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8화 (8/85)

8화. 몸의 윤곽

선아는 도진에게 잡힌 손목을 빼냈다. 그의 앞에서 시간을 끌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선아가 또다시 달려 나가자 도진도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차 갖고 왔어.”

“뭐?”

“내가 데려가 줄 테니까 내 차 타고 가. 택시 잡는 것보다 빠를 거야.”

병원 건물 앞 VIP 주차 구역에 그의 차가 서 있었다. 도진은 이 병원 이사장의 막내아들이었다.

“아파트로 갈 거면 내 차 타.”

“부탁할게. 선배.”

선아가 차에 올라타자 도진은 곧장 차를 몰기 시작했다. 따로 주차비를 정산할 필요도 없이 주차장 차단 바가 올라가고 그의 차가 대로변에 접어들었다.

선아는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거리를 눈으로 훑었다. 한겨울 무채색의 거리는 그녀가 알던 서울의 모습과는 닮은 듯했지만 달랐다.

그녀가 살던 8년 후와는 다른 디자인의 차들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개중에는 8년 후에는 단종돼 볼 수 없는 차도 있었다.

하이클래스 세단은 미래에 비해 투박한 디자인이었고, 그녀가 살던 세상에서는 활동하지 않는 연예인의 포스터가 버스 정류장에 붙어 있었다.

차는 사거리에서 신호를 받아 멈추었다. 그 옆에는 7층짜리 건물이 서고 있었다.

철근 구조가 드러난 건물은 세빈이가 재활 치료를 위해 다니던 재활병원이었다.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인 건물에 미국의 유명 재활 전문가들이 재활병원을 세운다.

여름쯤 완공될 이 병원의 재활프로그램을 통해 세빈이가 걷게 된 것이었다.

몸의 한쪽을 쓸 수 없던 아이가 걸을 수 있게 되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날을 세빈이를 안고 업고 이 길을 오갔었다.

세빈이와 함께 오갔던 거리의 풍경을 보던 선아는 문득 차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그녀는 홀린 듯이 자신의 뺨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뺨이 홀쭉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몸을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에 뚱뚱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살이 쪘었다.

그때의 그녀는 머리를 말리는 시간조차도 아까워 겨우 묶일 길이의 중단발 길이를 유지했었다.

그랬던 지금 선아의 뺨은 얼굴 굴곡이 그대로 만져질 정도로 홀쭉했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가슴 아래까지 길게 내려왔다.

선아는 창에서 시선을 떼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병원복을 입고 있었지만 넉넉한 옷 뒤로 마른 몸의 윤곽이 드러났다.

“선아야.”

“…….”

8년 전으로 돌아왔으면 당연히 제 몸도 8년 전과 같을 텐데도, 선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도진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사장님께 전화 드려. 너 따라서 내려오시다가 힘에 부치시는지 계단에서 주저앉으셨어.”

“엄마가?”

“네가 갑자기 이상해져서 많이 놀라신 모양이야. 병실 뛰쳐나온 일은 내가 해결할 테니까 너는 사장님이라도 안심시켜드려.”

도진은 한 손으로 핸들을 쥔 채 또 다른 손으로 정장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선아는 그런 도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만이 달라진 게 아니라 도진의 모습도 이전 삶과는 달랐다.

리젠트 컷의 짧은 머리, 머스크 향수, 반듯하게 차려입은 정장에 반듯한 모습은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지만, 다른 세상에서의 도진은 진중한 느낌이 강했다면 지금의 도진은 날카로운 느낌이 더 강했다.

더불어 그의 트레이드 마크 같았던 안경도 보이지 않았다.

“선배.”

“응.”

“선배 올해 몇 살이야?”

“뜬금없이 무슨 질문이 그래. 스물아홉이잖아. 엊그제 네가 아홉수라고 놀린 거 기억 안 나?”

선아의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의 핸드폰과 달리 스마트폰 초기 모델은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크기가 작았다.

정말 과거로 오게 된 걸까.

아니라고 하기엔 지금 그녀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과거와 일치했다.

***

이제 막 입주가 시작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는 포장재로 꽁꽁 감싸져 있었다.

포장재를 뜯으면 골드 빛의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드러나지만, 입주자들이 짐 옮길 일 많은 현재에는 내부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임시방편을 한 것이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니 과거의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선아는 21층 버튼을 눌렀다.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한 엘리베이터는 21층에서 문이 열렸다. 복도 타일을 접착할 때 쓴 세라픽스의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복도로 발을 디딘 선아는 자신이 알고 있지만, 자신이 알던 모습과 다른 복도를 눈으로 훑었다.

매일 오가던 복도지만 이곳 역시 선아가 살던 때와 달랐다.

항상 깨끗하게 정리해두던 복도의 한쪽에는 인테리어 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결혼 준비에 만전을 기하던 선아는 기본 인테리어에 만족하지 못하고 추가로 인테리어 시공을 했다.

시공을 마치고 업자들이 빠져나갔는지, 분진 쌓인 복도엔 발자국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다.

그 발자국 위를 걸어 2103이라 쓰인 문 앞에 선 선아는 숨을 골랐다.

결혼 후 바로 입주해서 8년 가까이 살았던 집. 지금 그 집 대문 앞에 와 있었다.

“안 들어갈 거야?”

선아는 현관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도어록이 달리지 않은 평범한 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철컥. 문 안쪽에서 잠금장치가 걸렸다.

철컥철컥 소리가 나게 연달아 문고릴 흔들어 보았지만 잠긴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열쇠 없어?”

“열쇠?”

“열쇠 받은 거 있을 거 아니야.”

“아…. 응….”

8년 후에서 온 선아보다 이 세상을 살았던 도진의 말이 더 정확했다.

