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11화 (11/85)

11화. 고통

현숙을 내보낸 도진이 돌아서서 선아를 바라보았다.

“선아야.”

선아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희진과 재혁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망쳤는데……. 조금 전에 겪은 것처럼 그 일들이 선명한데…….

“선아야, 나 좀 봐.”

침대 옆의 의자에 앉은 도진은 선아의 한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네가 왜 이러는지 내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선배, 재혁 씨랑 희진이가 무슨 짓을 했냐면-”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털어놓으려던 선아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병원에서 눈을 뜬 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이곳 세상에는 세빈이도 없을뿐더러 자신은 결혼조차 한 적 없는 미혼이었다.

머리 길이나 몸매, 외모를 봐도 8년 전 스물다섯의 자신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빈이와의 일이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었다.

환상이라고 하기엔 그 삶에서 너무 많은 걸 느꼈다. 원래대로였더라면 이 나이에 알지 못했던 모정이나 사랑을 세빈이를 통해 배웠다.

세빈이를 잃은 이후부터 여기서 깨어난 지금까지도 장이 끊어지는 것보다도 더 큰 심적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 삶을 없던 일로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

자신이 원한 일은 아니었지만, 신은 그녀에게 한 번의 삶을 더 허락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선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선배.”

“응.”

“의식이 없는 동안 미래를 본 거 같아.”

“뭐?”

도진이 놀란 눈으로 선아를 바라보았다.

그 일을 ‘의식이 없는 동안 본 미래’라 말한 건 그 일에 관해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회귀, 혹은 시간여행 같은 단어가 있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자신의 말에 신빙성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물론 꿈에서 미래를 보았단 것조차도 이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선아 나름대로는 가장 설득력 있는 표현을 골라 한 말이었다.

“선배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에 나는 불행해. 재혁 씨와 희진이로 인해서…….”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그런 행동을 한 거야?”

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은 진지한 얼굴로 선아를 바라보았다.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 깃 위에 얼굴에 고심하는 흔적이 서렸고, 꽉 다물려 닫은 입매로 인해 남성적인 선이 더욱 도드라졌다.

“선아야. 그렇다고 다짜고짜 사장님께 이혼하라고 종용한 건 잘못된 행동인 것 같아.”

“…….”

“네가 본 미래에서 불행의 원인이 되는 시발점이 있을 거 아냐. 그 일을 막는 게 우선이 아닐까?”

“선배는 내 말을 믿어?”

“응. 나는 네 말을 믿어.”

허무맹랑하다 비웃을 수도 있는 일인데도 도진의 얼굴에는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얼굴을 마주한 선아는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도진은 과거의 사람이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모르는데도 너를 믿는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미래의 그와 너무도 닮아서 감정이 추슬러지지 않았다.

“나도 정말 내가 미친 것 같아….”

이곳에서 눈을 뜨고 나니 자신만 바보가 된 듯했다.

지난 삶에서 세빈이와 자신의 삶이 너무 안타까운데도 설명할 길이 없으니 더욱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데 도진이 그녀의 말을 믿는단다.

그 말에 안심이 되어서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들 눈에 내가 미친 사람으로 보일 거라는 거 알아….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것 같다는 엄마의 말, 나도 이해는 해. 다 이해되긴 하는데…… 근데 내가 본 것들이 허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미래의 삶에서도 도진은 선아의 곁에 유일하게 남은 지인이었다.

어린 나이에 한 결혼과 출산. 또래들보다 일찍 육아를 하게 되면서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아픈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남들처럼 외출도 자유롭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예민해졌다. 그때의 선아는 새끼를 품은 짐승처럼 선아는 항상 날이 서 있었다.

자신이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 누군가가 몸이 성치 않은 세빈이를 괴롭힐 것 같았다. 그런 선아를 보면서 재혁은 유난스럽다고 타박했다.

그는 늘 선아에게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서 유세를 한다고 타박했고, 술에 취했을 때면 선아가 세빈이에게 장애를 안긴 것이라며 원망했다.

세빈이가 의료사고로 장애를 얻은 걸 알면서도 그저 그녀가 괴롭길 바라는 마음에서 잔인한 말을 했다.

희진과의 외도를 알기 전까지만 해도 선아는 그 또한 세빈이의 장애가 마음이 아파서 그럴 거라고, 본심은 다를 것이라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세빈이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다른 아이를 낳으면 된다는 말 따위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삶의 유일한 지인. 아빠가 필요할 때마다 도진은 기꺼이 휴가를 내고 세빈이의 옆에 있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빈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해주었다.

“선배가 믿어줄 줄 알았지만…… 내가 하는 이런 황당한 말에 아무렇지 않게 고갤 끄덕일 줄은 몰랐어….”

“네 말 정말로 믿어. 그렇지만 선아야, 너 스스로 지금 너의 행동이 황당하다고 했듯이 다른 사람들 눈에 네 행동이 황당해 보일 거야. 사장님 입장에선 너뿐 아니라 남편분까지 걸린 일이니 더욱 그럴 것이고.”

“…….”

“일단은 네가 본 그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말이야. 좀 더 차분하게 미래를 바꿀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게 어때?”

이보다도 자신이 더 비루하던 때, 자신의 곁에 있었던 유일한 지인.

세빈이에게 많은 것을 해주었던 사람. 그랬기에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신뢰할 수 있었다.

“응. 선배. 그렇게 할게.”

그의 말을 들은 이후에야 선아는 이 삶에서의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자식을 잃은 괴로움에 무엇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제야 자신을 보던 엄마의 눈빛이 떠올랐다.

