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기만당한 삶
핸드폰을 작동시키자 잠금 패턴이 화면에 떴다.
희진의 잠금 패턴을 알 리 없는 선아는 아홉 개의 점 위에 무작위로 선을 그었다.
[패턴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잠금 패턴이 틀렸다는 메시지가 떴다.
선아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핸드폰의 잠금을 풀려고 시도했다.
잘못된 패턴을 입력했다는 메시지가 연달아 뜬 뒤, 핸드폰에 록이 걸려 버렸다.
[30초 후에 다시 시도하세요.]
30초 후에 새로운 패턴으로 그려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1분 후에 다시 시도하세요.]
[3분 후에 다시 시도하세요.]
몇 번을 해보아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5분 후에 다시 시도하세요.]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 순간에도 남편과 희진이 호텔 방에서 뒹굴고 있을 텐데…….
만약 그러다가 두 사람 사이에 아이라도 생긴다면……?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선아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세빈이에 대한 재혁의 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세상에 없으니, 남편도 당연히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퇴근할 때마다 피곤한 얼굴로 세빈이를 대해도 일이 힘들어서일 뿐이라고 여겼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몸도 제대로 못 쓰는 놈이라니…….’
그러나 그 믿음은 재혁의 말과 함께 와장창 깨져버렸다.
‘솔직히 세빈이만 저렇게 안 됐어도 훨씬 행복했을 거야. 세빈이 저렇게 된 뒤로 선아와도 관계가 틀어지고…….’
재혁이 마음이 저런데 둘 사이에서 아이라도 생긴다면?
그렇다면 세빈이와 자신은 버려지는 걸까.
저야 그렇다 치더라도 몸이 온전하지 못한 세빈이에게 또 다른 아픔을 만들어줄 수는 없었다. 아직 어린 세빈이에게는 아빠라는 울타리가 필요했다.
선아는 절망스러운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까만 액정에 그녀의 표정이 고스란히 비쳤다.
액정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그러던 중, 그녀의 머릿속에 세빈이의 말이 떠올랐다.
‘엄마, 내 핸드폰도 아빠랑 똑같은 모양으로 잠가주면 안 돼?’
올여름, 세빈이에게 핸드폰을 사 주었다.
몸이 불편한 세빈이가 초등학교에서 불이익이나 따돌림을 당할까 싶어 남들보다 일찍 핸드폰을 사 주고 사용법을 가르쳤다.
세빈이는 아빠 핸드폰 잠금 패턴을 기억하고 있었고, 첫 핸드폰에 아빠와 똑같은 잠금 패턴을 설정해달라 했었다.
“혹시…….”
때마침 핸드폰의 록이 풀리고, 잠금 패턴을 입력하는 화면이 떴다.
선아는 조심스럽게 핸드폰 위에 재혁과 세빈이가 쓰는 패턴을 그렸다.
“!”
잠금이 풀리고 화면이 전환되었다.
희진도 남편과 같은 패턴의 비밀번호를 쓰고 있었다니…….
선아는 바뀐 화면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 핸드폰 안에 그들의 불륜의 증거가 있을 것만 같아서 가슴이 무서우리만큼 쿵쿵 뛰기 시작했다.
증거를 잡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증거로 협박을 해서 두 사람을 찢어놓아야 할까.
만약에 협박이 통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남편이 희진이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어서 세빈이를 버리고 집을 나간다고 하진 않을까.
불길한 생각에 핸드폰을 조작하는 선아의 손길이 빨라졌다.
“어…… 이게 무슨…….”
그러나 예상과 달리 사진첩에서는 두 사람 외도에 대한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문자함과 SNS를 다 뒤져도 마찬가지였다.
-대표님. 오늘 저녁때 K본부 예능국 국장과 미팅 있습니다.
-네. 시간이랑 참석 인원만 확인해줘요.
