 위로 낙조의 붉은 빛이 스몄다.

따뜻한 빛깔로 물든 머리카락과 달리 그 아래 반듯한 이마와 날카로운 모양새의 눈매는 지나치리만큼 무감해 보였다.

그가 이렇게 침묵할 때면 누구도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사실 미래전략팀 오후 회의가 예정돼 있었지만, 그 누구도 언제 시작할 거냐는 물음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실은 이전 삶에서 스물다섯 살의 선아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어려워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다시 눈을 뜨면서 지나치게 도진에게 알은체를 했다.

그를 끌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세빈이의 흔적을 확인하려 한 것은 미래의 기억 때문이었지, 원래의 선아로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 순간 보고 자료를 검토하던 도진이 고개를 들었다.

선아와 도진의 눈이 마주쳤다.

선아가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리는 순간, 도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래전략팀 회의합시다.”

도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래전략팀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로 향해가는 팀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퇴근 시간을 30분 앞두고 회의를 시작하자는 건 퇴근을 미루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중에서도 재혁의 얼굴이 가장 어두웠다. 내일이 선아와 그의 웨딩 촬영일이었다.

이미 한 달 전부터 휴가를 내두었는데, 퇴근 전 이렇게 회의를 한다는 건 회의 결과에 따라서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쏟아질 수도 있단 뜻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퇴근 후에 선아와 함께 청담동의 에스테틱에 들러 웨딩케어를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선아가 자신과 상의도 없이 에스테틱 예약을 취소해버렸다.

그것도 화가 나는데 회의실로 향하는 선아의 얼굴엔 생글생글 미소마저 떠 있었다.

‘저게 언제부터 저렇게 일을 했다고.’

재혁은 선아가 회사에서 자리 잡는 걸 원치 않았다.

그녀와 결혼하고 나면 자신은 HS 엔터테인먼트 사장의 유일한 사위가 된다.

재혁은 선아가 결혼 준비에나 몰입하면서 회사 일을 등한시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런 선아와 달리 자신은 성실하게 일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지를 현숙에게 어필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선아가 가진 것들을 나누어 갖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회의실에 앉은 이들은 각자 준비해놓은 자료를 펼쳤고, 가장 늦게 회의실에 들어온 도진이 상석으로 가 앉았다.

“먼저 오늘 있었던 미팅 결과에 대해 말하자면 유투북 측에서 빅데이터 제공에 동의했습니다.”

빅데이터란 디지털상에서 발생하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말한다.

검색어, 사람들이 많이 클릭한 키워드, 방문 기록 등을 포괄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인터넷상에서는 무수히 많은 데이터가 생성되고 있다.

단순하게 보면 사라지는 데이터에 불과했지만 이를 연령 또는 국적, 성별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면 특정 계층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다.

특히나 특정 계층의 기호나 선호에 관하여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는 근거가 되기에 현대의 마케팅에서는 빅데이터가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유투북에서 빅데이터 제공 동의를 했다고요?”

“네.”

유투북은 미국에 본사를 둔 동영상 공유 웹사이트였다.

8년 후에는 가입자 수만 19억 명에 달하는 사실상 세계 최대 규모의 동영상 사이트가 된다.

선아가 기억하는 8년 후 대한민국에서는 아이들의 희망 직업 1순위가 유투북에 콘텐츠를 만드는 유투버로 꼽혔다.

유투북에 동영상을 만들어 제공하는 전문 회사들이 생기고, 그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벌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매체로 성장하지만, 현재는 사실상 유투북의 영향력이 미미했다.

“미국을 대상으로 구독자들을 늘려가는 상황이지만 현재로서는 한국과 아시아 시장에서는 영향력이 미미하다 보니 광대한 인터넷망을 구축하고 있는 한국의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우리와 협업을 진행을 결정한 것 같습니다.”

도진은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유투북 측과 화상 미팅을 진행하느라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고, 뒤늦게 출근을 해 미팅 결과를 털어놓고 있었다.

“빅데이터 제공 협의가 이루어졌다면 빅터 활용에 큰 도움이 되겠군요.”

“네. 서치를 통해 키워드를 추출해내는 것보다 직접 많은 양의 빅데이터를 공급해 필요한 정보를 추론하게 되니 프로그램 가동 효율이 월등히 올라갈 것이라 짐작됩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미래에 도진은 유투북에서 제공한 빅데이터를 통해 연령별 관심사와 선호 키워드, 즉 트렌드를 읽어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선도하게 된다.

선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회의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았다.

원래대로라면 과거의 이날, 그녀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다친 김에 조금 더 쉴 생각으로 요양하던 중이었다.

사실 그때의 선아는 쓰러지고 나서도 다이어트를 계속할 정도로 철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다시 이날에 온 선아는 누구보다도 눈을 빛내며 회의를 지켜보고 있었다.

“팀장님. 저는 조금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재혁이 손을 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재혁 씨 의견 들어보죠.”

“기존에 한국을 휩쓸었던 UCC 열풍 기억하세요?”

한국에는 한때 UCC라는 창작물을 만드는 열풍이 불었었고, TV 프로그램에서 UCC를 보여주는 코너가 있을 만큼 인기가 있었지만, 그 열풍은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사실상 유투북 콘텐츠의 태동 격이라고 할 수 있었던, UCC 거품이 사그라듦으로 인해 UCC 콘텐츠를 소개하던 사이트들이 쓴맛을 보았고, 거기엔 동영상 사이트인 유투북도 포함돼 있었다.

가입자 수가 정체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마이너스가 되는 상황을 맞은 유투북은 급기야 회사를 매각하고 만다.

“이미 한물간 유행을 가져다가 그걸 기반으로 아티스트를 키운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더군다나 원픽이 어떤 아이돌입니까. HS 엔터테인먼트에서 5년을 공들인 아이들이에요.”

재혁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HS 엔터테인먼트의 차세대 아이돌 그룹인 원픽을 도진의 방식으로 마케팅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맞은편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아는 인상을 구기며 혀를 찼다.

‘에라이 등신아.’

감이 없어도 저렇게 없을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