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말캉한 살 @AW
병실에서 나온 희진은 정신이 빠진 얼굴로 재혁을 바라보았다.
선아가 얼마나 세게 잡아 뜯었는지 그의 양복 팔이 뜯겨 있었다.
“재혁 씨, 괜찮아……?”
재킷 봉제선 사이로 하얀 셔츠가 보였다. 어두운색 재킷과 대비되어 그의 몰골이 더욱 엉망으로 보였다.
뒤따라 나온 현숙이 병실 문을 닫았다.
-아악! 아아악!
병실 밖으로도 선아가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희진아, 괜찮니?”
현숙은 먼저 희진의 안부를 물었다.
재혼한 지 2년이 되었고 희진을 소개받은 지는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남편의 딸이긴 해도 따로 사는 희진은 현숙으로서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저는 괜찮은데…. 선아가 갑자기 왜 저렇게 변한 거예요?”
“선아가 넘어지면서 뒷머리를 찧었다고 하더니 깨어난 뒤부터 지금까지 기억에 혼동이 왔어.”
“기억에 혼동이요? 혼동이 올 만큼 충격적인 일을 겪은 적이 있나요?”
현숙이 고개를 저었다.
“트라우마가 생길 만한 일을 겪은 애가 아닌데…… 의사 말로는 다치면서 영상이나 소설로 접했던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혼동할 수도 있다고 해. 아무래도 그런 일 중 하나가 자신에게 일어났었다는 듯이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아.”
“큰일이네요. 선아가 빨리 괜찮아져야 할 텐데…….”
현숙은 봉변을 당하고도 도리어 선아 걱정을 하는 희진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빠가 새엄마를 만나서 행복해하는 모습이 좋다고, 고생만 한 아빠를 많이 웃게 해달라고 부탁한 게 희진이었다.
혹시나 성구가 새 가정을 꾸린 데 대해 상처를 받았을까 싶어 함께 살자고 제안도 해봤지만, 희진은 끝내 현숙의 제안을 거절했다.
‘저까지 함께 살면 아빠가 제 눈치 보느라 선아에게 마음껏 잘해주지 못하실 수도 있어요. 저는 아빠가 새 가정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제 걱정은 마세요. 저도 성인인걸요.’
이렇게나 생각이 깊은 아이인데…….
현숙은 선아가 이렇게 속 깊은 희진의 머리채를 잡고 흔든 사실이 못마땅했다.
현숙은 한숨을 쉬며 희진의 옆에선 재혁을 바라보았다.
“결혼 앞두고 일어난 일이라 자네가 걱정이 많겠어.”
그녀의 시선이 뜯긴 정장 어깨에 닿아 있었다. 재혁이 뜯긴 곳을 손으로 가리며 고갤 저었다.
“아닙니다. 선아는 앞으로 제가 책임지고 데리고 살 사람인걸요. 외근 중이라 소식을 선아 소식을 늦게 들었는데 저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제가 선아 꼭 원래대로 돌려놓을게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그보다도 제가 선아 곁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아무래도 류도진 팀장이 있는 것보다 제가 있는 게 나을 텐데…….”
현숙이 고개를 저었다.
“혹시 차 가져왔어?”
“네. 가져왔습니다.”
재혁은 선아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독일 유명 자동차 회사의 중형급 세단을 구입했다.
차를 사기 위해 집에 손을 벌린 것도 모자라 대출을 한도까지 끌어다 썼지만, 부잣집 딸과 연애를 하려면 그 정도는 투자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선아와 결혼하면 더 큰 것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그깟 중형 세단의 비용 따위야 결혼한 후에 선아에게 부탁하면 금방 갚을 수 있다는 게 재혁의 속셈이었다.
“희진 아빠랑 희진이 좀 집에 바래다주겠어? 가뜩이나 희진이는 선아 때문에 놀라서 택시 태워 보내기 마음에 걸려서.”
“어머님은요?”
“선아가 저런데 내가 어떻게 자릴 떠. 선아 제정신 찾는 거까진 보고 들어가야지.”
