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4화 (4/85)

4화. 경악

HS 엔터테인먼트의 지분을 가진 새아빠가 주주들을 설득해서 선아의 행보를 막는다면 모를까. 재혁의 대표 해임과 희진의 퇴출은 사실상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희진과 재혁의 불륜을 안 이상, 새아빠는 선아의 선택을 막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도 희진은 하나밖에 없는 딸이기에 자신과 희진 사이에서 천인공노할 짓을 한 재혁을 응징하는 데 힘을 보태줄 게 틀림없었다.

사무 공간에 가까워질수록 키보드 타이핑 소리와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선아는 전략부서 앞에 잠시 멈추어 서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한때 선아도 전략부서에서 일했었고, 지금도 그녀의 동료들이 이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기에 더는 패배자 같은 얼굴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이혼을 결심한 것은 서너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어젯밤 두 사람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세빈이를 위해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진을 보고 밤새도록 숙고한 결과 이혼이 낫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알고 보니 재혁은 자신보다도 희진과 더 오랜 시간 함께했다. 그렇게 오래도록 함께한 둘의 관계가 과연 단칼에 끊어질까.

10년에 가까운 기만행위를 덮고 가정을 지키는 일은 모래성 위에 집을 짓는 격이었다.

앞뒤가 다른 이들 사이에서 세빈이를 키울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런 이들을 가까이 두기에 선아는 가진 것도, 지킬 것도 너무도 많았다.

마음을 잡기라도 하려는 듯 주먹을 꽉 쥔 채 빠른 걸음으로 사무 공간을 지나쳤다.

오늘만은 누구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기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사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왔다.

사람들에게 초라한 행색을 보이는 건 부끄럽지 않은데, 초라한 처지를 들키는 건 죽을 만큼 싫었다.

이 회사의 지분을 가장 많이 가졌으면서도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여길 떠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등 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선아야.”

도진이었다.

정신을 빼고 있던 선아는 그가 부르는지도 모르는 채, 엘리베이터의 전광판 숫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선아.”

재차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조금은 놀란 표정의 도진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아야, 뭐 하는데 이렇게 정신을 빼고…….”

“아, 도진 선배.”

“뭐야, 너 얼굴이 왜 이래?”

표정 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밤새 잠 못 이룬 흔적이 선아의 얼굴에 남아 있었다.

그제야 선아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게 된 도진은 흠칫 놀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고 선아는 손을 들어 그의 접근을 저지했다.

“도진 선배, 나중에 이야기할게.”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27층에서 멈춰 섰다. 저 멀리 사장실로 이어지는 복도를 달려오는 재혁이 눈에 들어왔다.

굳이 회사에서 그와 더 대거리하고 싶지 않았던 선아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시계를 찬 커다란 손이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들어왔다.

도진은 한 손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잡았다. 그 바람에 엘리베이터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같이 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도진이 닫힘 버튼을 눌렀고.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로비를 향해 내려갔다.

선아는 엘리베이터 전광판에서 줄어들고 있는 숫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

“그냥…….”

“어디 가는데?”

“세빈이 데리러 가려고…….”

혹시나 재혁이 세빈이를 볼모로 삼아 이혼하지 않겠다고 버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혁이 세빈이를 이용하려고 든다면 아무 잘못 없는 세빈이는 부모의 이혼 과정에서 상처를 받을 것이다.

선아는 이혼 과정을 변호사에게 위임한 채 세빈이와 함께 지방에 있는 고모 댁에 가 있을 생각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에 도착한 선아는 도진에게 인사하고 출입 게이트를 나서려 했다. 그러자 도진이 선아의 앞을 막아섰다.

“너 지금 운전할 정신 없어 보인다.”

그의 말이 맞았다. 사실 선아는 무슨 정신으로 이곳에 왔는지, 세빈의 유치원까지 운전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나도 세빈이한테 볼일 있어.”

“선배가 무슨 볼일이 있다고.”

“오늘 뮤지컬 공연 못 봤으니까 다음 약속 잡아야지….”

“그런 건 전화로 해도 되잖아.”

“대신 운전해줄 겸, 세빈이 얼굴도 보고 겸사겸사.”

이곳까지 차를 끌고 오는 게 곤욕이었기에 선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할게, 선배.”

***

“키움반 이세빈 데리러 왔습니다.”

유치원에 도착한 선아는 인터폰으로 세빈이 하원을 알린 후, 정문 앞 놀이터에서 세빈이를 기다렸다.

한겨울의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파랗게 도색한 그넷줄 너머로 보이는 회색빛 하늘이 유독 쓸쓸해 보이는 날이었다.

세빈이는 항상 저 그네를 타고 싶다 했지만, 미끄럼틀, 시소와 다르게 그네는 한쪽 몸의 균형만으로는 탈 수 없었다.

값비싼 재활 치료와 아이의 노력 덕에 느리게라도 걸을 수는 있게 되었지만, 마비된 오른손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선아는 자신의 이혼 결정이 세빈이에게 또 다른 아픔을 만드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뭐든 제일 좋은 걸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기에 미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하원 준비를 마치고 나온 세빈이가 느린 걸음으로 선아를 향해왔다. 해맑게 웃으면서 왼손을 흔드는 세빈이를 보자 마음이 울렁거렸다.

“어쩌면 저렇게 널 빼다 박았을까.”

도진의 말대로 세빈이는 재혁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장애아인 세빈이에게 재혁이 정을 주지 않을 땐 그를 닮지 않아서인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아빠이기에 재혁을 흠모하는 세빈이가 선아는 늘 안타까웠다.

“도진 선배, 선배는 그만 들어가 봐. 나는 세빈이랑 따로 갈 데가 있어서…….”

