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아이의 미래를 위하여
모두 녹아내리고 사라져 버린 후 깨달았다.
눈사람을 보는 건 저주라는 걸.
그들은 세상의 강렬한 햇볕을 견뎌낼 수 없었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한 죄로 그들은 스러져 갔다.
세상은 그들을 이용하고 배신하고 기만했다.
단 한 번도 좋은 것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언제나 세상이 망가질까, 다른 사람들이 다칠까 걱정했다.
망가지고 다치는 건 정작 자신들인데도.
눈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답답하고 멍청한 것일까?
나는 눈사람 따위 모른 척하고 싶었다.
그냥 돈이나 벌면서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싶었다.
사실 눈사람이 보인다는 것뿐,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어릴 적 꿈처럼 그들이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냉장고를 만들어 인정사정없는 햇볕으로부터 그들을 구해 내거나 지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들이 희미하지만 아름답게 반짝이다 처연하게 녹아내리는 걸 지켜보는 일뿐.
나는 눈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척했다.
더 이상 그들의 사랑이 모욕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 * *
“안타깝고 속상하고 괴롭고… 그런 감정들이 반복되자 오히려 그들이 미워지기 시작했어요.”
저쪽 세상의 기억을 더듬는 알레스의 눈은 생기를 잃고 탁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이 당하는 걸 더 이상 참고 보기 힘들었고, 언젠가 혹시 나도 저렇게 녹아서 사라지는 건 아닐까 두렵기도 했어요. 하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외로움이었어요.”
외로움이라면 그도 끔찍할 만큼 겪었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알레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공작이 알레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포갰다.
알레스는 손등으로 따스한 온기가 퍼져 나가는 걸 느꼈다.
“너무 외로웠어요. 혼자서 그들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고, 혼자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혼자서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너무나 무섭고 외로웠어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눈사람들의 이야기를 홀로 기억하는 일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쪽 세상으로 온 뒤론 눈사람이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죠. 누가 눈사람인지.”
알레스가 말없이 공작을 바라보았다.
“이곳엔 지금껏 본 적도 없는 거대한 눈사람의 왕이 살고 있었어요.”
공작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리로 잘 왔습니다. 눈사람의 왕이면 강하고 힘도 세겠지요. 메르세데스의 설산처럼 웬만한 햇볕엔 녹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당신을 두고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약속할 수 있어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약속하겠습니다. 당신보다 꼭 하루만 더 이 세상에 머무르겠다고.”
마치 결혼 서약이라도 하는 듯한 공작의 다짐에 알레스는 얼굴이 살그머니 달아올랐다.
공작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눈사람의 왕이 보건대, 당신이 눈사람들을 지켜 주고 싶어 했고 안타까워했던 만큼, 눈사람들도 똑같이 당신을 지켜 주고 싶었나 봅니다. 당신이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 아닐까요.”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눈사람들도 눈사람지기인 내 존재를 알고 있었을까?
확인할 순 없지만 왠지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지금쯤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저는 그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가 아니에요.”
알레스가 애틋한 눈빛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당신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내 것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또 거절입니까.”
“네.”
눈사람 이야기로 한결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기에 공작은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내 곧은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난 청혼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이번엔 제가 당신께 청혼할 거니까요.”
“아닙니다. 난 언제까지고… 네?”
“카이트, 나와 결혼해 주세요.”
“아….”
“이게 나아요. 반듯한 메르세데스 공작이 문제적 이혼녀에게 청혼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겠죠. 하지만 어차피 살짝 맛이 간 여자가 누구한테든 청혼을 못 하겠어요. 카이트, 제발 결혼해 줘요.”
“…….”
“왜요? 싫어요? 뭐, 괜찮아요. 전 계속 청혼할 거니까. 인생은 여러 번 청혼할 만큼은 기니까요.”
공작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도톰한 입술이 다른 일로 바쁜 바람에.
* * *
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그들이었지만, 마치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모이자마자 회의가 한창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것을 가지고도 회의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 회의 초능력자, 회의의 달인이었다.
물론 회의 주제가 되어 도마에 오르는 사람에겐 간담이 서늘해질 오지랖이었지만.
여하튼 오늘의 회의 주제는 약간 수위가 있는, ‘공작님의 부부생활, 이대로 좋은가’였다.
메르세데스 공작과 여전히 ‘레이디 페레티’로 더 많이 불리고 있는 공작부인은 1년 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아주 간소하게 치러졌다.
지금 회의실에 모여 있는 두 가문의 측근들과 아주 가까운 지인 몇 사람만 초대한 소박한 결혼식이었다.
반대로 결혼 축하연은 제국 역사상 가장 성대하게 열렸다.
메르세데스의 전 영지민에게 1인 1치킨을 대접한 것을 시작으로 어마어마한 먹자 파티가 이어졌다.
잔치에 음식 모자란 것만큼 큰 흉이 없다는 공작부인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게 공작부인은 행여 잔치에 음식 떨어질까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지만, 그때도 측근들은 다른 걱정에 빠져 있었다.
첫날밤은 제대로 치르실 수 있을까.
그때도 지금과 같이 회의 비슷한 것이 열렸다.
「이러다 저희 전하 소박이라도 맞으시는 거 아닙니까.」
메르세데스의 세 어른 중 유일하게 기혼자인 패트릭 청매단장이 걱정스레 운을 뗐다.
「그러게 대스승께서 전하를 너무 금욕적으로 가르치신 게 아닙니까.」
이제 은퇴한 뵈커 기사단장이 마스터 현을 저격했다.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저희 아가씨도 그 방면으론 어두우신지라. 기대치가 높지는 않으실 겁니다.」
마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두 분 한 침대에서 주무시는 건 맞으시겠지요?」
밤비가 궁서체로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지금 회의장에서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혼 후 1년이 지났는데 아직 후계 소식이 없자 그간 잠잠했던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두 분 다 워커홀릭이라는 게 문젭니다. 일을 줄이셔야만 합니다.”