“네.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필요할 일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대기하고 있을게요. 선아에게도 진정되고 나면 연락 달라고 말 좀 전해주세요.”
“그래그래. 자네 덕에 든든해. 선아는 내가 돌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성구가 나섰다.
“여보. 아무래도 나는 선아가 걱정돼서 발길이 안 떨어져. 생전 저러지 않던 애가 저러니까…….”
“그래서 그래요. 선아가 당신한테까지 행패 부리면 어떡해. 그러면 내가 민망해서 당신 얼굴이라도 보겠어요? 괜찮아지면 소식 줄게요. 희진이 달래주고 집에서 쉬고 있어요.”
“그래도…….”
“그게 더 내 마음이 편해서 그래요.”
“그래, 알겠어.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 주고.”
“네.”
부부의 대화가 끝나자 재혁이 현숙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머님,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그래. 이쪽은 걱정 말고 운전 조심해.”
“네. 알겠습니다.”
현숙은 그들이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걸 본 후에야 뒤돌아섰다.
또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문고리를 잡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쩌자고 희진이 그 안쓰러운 애한테…….”
***
저 멀리 한남동 빌라의 외양이 눈에 들어왔다.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하는 재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수십억 원에 호가하는 집값만큼이나 외장재에 쓴 대리석도 고급스러웠다.
저 빌라의 최상층이 선아네 가족이 사는 집이었다. 다른 층도 수십억 원이 호가했지만 2층 구조로 된 최상층은 집값이 그보다도 두 배나 비쌌다.
저 집뿐만 아니라 연예계에서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HS 엔터테인먼트의 사장 딸이 선아였다.
선아와 결혼만 성사된다면 앞으로 그녀가 가지게 될 모든 것이 다 제 손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버님, 주차장까지 들어가서 내려드릴까요?”
“차 돌리기 힘들게 뭐 하러 그래. 이 앞에서 내려줘.”
“네. 알겠습니다.”
재혁은 빌라 앞에서 차를 세웠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성구가 차 문에 손을 가져가다 말고 멈추어 섰다.
“그나저나 희진이는 저녁때 뭐 할 거냐?”
“아빠가 취업할 데 알아보라면서. 학원 다닐 만한 데 있는지 볼 거야.”
“그래. 늦지 않게 들어가고.”
“알겠어. 빨리 내려, 아빠.”
희진의 채근에 성구는 차 문을 열었다. 발을 빼기에 앞서 성구는 다시 고갤 돌렸다.
“재혁아, 희진이 학원 좀 같이 알아봐 줘. 희진이가 네 말은 잘 듣잖아.”
“네. 아버님.”
“아 참. 그리고 희진아, 이번엔 뭐 하나라도 진득하게 해. 너도 새 출발 하고 싶다고 했잖아.”
“아빠 잔소리 좀 그만해.”
“알아들었을 줄 알고 간다. 희진이는 학원 알아보고 전화하고.”
성구가 내리자마자 재혁은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그의 표정은 좀 전과 다르게 딱딱하게 굳었다.
“새 출발 하고 싶다고 말했어?”
“아빠가 하도 정신 차리라고 하니까 그런 거야.”
“나는 성격 드센 윤선아 비위 맞추느라 이 고생인데, 너는 새 출발을 하시겠다?”
“나한테 오빠뿐인 거 잘 알면서 왜 그래.”
희진은 제 아빠에게 하던 것과 달리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혁은 희진의 이런 점을 좋아했다. 선아와 다르게 고분고분한 점 말이다.
처음에야 예쁘고 세련된 선아가 좋았지만, 결혼 준비를 하면서 이것저것 재고 따질 때마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게 피곤해졌다.
그런 선아와 달리 희진은 재혁의 말이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했다.
“너 요즘 용돈 많이 받지?”
“응?”
“호텔 갈 돈 있어?”
“호텔?”
선아는 혼전순결을 지키고 있었다. 짧은 연애 끝에 결혼하는 거라며 결혼식 날을 D-day로 삼은 채 일정 스킨십 이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탓에 재혁의 애가 달아 있었다. 한 여자와 이렇게 오래도록 관계하지 않은 건 선아가 처음이었다.
