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눈사람
감금됐던 곳에서 나와 보니 이상할 만큼 따스한 새벽이었다.
페레티 상단의 주치의를 겸하고 있는 닥터 뉴먼을 깨워 여전히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새드릭 경을 맡겼다.
그리고 제도 치안대로 가서 후크가의 허름한 창고에 웬 노인이 쓰러져 있다고 신고했다.
노인의 생김새가 스노브 후작과 매우 흡사하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고 나니 무도회는 이미 김빠진 맥주 같아졌을 시간이었다.
아아, 구경도 하지 못한 내 사랑스런 음식들이여.
알레스는 급박한 상황 탓에 잠시 잊었던 허기가 날뛰는 걸 느꼈다.
“이봐, 행크. 이 시간에 문 연 식당 알아?”
“아, 배가 고픈가? 뒷골목 식당도 괜찮으면 죽이는 집을 소개해 줄 수 있는데.”
“뭐 해, 얼른 앞장서.”
먹자골목인지, 노란 등불을 매단 작고 허름한 식당들이 옹기종기 늘어서 있었다.
그중 한 곳의 문을 호기롭게 밀고 들어가며 행크가 소리쳤다.
“내장 버거 둘!”
메뉴가 하나뿐인 식당이었다.
살짝 부담스러운 음식 이름을 듣고 알레스는 걱정했다.
행크가 맛있다고 자신 있게 추천했는데 행여 입에 맞지 않으면 어쩌지.
물론 지금은 내장 버거 아니라 내장 주스라도 흡입할 판이지만.
관록 있어 보이는 식당 주인은 곧장 이런저런 내장들을 얇게 썰어서 기름에 튀기듯 볶아냈다.
번개같이 손을 놀려 뭔가 비법 양념 같은 걸 뿌린 것 같기도 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완성된 속재료를 빵 사이에 터질 듯 꽉꽉 채워 넣은 후 또 무슨 소스 같은 걸 잽싸게 쳤다.
커다란 내장 버거 두 개가 뚝딱 완성됐다.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모양새는 다소 터프했지만 썩 좋은 냄새가 났다.
자신의 내장 속에서 울부짖는 괴물에게 먹이를 던져 주듯 알레스는 내장 버거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오? 오오오?
“죽이는 맛이지?”
알레스의 눈이 점점 커지며 광채를 내뿜는 걸 보고 행크가 자랑스럽게 물었다.
대꾸도 없이 내장 버거를 파고들던 알레스는 버거가 4분의 1쯤 남았을 때에야 대뜸 말했다.
“행크, 나랑 일하자.”
뜬금없는 말에 행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다.
“내장 버거가 입에 겁나게 맞았나 보네. 단골 식당을 깐 보람이 있어.”
“아, 버거가 겁나게 맛있는 건 맞는데, 같이 일하자는 건 아까부터 하려던 말이야. 타이밍이 이상하게 꼬였지만.”
“아까 스노브처럼 묻어 버리고 싶은 놈이 있는 거야? 아니면 어디 가서 때려 엎을까? 그것도 아니면 떼인 돈?”
“아니, 아니! 아까 가치 운운하더니? 당신도 그런 일 말고 제대로 된 일을 한번 해 봐야지.”
“글쎄, 귀족 아가씨랑 손잡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거나?”
“페레티 상단에 들어와.”
“나 같은 놈을 어따 쓰려고?”
“상단의 덩치가 점점 커져서 나 혼자 끌고 가기 버거워서 말이야. 안 그래도 함께 경영할 사람을 찾던 참이야.”
“뭐? 경영? 주인장이 내장 버거에다 이상한 걸 넣었나. 대체 내가 어떤 놈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영리하고 눈치 빠른 놈. 행동력과 배짱이 있는 놈. 인정사정없고 무지막지한 놈. 그리고 찰거머리.”
알레스의 거침없는 말에 행크가 헛웃음을 쳤다.
“혹시 아까 구해 준 거 때문에 이러는 거면….”
“스노브가 한 말 못 들었어? 나더러 다른 사람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고 등급을 매기는 악녀라잖아. 당신 가치를 보고 투자하는 거야.”
“헛다리짚은 거 같은데? 당신 투자금만 날릴걸?”
“실은 음식 나눔장에서 행패를 부릴 때부터 눈여겨봤어. 귀족한테 뻗대는 기개가 마음에 들었거든.”
“와, 정말 악녀다, 와….”
“물론 몇 가지 조건이 있어. 우선 기본적인 경영수업은 받아야 하고.”
“와, 농담이 아니라 이걸 진짜 하려나 보네.”
“그 말투는 좀 고쳐야 해. 우리 상단에서는 일할 때 서로에게 존대를 하거든. 아시겠습니까, 행크 경?”
