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첫날밤의 기억
사람의 기억은 결국에 가서는 흐려지기 마련이었다. 미래 삶에 대한 기억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기에 선아는 자신이 본 걸 기록해야만 했다.
“아…….”
한참을 그러던 선아는 머리가 깨질듯한 통증에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눌렀다.
미래를 살다 왔다고 하나 몸은 과거의 것 그대로였다.
충격으로 쓰러질 만큼 머리를 세게 부딪혔으니 통증이 없을 리가 없었다.
선아는 핸드폰을 침대에 내려놓은 채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한참을 그렇게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거렸다.
미래와 현재, 과거가 뒤섞인 기억 속에서 오늘 들었던 엄마의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대체 정신머리가 어떻게 됐길래 그러는 거야? 내가 보기에 너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것 같다.’
정신병원에 가야 할 사람은 희진과 재혁이었다. 온전한 사람의 정신을 갖고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에게 일어날 모든 불행이 그 두 사람으로부터 기인하기에 미래를 바꾸어야만 했다.
관자놀이에서 손을 뗀 선아는 다시 핸드폰을 쥐었다.
머리가 아파도 기록해야 한다. 설사 머리가 터져 쓰러지는 일이 있다고 해도 지금 기록해 놓아야만 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우리 엄마. 엄마는 여기 남아줘. 사랑해, 엄마…….’
어쩌면 그게 자신이 이곳에서 눈을 뜬 이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신의 안배인지, 아니면 억울하게 죽은 엄마를 위해 먼저 간 세빈이가 행한 기적인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세빈이의 말대로 사는 방법 말고는 어떤 일이 최선인지 알 수 없는 선아는 살아가야만 했다.
이전 삶과는 다르게 바보처럼 살지 않으면서 다시 아들을 만나는 날까지 버티는 것.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다.
***
이른 아침, 선아가 눈을 떴다. 창을 통해 아침 볕이 쏟아졌다.
햇볕에 잔꽃 무늬가 수놓아진 차렵이불이 본래보다 더 밝은 빛을 띠었다.
어제 병원에서 퇴원한 선아는 아주 오랜만에 친정집에 와서 잠을 잤다.
이 삶에서는 며칠 만에 온 집이지만, 지난 삶까지를 합치면 10년 만에 온 집이었다.
선아는 착잡한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전 삶에서는 엄마가 돌아가시자마자 집을 처분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오랫동안 의식 없는 상태로 지냈던 엄마의 죽음은 선아에게도 새아빠에게도 충격이고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이 집에 다시 오니 자신이 과거로 왔다는 사실이 더욱더 실감 되었다.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선아가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비스듬히 여니 시린 바람이 방 안의 뜨끈한 공기를 몰아내었다.
선아는 창문을 조금 열어둔 채 화장대 앞에 가서 섰다. 이 세상에서 눈을 뜬 지 5일째. 갸름한 뺨과 탄력 있는 피부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은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이렇게 혼자서 자본 게 얼마 만인지.
사실 이전 삶에서 선아는 자신의 시간을 거의 가지지 못했다. 세빈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시간엔 세빈이의 먹거리를 직접 만들었다.
청소를 도와주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집을 오갔지만, 몸이 불편한 세빈이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은 마음에 음식만큼은 꼭 자신의 손으로 했다.
세빈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온 후에는 함께 시간을 보냈고, 세빈이가 잠든 후에는 보통 세빈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쇼핑하거나 육아 카페를 통해 교육 정보를 모았다.
전업주부를 팔자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선아는 자기 자신 하나 챙길 시간조차 없었다.
그랬던 그녀에게 천금을 주고도 사지 못한다는 젊음이 돌아와 있었다.
입술은 무얼 바르지 않아도 발그레했고, 갸름한 얼굴은 8년 후의 그녀가 다이어트를 한다 해도 가지지 못할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은 것은 가장 귀한 이가 지금 그녀 옆에 없기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즈음의 선아는 에스테틱에 등록해 웨딩케어를 받으며 3개월 후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겠지만, 다시 돌아온 삶에서는 모든 관리를 끊었다.