엄마 또한 자식을 가진 부모였다. 자신이 세빈이의 아픔에 고통스러웠듯이 지금 자신을 보고 엄마도 상처받고 있었다.

“선배. 혹시 우리 엄마랑 같이 밥 좀 먹어줄 수 있어?”

“당연하지.”

“그럼 나가서 우리 엄마랑 같이 밥 좀 먹어줘, 선배. 그리고 식사 후엔 엄마 좀 집에 모셔다드리면 좋겠어.”

“너는?”

“나는 혼자 생각을 정리해봐야 할 것 같아.”

“너도 다쳤는데 간호를 받아야지.”

선아는 고개를 젓고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차분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부탁할게, 선배.”

부탁이라는 말이 도진을 움직였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선아를 바라보던 그는 이내 알겠단 말을 남기고는 병실을 떠났다.

***

침대에서 일어난 선아는 병실 창문을 열었다.

한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더운 실내공기를 몰아내고 순식간에 병실을 찬바람으로 채웠다.

뺨에 시린 겨울 공기가 닿았다. 정신이 조금은 드는 듯했다.

선아는 어스름한 겨울밤을 올려다보면서 도진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나는 네 말 정말로 믿어.’

그는 자신의 말을 믿는다고 했다. 꿈에서 미래를 보았단 그 황당한 말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믿어주었다.

‘너 스스로 지금 너의 행동이 황당하다고 했듯이 다른 사람들 눈에 네 행동이 황당해 보일 거야. 사장님 입장에선 너뿐 아니라 남편분까지 걸린 일이니 더욱 그럴 것이고.’

그의 말이 맞았다. 미래를 본 사람은 저 하나뿐인데, 다른 이들은 갑작스럽게 변한 자신의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엄마는 혼이 다 빠진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새아빠와 사이가 좋았으면서 초저녁 때는 이혼하라고 난리를 쳤으니 당연했다.

엄마는 새아빠를 사랑하고 있었다. 남자에게 배신을 당해 미혼모가 되었던 엄마에게 찾아온 늦은 사랑이 지금의 새아빠였다.

우연히 새아빠를 만나서 재혼하게 되기까지 엄마는 꼭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모습이었다.

재혼을 반대하지 못한 건 여배우로 살다가 미혼모가 되었던 엄마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는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선아도 새아빠를 좋아하고 있었다. 선아는 아빠와의 기억이 없었다. 어린 시절 앓기라도 하면 홀로 저를 키우던 엄마는 전전긍긍했었다.

새아빠의 관심과 애정이 선아가 남자에게 느낀 첫 온기였다.

그러나 새아빠에 대한 마음과 별개로 희진은 죽어도 용서할 수 없다.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건 희진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재혁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던 그 모습이 뇌리에 선명했다.

“이제 다시는 안 당해.”

선아의 눈빛에 독기가 차올랐다.

‘네가 본 미래에서 불행의 원인이 되는 시발점이 있을 거 아냐. 그 일을 막는 게 우선이 아닐까?’

선아는 도진의 말대로 이번 삶만큼은 이전 삶처럼 바보처럼 당하진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간접 조명을 켜둔 병실을 눈으로 훑었다.

침대 한쪽에 자신의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핸드폰을 집어 든 선아는 병실 소파에 앉아 메모장을 켰다.

이전 삶에서 희진의 클라우드를 보았다.

이전 삶과 현재의 시간이 8년이나 벌어져 있지만, 실상 그 클라우드를 본 건 며칠 전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 본 것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선아는 핸드폰을 쥔 채 클라우드에서 보았던 사진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대학 졸업사진으로 보아 그들은 대학 때부터 연애하던 사이였다. 자신을 만나기 이전에 그 둘이 연애를 했든 더한 것을 했든 하는 건 관심이 없다.

선아가 관심 있는 것은 지금부터 일어날 일들이었다.

클라우드에 저장한 사진은 날짜별로 정리돼 있었다. 사진 파일이 생성될 때의 정보로 자동 정렬된 것이었다.

날짜까지 하나하나 다 기억할 수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때 본 것들만으로도 그 둘이 앞으로 할 일을 대략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재혁의 삶에 선아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재혁이 입은 옷과 셔츠, 시계와 넥타이 같은 것은 다 선아가 고른 것이었고, 촌티를 벗지 못한 재혁을 도회적인 이미지로 변화시킨 것 또한 선아의 공이었다.

선아는 핸드폰 메모장에 이전 삶에서 보았던 클라우드 속 사진들을 하나하나 적어 내렸다.

세빈이의 출산처럼 날짜가 기억나는 일은 날짜를 적었고, 그게 아니라면 재혁의 옷차림이나 머리 스타일, 앞뒤로 보았던 사진들을 통해 시기가 언제인지를 떠올리며 메모했다.

시간과 함께 장소도 최대한 구체적으로 적었다. 두 사람 모두 서울에서 출퇴근하고 있었고,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는 재혁의 업무 특성상 그들의 행동반경은 넓지 않았다.

두 사람의 불륜이 선아가 아는 장소 내에서 이루어졌음에도 그들을 의심하지 못한 건, 희진이 새아빠의 딸이란 점도 있었고, 사장과 사장의 비서라는 직책이 항시 붙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습게도 남편에게 희진을 붙였던 게 그녀였다. 희진이 꼼꼼하고 사려 깊다고 믿었기에, 애를 보느라 남편을 챙기지 못하는 자신을 대신해 남편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다.

핸드폰 메모장에 자신이 본 것을 기록하는 선아의 손놀림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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