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남편의 외도
한참을 칭얼거리던 아이가 품에서 잠들었다.
아이가 새근새근 숨을 쉴 때마다 아이의 가슴이 부풀었다 꺼지길 반복했다.
선아는 세빈이가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하고, 아이의 왼손에서 장난감 큐브를 빼냈다.
“이렇게 푹 잘 거면서 안 잔다고 버티기는…….”
그녀는 아이를 한쪽 팔을 뻗어 아이를 안고 아이의 옆얼굴에 코를 가져다 댔다.
일곱 살의 마지막 달을 보내는 아이. 석 달 후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될 세빈이에게는 아직도 어린아이의 풋내가 났다.
선아는 아들의 냄새를 가장 좋아했다. 온종일 아이가 먹고 어지른 걸 치우느라 몸은 고됐지만, 단잠에 빠진 아이의 냄새를 맡으면 피로가 가셨다.
그녀는 아들의 가늘고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린 후, 아이의 몸에 제 몸을 붙이고 잠을 청했다.
얼마쯤의 시간이 지났을까.
침실 밖에서 도어록 소리가 들려왔다. 한번 잠들면 쉬이 깨지 않는 선아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이가 왔나?’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꽉 닫힌 문 뒤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느껴졌다.
남편은 HS 엔터테인먼트사의 사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HS 엔터테인먼트 사주가의 유일한 자식인 선아가 회사를 이어받아야 했겠지만, 선아는 제 발로 회사를 나와 세빈이를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세빈이는 태어날 적의 의료사고로 인해 몸의 오른쪽 신경이 마비되었다.
6년이나 계속된 재활 치료 덕에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몸을 자유자재로 쓰지 못했다.
일 대신 아이의 양육을 택한 선아는 회사 동기였던 남편에게 제 자리를 양보했다.
‘오늘도 늦었네. 회식이 있었나.’
HS 엔터테인먼트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으로 국내에서 최대 규모라 손꼽히는 회사였다.
그곳 사장으로 재직 중인 남편은 한류 열풍 속에 하루하루 바쁜 나날을 보냈고, 귀가가 늦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선아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살며시 침대에서 일어나 잠옷 위에 로브를 걸쳤다.
두 발에 실내화를 꿰고 침실 문으로 다가서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문밖의 기척이 평소와 달랐다.
소리를 죽인 기척은 한 사람이라기엔 어수선했고, 남편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잠깐만.
선아는 문고리를 잡은 채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전화 통화라도 하는 줄 알았지만, 연달아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혁 씨, 이러지 마. 여기선 안 돼.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새아빠의 딸인 희진의 목소리였다.
선아와 희진은 막역한 사이였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려 할 때였다.
-괜찮아. 선아는 세빈이 돌보느라 녹초가 됐을 거야.
-그래도 여기선 아니야, 정신 차려.
‘그이가 많이 취했나.’
희진이 술 취한 재혁을 챙기는 건가 했지만, 이상하게도 문을 열 수 없었다.
-재혁 씨, 정신 차리라니까. 여기 당신 집이야.
본능이 문을 열지 말라 하고 있었다.
선아는 침실 문을 여는 대신 귀를 문에 바짝 붙이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 번만 해줘, 응? 한 번만.
‘대체 무슨 대화를 하는 거지.’
-재혁 씨, 이러지 말라니까.
‘설마…….’
침실 문 뒤에서 망설이던 선아는 침실 베란다 창으로 다가갔다.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창문을 옆으로 밀고, 거실과 이어지는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를 통해 거실로 가는 선아의 마음은 자격지심인지, 자괴감인지 모를 감정으로 복잡했다.
세빈이가 장애 판정을 받은 후, 선아는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와 달리 남편과 희진은 날로 성장하는 HS 엔터테인먼트 주축이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술을 마시는 날도 있는 것이고, 집에 있는 자신이 모르는 일로 이야길 할 수도 있는 건데, 괜한 오해를 하는 게 아닐까.
성실한 남편을 상대로 과대망상을 하는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음에도, 선아는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당장 거실을 엿봐야 한다고 그녀의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베란다를 통해 거실 앞으로 간 선아는 거실과 통하는 유리문의 틈새를 벌리고 손가락으로 커튼 끝을 옆으로 치운 채 안쪽을 훔쳐보았다.
“정신 좀 차려, 재혁 씨. 몸 좀 제대로 하고…….”
술에 취한 재혁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고, 희진인 그런 그에게 정신을 차리라 채근했다.
역시 술 취한 형부와 처제의 모습일 뿐이었다. 안심한 선아가 뒤돌아서 안방으로 가려는 그때였다.
“희진아, 희진아. 사랑하는 희진아…….”
“정신 차리고 조용히 좀 해…….”
처음엔 희진이 술 취한 재혁을 챙기는 줄만 알았다.
희진은 선아와도 가깝게 왕래를 하고 지냈을 뿐 아니라, HS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인 남편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기에 가족 모두와 친했으니까.
“선아랑 세빈이 깨서 일어나면 어쩌려고…….”
“세빈이 깨면 뭐.”
뒤돌아서려던 선아의 발걸음을 붙잡은 건 이어 나온 재혁의 말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몸도 제대로 못 쓰는 놈이라니…….”
