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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드는 밤-3화 (3/85)

3화. 이혼 통보

선아가 대표실 문고리를 쥐고 돌리려고 하는 그 순간, 안쪽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문고리를 놓은 선아는 사장실을 나오는 이를 바라보았다.

선아와 달리 곱게 꾸민 희진이 그 안에서 나오다 말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

선아를 마주칠지 몰랐던 그녀의 눈에 의아함이 떴다가 사라졌다.

“어머, 선아야.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희진은 눈을 반달로 접으며 선아에게 말을 붙였다.

생글거리는 그녀의 얼굴은 밤새 잠 한숨 못 잔 선아와 달리 꽃처럼 고왔다.

“내가 못 올 데 왔어?”

“못 올 데라니. 연락이라도 줬으면 점심 일정 비워놓으려고 했지.”

선아는 아무 말 없이 희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빈이가 태어나고 7년. 선아는 가진 게 있어도 누리고 살지 않았다.

아픈 자식을 둔 엄마는 죄인과 같은 심정으로 산다고 하는데 선아의 삶이 그랬다.

몸이 불편한 세빈이를 누구에게도 맡기지 못했고, 아이와 관련된 일은 모두 다 제 손으로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세빈이를 안아서 옮겨 주어야 하는 일이 잦았기에 그녀는 늘 면으로 된 옷만 입었고, 아이에게 좋지 않을까 봐 색조 화장도 자제했다.

세빈이가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서 모든 음식을 직접 만들었고, 남은 음식을 처리하다 보니 결혼 전보다 몸무게도 20kg이나 늘어났다.

운동할 시간도 없었다. 또래들과 자유롭게 어울리지 못하는 세빈이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24시간을 아이 곁에서 함께 지냈다.

선아가 그렇게 시든 꽃처럼 저무는 사이 희진은 만개해 있었다.

서류철을 든 손의 손톱에는 반짝이는 파츠가 붙어 있었고, 서류철을 안은 가슴은 선아와 달리 탄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선아를 의아한 눈으로 보던 희진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아, 참, 선아야. 너 혹시 내 핸드폰 못 봤니?”

선아는 자신을 떠보는듯한 희진의 물음에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키는 비슷했지만, 10cm가 넘는 하이힐을 신은 희진의 눈은 그녀의 눈보다도 높이 있었다.

“네 핸드폰?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응?”

“어젯밤, 우리 집에 왔었나 봐?”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잠시 뭘 착각했었나 봐.”

희진은 뒷말을 얼버무리면서 선아에게 사장실로 들어가는 길을 내주었다.

“재혁 씨 안에 있어. 들어가서 이야기해.”

선아는 대표실 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책상 옆에 선 재혁은 창문 쪽을 바로 보고 선 채 허둥지둥 넥타이를 고쳐 매고 있었다.

황급히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듯한 모습에 선아는 참지 못하고 날 선 말을 뱉었다.

“둘이 뭐라도 했어?”

그 말에 재혁은 헛기침을 뱉으며 뒤돌아섰다.

“뭐라도 했냐니. 내가 처제나 다름없는 희진이랑 뭘 하겠어.”

선아는 희진을 지나쳐 사장실 안에 들어섰다.

“근데 왜 그렇게 옷을 고쳐 입고 있어?”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기척이 들려왔다. 두어 발자국 만에 멈추어 선 선아는 문이 닫히기 전에 희진을 불러세웠다.

“정희진.”

그녀의 부름에 희진은 문을 빼꼼히 열고 사장실 안쪽을 들여다봤다.

“응? 나 불렀어?”

“여기 너 말고 다른 정희진이 또 있니? 너도 잠깐 들어와.”

“아……, 응.”

선아의 말투가 이상함을 느낀 걸까. 희진은 대표실 앞에서 마주쳤을 때와 달리 굳은 얼굴로 사장실 안에 들어섰다.

“세빈 엄마. 연락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이야? 세빈이는 어쩌고……?”

선아는 돌아서 재혁을 응시했다.