이제는 재혁과의 결혼식 따위는 그녀에게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졌다.
거울에서 시선을 뗀 선아는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긴 머리를 감았다.
세빈이를 낳은 후, 묶을 수만 있을 정도로 짧은 머리카락 길이를 유지했었기에 긴 머리를 감고 말리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머리를 자르지 않은 건 자신이 달라진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서였다.
지금이라도 재혁과 희진 뒤를 캐서 증거를 잡고 망신을 주고 결혼을 무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쉬운 것을 하지 않는 건 세빈이 때문이었다.
시간순으로 자신과 재혁, 희진에게 있었던 일을 정리하다 보니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이번 삶에서 세빈이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 만남을 위해 세빈이가 자신을 이곳으로 돌려보낸 게 아닐까.
세빈이는 신혼 첫날 밤에 생긴 아이였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근처에 볼일이 있다고 재혁이 나갔다가 돌아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희진이 호텔로 찾아온 것이었다.
대체 어떤 변태적인 취향으로 아내와의 첫날밤에 다른 여자와 시간을 보내다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결혼 첫날밤에 선아는 영문도 모르는 채 재혁을 기다렸고, 시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또 보았다.
그 덕분에 관계를 한 시간, 재혁이 관계를 마친 시간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자신의 변화를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는 건 바로 세빈이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였다.
화장대에 앉아 출근 준비를 하던 선아는 화장대에 놓아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비밀번호를 걸어 잠가둔 메모장 앱에는 그녀의 무기가 들어 있었다.
미래에 대한 단서. 그것들로 이 삶에서 둘의 외도 증거를 착실히 모아서 개망신을 줄 것이다.
재혁을 통해 세빈이를 얻고, 그 이후엔 외도의 증거로 재혁뿐 아니라 희진까지도 다시는 제 삶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쫓아버릴 것이다.
-선아야, 아침밥 먹자.
문밖에서 새아빠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근 시간이 다가왔다.
화장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던 선아는 5일간 무수히 연습한 미소를 띠었다.
재혁과 희진이 자신을 기만했듯이 자신 또한 그들에게 똑같이 돌려주리라.
***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새로 주어진 삶, 전의 삶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녀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난번 삶에서처럼 재혁에게 회사 일을 맡긴 채 뒤로 빠지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8년, HS 엔터테인먼트는 빠르게 성장한다.
당시 유산으로 받은 HS 엔터테인먼트 주식 23%의 가치는 한화로 2조 원. 선아의 죽음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이 재혁의 손에 넘어갔다.
어쩌면 이 순간에도 다른 세상에서 그 둘이 제 재산으로 희희낙락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 삶에서는 그들의 손에 10원 하나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재혁이 HS 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되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그랬기에 어영부영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회사에 복귀해서 재혁이 배우고 했던 일 모두 제 손으로 해야만 했다.
회사에 들어서던 선아는 사옥 로비를 눈으로 훑어보았다.
죽기 전에도 이곳에 왔었는데, 그때는 남편의 외도에 정신이 나가 있어서 로비는 지나치기에 급급했었다.
다시 이곳에서 일한다 생각하니 로비의 풍경도 다르게 와 닿았다.
출입 게이트에 사원증을 찍고 헐레벌떡 달려 들어가는 사람, 로비 카페에 줄을 서서 커피를 사는 사람 등으로 이른 아침의 출근 풍경이 다채로웠다.
HS 빌딩은 HS 엔터테인먼트가 소유한 빌딩이지만, 아직까지는 HS 엔터테인먼트의 규모가 크지 않기에 21층부터 27층까지를 HS 엔터테인먼트에서 쓰고 있었고, 다른 층은 오피스로 임대를 하고 있었다.
선아는 가슴에 찬 사원증의 릴을 길게 늘여 출입 게이트에 가져다 댔다.