재혁이 희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솔직히 세빈이만 저렇게 안 됐어도 훨씬 행복했을 거야. 세빈이 저렇게 된 뒤로 선아와도 관계가 틀어지고…….”
재혁의 말대로 세빈이가 태어나고 난 뒤로 부부 사이가 서먹해졌다.
선아는 출산 당시에 옆에 있어 주지 않은 재혁을 원망했고, 재혁은 아이가 의료사고로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했냐면서 선아를 탓했다.
그럼에도 부부에게 세빈이가 있기에 선아는 재혁을 이해하려고 애썼고, 가정이 굳건하다고 믿었다.
자신에게는 애정을 보이지 않아도 자식인 세빈이는 사랑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남편이 세빈이를, 세빈이의 장애를 원망하고 있었다니….
“그래, 재혁 씨 속상한 거 나도 잘 알지…….”
희진이 술 취한 재혁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잠시 뒤, 재혁은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집어넣으며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
베란다 창 커튼 뒤에서 선아는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바라보았다.
둘은 간접 조명만을 켜 놓은 거실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채 농밀한 키스를 나누었다.
단순히 입술만 부딪히는 키스가 아니었다. 재혁의 손은 희진의 블라우스 틈을 파고들어 가슴을 쥐었다.
블라우스 너머로도 희진의 가슴을 주무르는 그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비쳤다.
‘저게 무슨……!’
둘의 모습을 베란다에서 지켜보고 있던 선아는 소리가 새어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은 채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잠깐, 재혁 씨.”
키스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내 정신을 차린 희진이 재혁을 밀어냈기 때문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희진아.”
“지금은 아닌 거 같아. 장소가 그렇잖아.”
재혁은 아쉽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우리 저번에 부부 침대에서도 같이 잤잖아. 그러니까-”
“그건 선아랑 세빈이가 없을 때 이야기고. 재혁 씨, 여기서 이러지 말고 차라리 호텔로 가자.”
재혁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희진의 손을 잡으며 일어섰다.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재혁은 얌전히 희진을 따라나섰다.
넋이 나간 선아는 커튼 뒤에서 집을 나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부부 침대에서 뭘 했다고? 호텔로 간다니……. 호텔로 가서 하려는 게 설마…….’
띠리릭.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선아가 유리문을 열고 거실에 발을 들였다.
거실에 짙게 남은 술 냄새와 희진의 화장품 향이 아니었더라면 선아는 방금 본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선아는 자신의 가정에 일어난 이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언제부터…….”
아이를 챙긴다고 남편에게 너무 무신경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재혁의 말대로 세빈이가 태어나고 난 이후부터 부부관계가 서먹해졌다.
선아의 모든 관심은 세빈이에게로 옮겨갔다. 부모이기에 당연한 일이었고, 재혁 또한 자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설사 세빈이에 대한 마음이 자신과 다르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아닌 희진과는 그러면 안 되었다.
선아와는 성이 다르고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하나 희진은 새아빠의 딸이었고, 선아에게는 가족이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 선아와 희진이 관계를 알고 있는데, 저 둘이 불륜을 저지르다니…….
“안 돼, 안 돼. 두 사람이 저러면 안 돼…….”
호텔로 간 것이라면 두 사람은 이미 마음을 넘어 육체까지도 이어진 관계인 것이다.
“심각한 사이가 되기 전에 막아야 해…….”
혼란에 빠져 있던 선아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희진의 친부이자 자신의 새아빠인 성구였다.
새아빠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엄마가 뇌사 상태에 빠졌을 때도 엄마를 극진하게 간호해주었다.
아픈 세빈이를 신경 쓰느라 엄마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선아를 대신해 엄마의 임종까지 지켜 준 새아빠.
선아는 그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밤잠이 적은 새아빠는 깨어 있을 터였다.
“아빠한테 말해서 상의하고…….”
머릿속에는 하루라도 빨리 둘을 갈라놓아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둘의 불륜은 가족 모두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직 어린 세빈이에게 가정의 불화를 보일 수 없었다.
선아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핸드폰을 둔 침실로 이동하려 할 때였다.
탁, 그녀의 발치에 무언가가 걸렸다.
“?”
그녀에 발에 차인 것은 플라워 패턴 케이스를 씌운 핸드폰이었다.
핸드폰을 발견한 선아의 눈빛이 세차게 떨렸다.
그 핸드폰은 희진의 핸드폰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여기 왜…….”
키스하느라 핸드폰이 떨어진 것도 알아채지 못한 걸까.
멍하니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던 선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안에 두 사람 외도의 증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증거만 찾아 확보한다면…….”
그렇게라도 두 사람을 갈라놓고 싶었다.
8년의 결혼 생활 동안 남편을 향한 사랑은 옅어졌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할 아들을 위해 가정을 지키고 싶었다.
선아 또한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 사업가 엄마 덕에 남부러울 것 없었지만, 아빠 없는 아이라는 오명은 피할 수 없었다.
몸 건강한 자신도 그랬는데, 몸이 불편한 세빈이는 오죽할까. 선아는 아들에게 아빠를 지켜주고 싶었다.
이혼만은 안 된다.
세빈이에게만 충실하다면 외도를 저지른 남편도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다.
허리를 숙인 선아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