혹시나 자신이 모르는 암호나 사인이 있을까 봐 눈을 씻고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업무 관련한 내용 외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럼 내가 본 건 뭐냐고…….”
선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희진의 핸드폰 배경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배경화면 끄트머리 쪽에 있는 클라우드 앱이 눈에 띄었다.
‘혹시…….’
클라우드 앱을 손끝으로 누르자 곧바로 화면이 바뀌었다.
그리고 잠시 후.
클라우드 메뉴에서 이미지 폴더를 클릭한 선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핸드폰을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이게 무슨…….”
탕탕탕탕. 핸드폰이 커다란 소릴 내며 거실 바닥 위를 뒹굴었다.
“내가……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선아는 덜덜 떨리는 자신의 빈손을 바라보다가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
바닥으로 떨어진 핸드폰 액정은 방사형으로 금이 가 있었다.
깨진 액정이 꼭 자신의 마음 같아서, 선아는 한참 동안 숨을 고른 뒤에야 간신히 핸드폰을 켤 수 있었다.
그녀가 본 희진의 클라우드 속에는 보고도 믿기지 않는 사진들이 나열돼 있었다.
선아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잠금 패턴을 입력해 핸드폰을 켜고, 클라우드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날짜 순서로 정리된 사진에는 10년 전부터 현재까지 재혁과 희진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중 가장 오래된 사진을 실행했다.
사진 속, 같은 대학을 같은 해에 졸업한 두 사람은 학사모를 쓴 채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재혁이가 희진이 대학 선배잖아. 게다가 재혁이가 희진이 입시 과외를 해줘서 둘이 친해.’
새아빠에게 들어 두 사람이 같은 학교 동문인 건 알고 있었지만, 문제의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은 단순히 친하기만 한 사이가 아니었다.
재혁은 희진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선아는 손가락을 움직이며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선아의 손가락이 멈춘 건 8년 전쯤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에서였다.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보이는 곳에서 식사하고 있었다. 식당 종업원이 찍어준 듯 보이는 사진 속에서 희진과 재혁은 서로의 옆에 나란히 앉아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시기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재혁이 매고 있는 넥타이 때문이었다. 그 넥타이는 사내 커플이 된 후 선아가 재혁에게 선물했던 넥타이였다.
둘은 단순히 친한 대학 선후배 사이가 아니었다.
재혁과 선아가 결혼을 준비하는 틈에도 그들은 은밀한 만남을 이어왔다.
“말도 안 돼…….”
클라우드 속에는 두 사람의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기념일 이벤트, 꽃과 선물. 임신 테스트기까지…….
클라우드의 사진은 둘이 내밀한 사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게 무슨…….”
사진을 한 장 한 장 살피던 선아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갔다.
사진으로 확인한 그들의 불륜은 점입가경이었다. 결혼식 첫날밤에도 재혁은 희진과 함께 있었다.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하룻밤 묵는 호텔에서조차 그는 희진을 만나고 왔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친구가 호텔 앞으로 찾아왔다는 핑계로 희진을 만나고 온 것이다.
“대체…… 대체 무슨 의도로 나한테 이랬던 거야……. 무슨 의도로…….”
길고 긴 시간 동안 외도를 하고 있었으니 그것까진 그러려니 하더라도, 더 이해되지 않는 건 세빈이의 출산 당일 둘의 모습이었다.
세빈이의 출산 당일, 재혁은 상하이 출장 중이었다.
“이 미친 인간들…….”
첫 아이 출산을 앞두고 걱정이 많았던 선아는 당시에 재혁에게 출장을 미룰 수 없느냐고 부탁했었지만, 재혁은 중요한 출장이라며 끝끝내 일정을 강행했다.
출산 과정에서 세빈이가 의료사고를 당했을 때, 몇 번이나 남편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당시에 그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사진 속 재혁은 출장지인 상하이가 아니라 하이난에 있었다.
재혁과 희진, 두 사람은 하얀 파고라 아래 다정하게 누워 웃고 있었다.