아이를 보니 괜스레 눈물이 돌기에 한 말이었다.

“그래, 알았어. 세빈이한테 인사만 하고 갈게.”

선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도진은 순순히 그러겠노라 말했다.

“엄마아! 삼초온!”

세빈이가 두 사람의 앞에 서자 도진은 커다란 손으로 세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뮤지컬 못 보게 된 것 때문에 아쉬워할 것 같아서 약속 새로 잡으려고 왔지.”

“엄마가 아파서 그런 거잖아. 나는 하나도 안 아쉬워, 삼촌.”

엄마가 아프단 말에 도진은 선아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세빈이를 바라보았다.

“착하네, 우리 세빈이.”

“헬로 로봇 뮤지컬 다시 구해줄 거지?”

“그럼. 이번엔 급하게 표를 구하느라고 자리가 별로였는데, 다음번엔 제일 앞자리로 구해줄게.”

“우와, 정말?”

“약속할게.”

도진은 왼손만 쓸 수 있는 세빈이에 맞춰 자신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세빈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그의 왼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감았다.

“삼촌도 같이 갈 거지?”

“당연하지. 세빈이 캠핑 갈 때도, 운동회 때도 삼촌이 같이 갔잖아.”

그의 말대로 도진은 아빠의 역할이 필요한 날마다 바쁜 재혁을 대신해주었다.

양평의 캠핑장까지 와서 텐트를 쳐 주고 돌아갈 정도로 재혁은 세빈이를 예뻐했다.

선아는 그런 그에게 늘 감사했고, 세빈이는 도진을 남자로서 동경했다. 도진처럼 뭐든 잘하는 어른이 되는 것이 세빈이의 꿈이었다.

“그나저나 내년이면 세빈이가 삼촌만큼 크겠다.”

“진짜?”

도진의 말에 세빈이는 눈을 반짝 빛냈다.

대화가 길어질 조짐에 선아는 이쯤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끊어야겠다 생각했다.

당분간 지방의 고모 댁에서 지낼 생각이라 챙길 것도 많았고, 변호사를 지방으로 불러 면담해야 했기에 약속도 잡아야 했다.

“세빈아, 오늘 우리 할 일 많은데, 뮤지컬 관련해서 계획 세우는 건 전화 통화로 할까? 엄마가 삼촌이랑 통화하게 해줄게.”

“싫어.”

말 잘 듣는 세빈이가 어쩐 일인지 선아의 말에 거부 의사를 보였다. 아무래도 도진과 뮤지컬을 보지 못한 게 많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삼촌, 나랑 좀 더 놀면 안 돼?”

도진도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선아의 얼굴빛이 좋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 삼촌이 회사에서 일이 있어. 세빈이 얼굴 보고 가려고 잠깐 엄마 따라온 거야.”

“세빈아, 다음번에 삼촌이랑 오래 놀게 해줄 테니까 얼른 인사하자, 응?”

“치이….”

선아의 채근에 세빈이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마지못해 도진에게 인사를 건네는 아이는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삼초온. 다음에 우리 집에도 놀러 와야 해. 삼촌이 구해준 헬로 로봇 큐브 있잖아. 세빈이 이제 그거 되게 잘해. 한 손으로도 큐브 돌려서 헬로 로봇 주인공 찬이처럼 할 수 있어.”

“와, 그럼 우리 세빈이도 백악기 시대로 이동도 하고, 미래로도 갈 수 있는 거야?”

“응. 그러니까 꼭 놀러 와. 알겠지?”

아쉬움 때문인지 세빈이의 말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도진은 세빈이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한번 약속했다.

“그래. 꼭 놀러 갈게.”

세빈이는 도진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선아는 세빈이의 손을 붙잡아 끌었다.

“선배 운전해줘서 고마워.”

“나 오늘 휴가 써놔서 시간 많은데 몸 안 좋으면 더 운전해줄 수 있어.”

“아니야. 괜찮아.”

사실 오래도록 알고 지낸 도진에게 자신의 처지를 들키는 것이 부끄러웠다. 더군다나 더 이야기하다가는 아이의 유치원 앞에서 눈물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갈게. 선배.”

선아는 도진에게 인사한 후 세빈이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세빈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조수석 안전띠를 매주고 시동을 켰다.

짙게 유리 코팅을 한 차라 안이 보일 리 없는데도 도진은 자리에 서서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아는 그에게서 눈을 떼고 운전을 시작했다.

유치원 앞 어린이 보호 구역은 한산했다. 시속 30km가 안 되는 느린 속도로 어린이 보호 구역을 빠져나와 대로에 접어들었다.

“나 삼촌이랑 더 놀고 싶었는데…….”

1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한 선아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면서 세빈이를 바라보았다.

“다음에. 다음엔 진짜로 오래 놀게 해줄게.”

아빠로부터 정을 받은 적이 없는 세빈이는 유독 도진을 좋아했다.

“엄마 초록 불.”

“아. 응.”

세빈이의 말대로 신호가 바뀌었기에 선아는 좌측 방향지시등을 켠 채 찻길을 따라 좌회전을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어… 엄마!”

세빈의 다급한 목소리에 좌회전을 하던 선아가 조수석 쪽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시선이 창밖에 닿아 있었다.

아이를 따라 조수석 창을 바라본 선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반대편 직선 차선에서 커다란 트럭이 신호를 위반한 채 선아의 차로 달려들고 있었다.

“엄마아!”

트럭은 순식간에 모자가 탄 차를 들이박았다.

콰앙! 고막이 터질 정도로 커다란 소음과 함께 조수석 쪽의 좌석과 아이의 몸이 선아에게로 밀려왔다.

“아, 안, 안 돼애…….”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이 전신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선아는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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