“내가 못 올 데 온 거야?”

“못 올 데 오긴. 당연히 올 수야 있지만…….”

그는 눈에 띄게 선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전이라면 그가 왜 이러는지 의아했겠지만, 전후 사정을 알고 나니 불륜남이 아내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재혁 씨, 요즘 만나는 여자 있어?”

선아는 굳이 돌려 묻지도 않았다.

“선아야, 그게 무슨 소리야!”

재혁이 펄쩍 뛰었다. 그의 모습이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어젠 어디서 잤는데?”

“어제 회식 마치고 호텔 사우나 들렀다 가려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어. 도저히 집에 갈 정신이 아니라서 룸 잡아서 잤고.”

“그래?”

“그럼. 나한테 여자가 너 말고 어디 있어. 너도 알잖아. 나한테는 너랑 세빈이가 전부인 거.”

희진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선아야, 재혁 씨가 어떤 사람인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고 그래…….”

선아는 미간을 좁히면서 희진 쪽으로 고갤 돌렸다.

“내가 재혁 씨에 대해 잘 안다고?”

“그럼, 당연히 네가 와이프니까 가장 잘 알지…….”

어제 클라우드로 확인해본 바로는, 희진은 자신보다도 더 오래 재혁을 만나왔다.

선아가 재혁을 만난 건 결혼 전 몇 개월이 전부였지만, 희진은 그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부터의 연인이었다.

햇수로 따져도 희진이 더 오래 재혁을 만났다. 세빈이를 낳은 뒤에는 재혁과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었으니 결혼 이후에도 재혁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것 또한 그녀였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그런 말을 하다니…….

“내가 보기엔 희진이 네가 나보다 더 재혁 씨를 잘 아는 거 같은데.”

“선아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선아는 희진을 말을 더 듣지 않은 채 재혁의 업무용 책상 앞까지 걸어갔다.

그녀는 ‘사장 이재혁’이라 쓰인 명패를 손으로 쓰다듬다가 이름이 책상 바닥에 깔리도록 명패를 뒤집었다.

탁!

“선아야……?”

희진과 재혁은 미묘한 시선으로 뒤집힌 명패를 바라보았다.

선아는 그 두 사람 보란 듯이 뒤집은 명패 위에 소형 녹음기를 올려놓았다.

며칠 전,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가면서 소파 쿠션 사이에 소형 녹음기를 껴 두었다.

보모나 가정 교사를 고용하는 엄마들은 종종 집 안에 소형 녹음기를 설치해두곤 했다. 선아의 경우는 세빈이의 몸이 불편하기에 더욱 예민하게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세빈의 가정 교사가 오는 날이었는데, 혹여나 자신이 없는 사이 가정 교사가 아이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할까 싶어 소형 녹음기를 설치해두었다가 회수하는 걸 깜박 잊고 있었다.

며칠 간이나 잊고 있던 녹음기가 이렇게 쓰일 줄이야.

선아는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세빈이 깨면 뭐.

녹음기에서 선명한 음질로 녹음된 재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몸도 제대로 못 쓰는 놈이라니……. 솔직히 세빈이만 저렇게 안 됐어도 훨씬 행복했을 거야. 세빈이 저렇게 된 뒤로 선아와도 관계가 틀어지고…….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재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지 버튼을 누른 선아는 차가운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세빈이와 내가 전부인 남자가 세빈이를 두고 이런 말 할 것 같진 않은데……. 재혁 씨는 어떻게 생각해?”

“선아야, 그건!”

재혁이 선아에게로 다가오려고 하자,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그러면서 다른 손으로 또다시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잠깐, 재혁 씨.

-조금만. 조금만 더, 희진아.

-지금은 아닌 거 같아. 장소가 그렇잖아.

-우리 저번에 부부 침대에서도 같이 잤잖아. 그러니까-

녹취된 음성이 흘러나올 때마다 두 사람은 사색이 되어 갔다.

-그건 선아랑 세빈이가 없을 때 이야기고. 차라리 재혁 씨, 우리 호텔로 가자.