갓 태어난 세빈이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한 채, 몸 한쪽이 마비되는 동안, 둘은 애정행각을 펼치고 있었다.
“짐승만도 못한 것들…….”
세빈이가 태어나고 7년간이나 선아는 오른쪽 몸을 쓰지 못하는 아이에게 죄책감을 지니며 살았다.
한때는 출산 당시에 곁에 있어 주지 않은 남편을 원망했지만, 아빠인 그 또한 세빈이의 장애가 슬프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그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도리어 자신을 대신해 회사를 이끌어 가는 그 덕분에 아이에게 충실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고마워했다.
그렇게 믿었던 남편이 자신을 기만하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잖아…….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심지어는 가족이라고 생각한 희진과 함께 10년이 넘도록 자신을 속여 왔다.
***
화장대 거울에 퀭한 얼굴이 비쳤다.
얼굴에 쿠션 파운데이션이라도 발라볼까 하던 선아는 이내 생각을 접고 화장품을 내려놓았다.
밤새 한잠도 못 자 수척했지만, 얼굴에 무얼 바른다고 상태가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원래 오늘은 세빈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지 않고 세빈이가 좋아하는 헬로 로봇 시즌3 뮤지컬을 보러 가기로 했지만, 도저히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세빈이에게 오늘 뮤지컬을 보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세빈아, 오늘은 엄마가 정말 급한 일이 있어. 미안하지만 헬로 로봇 뮤지컬은 다음에 보러 가자.”
“도진 삼촌이 뮤지컬 표 정말 힘들게 구한 거라고 했단 말이야.”
울상을 짓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맞아. 도진 삼촌이 힘들게 구해준 건 맞는데, 도진 삼촌은 언제든지 또 구할 수 있어. 그러니까 뮤지컬은 다음에 보러 가자. 오늘은 엄마가 너무 머리가 아파서 그래.”
“히잉…….”
세빈이는 한 달을 넘게 기다린 공연을 못 보게 되었단 말에 잔뜩 실망한 채로 유치원으로 등원했다.
웬만해서는 아이와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하지 않는 선아였지만, 오늘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 남편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희진이와 나가서 기어코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유치원 앞에서 차를 돌린 선아는 HS 엔터테인먼트 사옥으로 향했다.
강남대로의 복잡한 도로 사정에 두통이 일었지만, 입술을 꽉 깨물어가면서 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한테 직접 확인해야 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직접…….’
사옥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로비로 올라왔다. 리셉션 여직원이 선아를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모님 안녕하십니까.”
선아는 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27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복도 너머 전략본부 사무실이 펼쳐졌다.
아침 9시 30분. 출근한 지 얼마 안 된 직원들은 각 팀 파티션 근처에 모여 업무 이야길 하고 있었고, 그 소리와 전화벨 소리, 프린터의 소음, 의자 바퀴 굴러가는 소음들이 어지러이 뒤섞였다.
“어?”
그중에서도 선아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이제 막 출근해 자리에 브리프케이스를 내려놓던 도진이 눈을 크게 떴다.
30분 전 선아는 도진에게 공연 약속 취소 통보를 했다. 도진은 통보를 받자마자 회사로 출근했다.
그가 등진 창가에서 아침볕이 쏟아져 내렸다. 잠을 한숨도 못 잔 선아는 쏟아지는 볕에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도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늘 볼일이 회사 일이었어?”
선아는 도진과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두 사람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선배, 혹시 그 사람 지금 자리에 있어?”
“응. 아마도 사장실에-”
선아는 도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지나쳐 사장실로 향해갔다.
사장실 앞의 비서 데스크가 텅 비어 있었다. 재혁이 자리에 있다면 이 자리에 희진이 앉아 있어야 했다.
설마 회사에서까지 붙어먹고 있는 걸까.
“이것들이…….”
화가 난 선아가 사장실 문고리를 쥐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