출입 게이트를 통과한 선아는 20층 이상으로만 운영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전략부서가 있는 27층 버튼을 누른 선아는 손바닥에 흥건한 땀을 정장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아이 낳고 나서는 주주총회가 아니고서야 회사에 올 일이 없었으니, 사실상 8년 만의 출근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지금 삶에서는 며칠 만의 출근이었지만, 미래를 살다가 돌아온 몸은 현재의 일을 다 기억하지 못했다.
업무 실수를 저지르는 건 아닐까 싶어 괜히 긴장되었다.
-27층입니다.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복도의 유리 파티션 너머로 전략부서의 사무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평소보다도 일찍 출근했다. 정면으로 보이는 벽시계는 이제 막 8자에 닿으려 하고 있었다.
업무에 적응할 겸 제일 일찍 출근한다고 서둘러왔는데도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미래전략팀 신유미 대리였다.
선아가 파티션 너머 사무 공간에 발을 들이자 기척을 느낀 신유미 대리가 책상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길게 빼고 그녀를 바라봤다.
“선아 씨 왔어?”
“대리님 안녕하세요.”
신유미 대리는 그녀의 사수였다. 과거, 임신으로 퇴사를 서둘렀었기에 그녀와 친하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그녀를 보니 반가웠다.
선아가 그녀 옆자리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자 서민아 대리는 컴퓨터 마우스에서 손을 놓고 선아 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머리는 어때? 그나저나 선아 씨, 사장님 딸이었다면서? 내색을 안 해서 까맣게 몰랐어.”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번 삶에서도 머리를 다치는 일을 계기로 회사에 엄마와의 관계가 알려졌다.
“엄마가 사장이든 아니든 일 배우는 건 똑같은걸요. 아시잖아요.”
선아는 저 너머 팀장 책상을 눈짓했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도진의 자리였다. 미래전략팀장은 29세의 도진이었다.
공격적으로 사업을 불려가는 현숙은 도진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 TF(태스크 포스, Task force)팀인 미래전략팀의 팀장을 맡겼다.
도진이 개발한 빅데이터 분석 프로그램인 빅터와 결합한 새로운 마케팅을 연구하는 팀이 바로 미래전략팀이었다.
“하긴, 류 팀장님이 스물아홉인데도 TF팀 맡아서 운영하는 거 보면 우리 사장님은 철저하게 능력만 보는 분이신 듯해.”
“맞아요. 저한테도 회사에서 내색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알려지게 돼서 팀원들께도 죄송해요. 혹시나 저를 불편하게 생각하실까 걱정되네요.”
전략팀 전체는 전략팀장인 도진의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는 포지션에 있었다.
이 팀의 두 사원인 재혁과 선아, 신유미 대리와 아직 출근하지 않은 과장과 모두 도진 휘하의 치프 스태프(Chief Staff)였다.
“그러고 보니 선아 씨 공채 입사였지? 신입사원 공채 과정도 전부 공개로 진행해서 선아 씨 입사한 거 우리 다 납득했었으니까.”
“저 며칠 쉰 만큼 일 열심히 할 테니까 대리님이 잘 이끌어주세요.”
“선아 씨는 다친 후에 어쩐지 컨디션이 더 좋아진 거 같아 보여. 예전보다 더 의욕적인 거 같고.”
선아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눈길로 신유미 대리를 바라보았다.
지난 삶에서 오래 회사를 다니지 못했다. 회사를 떠난 이후엔 원래부터 친분이 있었던 도진을 제외한 팀원들과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직원들과 친분을 유지했더라면 재혁과 희진의 불륜을 미리 눈치챘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적어도 두 사람의 불륜을 까맣게 모르는 채 바보같이 살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꼭 그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난 삶에서 자신이 놓친 모든 것들이 아쉬웠다.
“저번 주에 못 한 일, 몰아서 할 테니까 일 많이 많이 주세요. 대리님.”
“결혼 준비도 정신없을 건데.”
“결혼 준비는 회사 밖에서 해야죠. 여기 안에서는 HS 엔터테인먼트 직원이잖아요.”
“그럼 선아 씨-”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