“호텔 갈 돈 있어, 없어?”
“나 아줌마… 선아 걔 엄마한테 용돈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돈 좀 있어.”
“내가 차 할부 때문에 이번 달은 좀 어려워서 그래. 네가 카드 좀 써.”
재혁은 결혼 준비에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둥 하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는 핸들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을 희진의 블라우스 위에 놓고는 말캉한 살을 주물렀다.
***
한참을 씩씩거리던 선아는 문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갤 들었다. 병실로 들어선 현숙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테도 달려들어 보지 그래?”
“…….”
“대체 정신머리가 어떻게 됐길래 그러는 거야? 내가 보기에 너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것 같다.”
선아는 현숙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고갤 돌려버렸다.
재혁과 희진을 보고 난 뒤로 그녀의 머릿속은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뒤죽박죽 뒤섞이고 있었다.
그 둘의 모습은 이전 삶에서 같은 일을 겪었을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과거의 삶에서도 외근을 나갔던 재혁은 선아의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오늘과 꼭 같았다.
그렇다면 세빈이의 일이 꿈이라고?
그렇다고 하기엔 세빈이의 일은 현재보다도 더 선명하게 선아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세빈이를 출산할 때 느꼈던 진통, 아이에게 첫 수유를 하기도 전 세빈이가 사경을 헤맨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의 아픔, 그리고 아이의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길 바라면서 지냈던 7년 가까운 시간.
세빈이의 향기.
세빈이 손의 보드라운 느낌, 아이의 미소까지.
“말도 안 돼. 그게 꿈이라니…. 말도 안 돼…….”
그 기억들을 선아는 꿈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선아야. 너는 지금 뇌에 혼란이 온 거야. 의사가 그러더라. 사고로 인한 뇌진탕으로 일시적으로 기억력 장애가 왔다고. 대체 어디서 무슨 소설을 읽었는지 몰라도 재혁이는 네 정혼자고 희진이는 네 가족이야. 네가 그렇게 함부로 할 사람들이 아니라고.”
현숙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선아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의 삶과 과거의 삶을 비교하고 있었다.
세빈이를 낳고 키우던 기억은 지금까지의 삶 전체와 맞바꾼다 해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행복한 기억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이 어떻게 없던 일일 수가 있나.
설사 자신이 뇌 수술을 하고 깨어났다 해도 그 기억만은 없던 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엄마, 새아빠랑 이혼해.”
한참 만에 선아가 꺼낸 말에 현숙은 기함했다.
“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새아빠랑 이혼하라고!”
선아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두 사람과의 인연은 물론 중간 다리까지도 모두 끊어버릴 것이다.
“선아야, 대체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만, 너는 지금 정도를 지나쳤어.”
현숙은 답답하다는 듯이 딸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화를 내고 난동을 피우던 선아가 급기야 이혼을 하라고 한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새아빠랑 웃으면서 인사하고 출근했어. 그런데 하루도 저물기 전에 새아빠랑 이혼하라고 난리를 피우면 내가 네 말을 따라야 하는 거니?”
재혼을 할 때 반대를 했더라면 심사숙고했겠지만, 이미 재혼을 했고 가정까지 꾸렸다. 그런데 이제 와 이혼을 하라니.
“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이건 아니지.”
“엄마, 제발 내 말 좀 들어봐.”
그때였다.
“선아야.”
도진이 선아의 말을 잘랐다.
“사장님 점심때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드시고 저렇게 계신 거야. 네가 어떤 이유로 이러는지 몰라도 일단은 진정해.”
도진은 선아의 말을 막은 뒤, 현숙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일단 식사부터 하고 오세요. 제가 선아 진정시키겠습니다.”
선아와 이야기해봐야 결론이 나지 않는다고 판단한 현숙은 뒤돌아 문을 향해 걸었다.
화가 단단히 난 그녀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한참 움켜쥐고 진정한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