선아는 영화 감상하듯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소했다.

“내가 두 사람한테 궁금한 게 많아. 대체 내 침대에서도 하고, 어젯밤 호텔에서도 한 짓이 뭘까?”

“선아야, 오해야! 우리는!”

희진이 그녀의 옷깃을 잡자 선아는 거칠게 그 손을 쳐 냈다.

“그래, 우리겠지! 나보다 더 오래 사귄 너희 둘이니까 와이프 앞에서도 우리란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겠지!”

선아는 핸드백 안에서 액정이 깨진 희진의 핸드폰을 꺼내 녹음기 옆에 올려놓았다.

“이, 이건…….”

핸드폰을 본 희진은 경악했고, 재혁은 곧바로 바닥에 무릎 꿇었다.

“잘못했어, 선아야. 내가 잘못했어, 선아야.”

재혁은 어린아이처럼 양손을 모은 채 선아를 향해 싹싹 빌기 시작했다.

희진은 자신의 핸드폰 액정이 깨져 있는 걸 본 후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는지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짜냈다.

“이, 이거 불법이야……. 이렇게 남의 사생활 엿보고 정, 정보 빼돌리는 거 불법-”

선아가 그 말을 잘랐다.

“불법? 그럼 너희는 간통이 합법이라서 그 짓거릴 한 거야? 그것도 10년이 넘도록?”

“그, 그건…… 내가 먼저였어. 내, 내가 재혁 씨랑 먼저-”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난 재혁은 양손으로 희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야, 선아야, 나 너 사랑해. 나 가정 지키고 싶어. 세빈이랑 네 옆에서 가장으로 살고 싶다고.”

선아는 두 사람의 모습을 죽일 듯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이재혁. 너는 가정이 지키고 싶은 게 아니라 HS 엔터테인먼트 사장 자리가 지키고 싶은 거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선아는 더 듣지도 않은 채 재혁의 말을 잘랐다.

“이혼해, 우리.”

“뭐?”

이혼 통보 앞에서 재혁은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결혼 생활 내내, 아니 그 전부터 바람피워 온 남자랑 살겠어?”

선아는 넋이 나간 두 사람에게 마지막 통보를 남겼다.

“그리고 너희 둘. 해고통지 진행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미리 짐 빼두면 더 좋고.”

선아는 그 통보를 끝으로 뒤돌아섰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몰아친 탓이었을까. 재혁과 희진은 어젯밤 선아가 그랬듯 넋 나간 표정으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선아는 두 사람을 두고 사장실 밖으로 나왔다.

쾅 소리와 함께 사장실 문이 닫혔다.

***

사장실에서부터 전략부서 사무실로 이어지는 공간 사이엔 각각 다른 크기의 회의실이 이어졌다.

안이 들여다보이는 유리 벽에 무감한 얼굴로 걷는 선아가 비쳤다.

품이 넓은 옷에 대충 올려 묶은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의 선아는 흔한 아줌마일 따름이었다.

동네를 걷다 보면 한 번쯤 마주칠 법한 아줌마. 결혼 이후 선아의 삶을 설명하는 가장 쉬운 말이었다.

윤기 흐르던 긴 머리도, 빛나는 피부도, 늘씬한 몸매도 그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선아에겐 세빈이뿐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은 후, 세빈이의 엄마라는 정체성으로만 살았다.

그것이 세빈이에게도 재혁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진 게 많아도 가진 내색을 하지도, 누리지도 않았던 것은 혹시나 누군가 재산을 빌미로 세빈이에게 해를 끼칠까 두려워서였다.

더불어 HS 엔터테인먼트의 주식 23%를 가진 대주주임에도 권리 행사를 하지 않았던 것은 회사 사장인 남편의 행보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아의 의결권은 항상 남편이 원하는 방향으로 쓰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대주주의 권리로 긴급회의를 소집할 생각이다.

대주주의 막강한 권한으로 재혁을 해임하고 희진을 내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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