“두 분 다 그 말을 들을 분들이어야지요. 오늘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일을 줄이시기는커녕 새로운 일을 벌이시겠다며 공작부인께서 저희 모두를 호출한 것 아닙니까.”
“얼마나 큰 사업을 시작하시려고 우리 모두를 부르신 걸까요?”
“더 이상 일을 늘리시지 않도록 무조건 반대해야 할 겁니다.”
워커홀릭 공작 부부를 성토하는 말들로 회의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거기엔 그게 참 좋은데 어떻게 말씀드리기도 뭣하고.”
갑자기 누군가 목소리를 낮추더니 은밀하게 말했다.
“에이, 그거보다 거기엔 그거죠. 아실 만한 분이.”
“아이고 다들 알고 보니 공작 전하랑 다를 바 없이 하나같이 쑥맥들이시구만. 그건 이렇게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게 최고 아닙니까.”
“답답하네요, 답답해. 제 눈빛을 잘 읽으십시오. 이거이거, 저거 그거, 딱딱딱 팍팍팍 아닙니까.”
“차차차 아니라 팍팍팍입니까?”
“살다 살다 차차차라는 사람은 처음 보오.”
검증되지 않은 온갖 비법과 비책, 민간 처방들이 쏟아졌다.
알 수 없는 눈짓, 손짓, 의성어, 의태어들이 난무했지만, 의사소통이 된다는 게 신기한 노릇이었다.
처음보다 목소리를 낮춰 소란스러움은 덜했지만 회의 열기만은 더욱 뜨거웠다.
그때 공작부인이 회의실 문을 열어젖혔다.
“회의가 시작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회의장이 이리 뜨겁습니까?”
지금껏 열띤 토론을 벌였던 사람들이 시치미를 뚝 떼고 미소를 지었다.
“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얼굴색이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바꾸신 헤어스타일이 훨씬 더 잘 어울리시는 것 같습니다.”
다들 화기애애하게 덕담을 바쳤다.
“좋은 얘기 고마워요. 경들도 다 편안하지요? 여러분을 모두 모이라고 한 만큼 오늘 안건은 무척 중요하면서 무거운 얘기입니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알레스는 아주 잠깐 사교용 미소를 보인 후 바로 업무용 얼굴이 됐다.
덕분에 다들 찍소리 하지 못하고 알레스의 진행에 따랐다.
“어쩌면 이 일이야말로 메르세데스의 미래를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사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우 오래 묵은 문제이지요. 하지만 지금껏 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려는 노력은 부족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바로 국경 지역의 설인족 문제입니다.”
공작부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안건에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시다시피 메르세데스의 변경 지역에선 연중 이백 일 이상 전투가 벌어집니다. 공작 전하는 하루도 쉬지 않고 전투에 나가시지요. 전하가 아무리 마법력이 강하고 검술 실력이 뛰어나셔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공작 전하 혼자 감당하시는 것이 미안하기는 하지요.
하지만 그 부분은 전하께서 워낙 완고하셔서.
측근들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영지민을 부모형제처럼 아끼시는 전하께선 그 일에 한 번도 불만을 품으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능한 한 혼자 짊어지겠다고 고집을 부리셨지요.”
저희 말도 그 말입니다. 저희도 안타깝다니까요.
“나 역시 누가 전투를 감당하느냐를 따지려는 게 아닙니다. 전하께선 영주의 의무를 다하시려는 거니 그 역시 소중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제 전투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알레스가 강렬한 눈빛으로 좌중을 훑었다.
“대체 누구를 위한 전투입니까? 설인족은 과연 평화가 아닌 전쟁을 원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들어본 적은 있습니까? 아니, 애초에 이 반목과 폭력은 언제 어디서 처음 생겨난 것일까요?”
후끈후끈 달아올랐던 회의장이 얼음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식었다.
“메르세데스가 연중 이백 일간 감당해야 하는 전투에는 전하의 노고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운 시간과 인력과 재화를 왜 이런 소모적인 일에 낭비해야 합니까.”
알레스가 측근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고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메르세데스와 페레티 상단에서 가장 유능한 인재인 여러분. 지금부터 여러분을 ‘피스메이커’로 임명합니다. 설인족과의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으십시오.”
“예에?”
갑자기 떨어진 청천벽력 같은 임무에 사람들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공작이 입장했다.
“알레스!”
“카이트?”
결혼 후 미모에 더욱 물이 오른 공작이 긴 다리로 회의실을 성큼 가로질러 알레스에게 다가갔다.
“알레스, 가뜩이나 일도 많고 연약한 당신이 이 일까지 마음 쓸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전투는 내가 감당하면 됩니다. 그게 희생이 가장 적어요.”
날벼락 같은 임무를 부여받은 측근들이 공작에게 소리 없는 응원을 보냈다.
전하, 힘내십시오! 제발 저희 좀 살려 주십시오!
언제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측근들을 쥐어짰느냐는 듯, 알레스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공작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카이트, 당신의 그 고귀한 마음은 잘 알아요. 하지만 당신 다음은요? 우리 아이에게 똑같은 미래를 물려줄 건가요?”
“알레스, 그 말은 지금?”
알레스가 두 눈이 커다래진 공작의 손을 끌어 자신의 배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측근들은 복잡한 감정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두 분 사이좋게 지내고 계셨군요!’
공작님의 부부생활, 이대로 좋았다.
-Fin.
By.[Y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