가방 안으로 손을 넣어 뒤적거리니 딸랑 소리와 함께 열쇠 꾸러미가 잡혔다.

가방에서 열쇠를 뺀 선아는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았다. 아파트 시공사에서 받은 한 뭉치의 열쇠들, 현관문과 보일러실 등 보조 열쇠가 한데 뭉쳐진 열쇠 꾸러미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꺼운 열쇠를 고른 선아는 문구멍에 열쇠를 맞추어 돌렸다. 달칵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막상 문을 열었지만, 선아는 집 안엔 발을 들이지 못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그녀가 살던 세상과 다른 곳이라는 걸 눈으로 확인했다.

이 안으로 들어가서 마주하게 될 풍경이 무엇일지…….

호기롭게 여기까지 왔지만, 막상 문 안쪽으론 한 발도 디딜 수 없었다.

제발, 제발 여기에 세빈이가 있길.

이곳이 사후 세계라도 좋으니까…….

세빈아, 제발 네가 여기 있기를…….

용기를 낸 선아는 집 안으로 발을 디뎠다.

현관 앞으로 70평대 아파트의 긴 복도가 펼쳐졌다.

선아는 홀린 듯이 복도를 따라 걸었고, 이내 거실에 도착했다.

겨울 볕이 깊숙이 들어온 남향집의 거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파 테이블이 있던 자리로 달려간 선아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더듬었다.

딱 이 자리, 여기 있던 테이블에 세빈이의 유골함을 놓아두었었다.

입주 청소를 하지 않은 바닥에는 실내 인테리어 시공 당시의 먼지가 수북이 내려앉아 있었고, 선아의 손자국이 먼지 위에 선명하게 남았다.

손바닥이 까맣게 물들 때까지 바닥을 매만지던 선아는 이내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아야, 괜찮아?”

도진의 걱정스러운 말에도 선아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벽을 향해 걸었다.

세빈이의 재활 치료를 위해 설치한 봉이 있던 자리. 70cm 간격으로 타공을 해 스테인리스 봉을 설치했던 벽은 어떤 흔적도 없이 말끔했다.

선아는 봉이 있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대리석 벽 위에 까만 자국이 그림자처럼 선아를 따라 이어졌다.

벽을 손으로 쓸며 이동한 선아는 이내 침실 문 앞에 다다랐다.

집에서 가장 따뜻했던 침실. 이 침실 안에서 갓난아기였던 세빈이를 먹이고 재웠다.

몸이 건강한 아이들은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잔다는데, 세빈이는 언제나 잠들었던 자리에 그대로 누운 채로 잤고, 아침에 눈을 뜰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였다.

선아는 장애가 없는 아이들이 하는 건 다 세빈이에게 해주었다. 언젠가 세빈이가 난간이 설치된 침대를 뒹굴며 다니면서 잘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침대 가드를 설치하고, 침대를 둘러 푹신한 매트도 깔았다.

침실 한 곳만 해도 세빈이와 관련한 기억이 이렇게나 많았다.

선아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침실 문을 열었다.

역시나 세빈이와 함께 자던 침대가 있던 자리도 텅 비어 있었다.

없다.

어디에도 아이의 흔적이 없다.

“아아악!”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지른 선아는 미친 사람처럼 집 안을 뛰어다니며 화장실 문을 열어보고, 방문을 열어보고 빌트인 장을 모두 열어보았다.

집은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이 집 어디에도 세빈이의 흔적이 없었다.

세빈이는 환상처럼 그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고 있었다.

선아에게는 이곳이 8년 전이든 상상의 세계든 사후 세계든 무엇도 중요치 않았다.

몸 성치 않은 내 자식이 저승길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지 모르는데…….

내 새끼의 유골이 나 없는 세계에서 쓰레기처럼 뒹굴고 있을지 모르는데…….

세빈이가 없는 곳에서 저 혼자 잘 먹고 잘살길 바란 적은 없었다.

“아악! 아악! 아아아악!”

선아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도진이 달려와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윤선아!”

그는 선아의 손아귀에서 머리카락을 빼내었다.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선아를 품에 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선아야, 진정해, 선아야. 이러지 마.”

“선배…… 나 너무 혼란스러워, 나 너무-”

“알아…….”

“안다고? 뭘?”

도진의 품에서 고개를 든 선아가 그를 올려다봤다.

세빈이를 아껴주었던 도진이니, 혹시나 그도 세빈이에 대한 기억이 있는 걸까.

여기가 자신의 상상 속 세계이고, 그래서 도진이 나타난 거라면 이 사람도 세빈이에 대해 알지 않을까?

선아는 일말의 기대감을 실어 도진을 바라보았다.

“뇌진탕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기억에 혼란이 올 수 있다고 했어.”

“…….”

“병원으로 돌아가서 검사받자. 다친 곳이 있는지 먼저 검사받자, 선아야.”

역시나 그 또한 세빈이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다.

“선배, 미안하지만 한 곳만 더 데려다줄 수 있어?”

모두 다 세빈이를 모르는 세상이지만 선아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아이의 마지막 흔적까지 뒤져보아야만 했다.

“병원부터-”

선아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검사 같은 건 나중에 받아도 된다. 설사 자신의 머리가 돌아버린 거라도 상관없다.

세빈이는 정말 여기에 없는 것인지, 마지막까지 그걸 확인하는 게 선아에게는 제일 중요했다.

“한 곳만 더. 한 곳만 더 들렀다가 병원에 갈게. 날 좀 거기로 데려다줘. 제발, 선배.”

“알았어. 어딘지는 모르지만 들렀다가 바로 병원에 가서 검사받는 거야. 알겠지?”

“응. 그럴게. 약속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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