* * * ‘피스 오브 케이크’ 하우스로 돌아온 알레스는 동이 트는 것을 보며 실신하듯 침대에 쓰러졌다.
실로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늦은 시각까지 일어나지 못해도 사람들은 새벽까지 이어진 무도회의 여파로 여길 것이다.
호위인 새드릭과 상단 주치의 닥터 뉴먼의 입만 단속하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었다.
그뿐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알려지면 징계를 받거나 책임을 추궁당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공작은 또 얼마나 속상해할 것인가.
혼자 조용히 안고 가는 게 편했다.
그런데….
공작은 왜 또 늦은 밤 내 방 창문 앞에 서 있는 걸까.
혹시 소문이 새어 나간 걸까?
“카이트, 오늘은 웬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알레스는 시치미를 뚝 떼고 공작을 맞이했다.
공작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말 하면 매우 한심하게 들리겠지만, 안 좋은 꿈을 꿨습니다.”
귀신이네, 귀신이야.
알레스도 당연히 공작이 온 게 싫지 않았다.
그런 일을 겪고 알게 모르게 정신적으로 힘들었는지, 싫기는커녕 오늘따라 공작의 방문이 안도감을 주었다.
‘그럼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대해 볼까.’
공작이 고생을 감수하는 게 싫어서 평소엔 타박과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오늘은 좀 다르게.
그래서 알레스는 공작에게 다가가 그를 꼭 안아 주었다.
알레스의 팔이 스스럼없이 자신을 감싸자 공작은 흠칫 놀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걱정 어린 공작의 말에 알레스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안아 주고 싶었어요, 카이트를.”
그 외로웠을 아이를.
팔을 푼 알레스는 그의 손을 이끌고 침대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결심한 듯 말했다.
“카이트, 응석 한 번도 안 부려 봤죠?”
“예?”
“저한테 부려 보세요. 제가 카이트의 응석을 받아 줄게요.”
알레스의 권유인지 명령인지, 아니면 유혹인지 모를 말에 공작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붉어졌다.
“응석, 그거 저도 부려 본 적 없지만. 사실 되게 부려 보고 싶었거든요.”
알레스의 쑥스러운 고백에 공작이 얼른 제안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서로에게 응석을 부리기로. 아니, 서로에게만 응석을 부리기로 해요.”
“그게 좋겠네요. 하지만 오늘은 카이트가 먼저 하세요.”
알레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공작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대형견처럼 가만히 당하고 있던 공작이 물었다.
“…응석입니까?”
“카이트가 응석을 부리는 중인 거죠. 저는 그걸 귀엽게 여기는 중이고요.”
“그렇군요. 내가 부리는 거군요. 막상 응석을 부리려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다 자라 버린 몸으로.”
알레스가 카이트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는 그 옆에 도로 앉았다.
“그러게 말이에요. 뭘 해야 하죠?”
“모든 것이 그러하듯 응석 역시 때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아,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이여!”
알레스가 장난스럽게 외쳤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이곳으로 달려오는 동안 걱정했거든요. 알레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하고. 꿈도 꿈이지만 왜 자꾸 불길한 느낌이 들었던 건지.”
공작의 말에 알레스는 양심이 콕콕 찔리는 걸 느꼈다.
결국 별일 없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도 늘 오늘처럼 운이 좋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응석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모두 때가 있겠지.
그 때를 놓치면 바로 지금 이 시간이 후회하고 또 후회하는 잃어버린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앞으로는 더 이상 잃어버린 시간 같은 거 만들지 마요.
알레스는 침대 위로 폴짝 올라갔다.
그리고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팡팡 때리며 말했다.
“카이트, 이리 올라오세요.”
“예?”
놀라시기는. 덮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 생각이거든요.”
“이야기요?”
“이야기는 원래 이불 속에서 편한 자세로 들어야 제맛이거든요. 그러다 이야기가 재미없으면 스르르 꿈나라로 가면 되고요.”
“스르르 꿈나라로 가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공작이 여전히 쭈뼛대면서 말했다.
“하긴 제 이야기가 재미없을 리 없죠. ‘나의 눈사람’으로 만든 노래 연극도 잘나가잖아요? 요즘 제도에서도 인기 최고예요.”
물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꽃미남 배우들이라 그런 것이긴 하지만.
공작은 알레스의 성화에 침대 위로 올라오긴 했지만, 저래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게 각을 잡고 앉아 있었다.
“나는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요.”
이야기의 시작은 공작이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곳은 이곳과는 많이 다른 곳이에요. 나도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살았고요.”
하지만 공작은 섣불리 묻지 않았다.
우선은 알레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기로 했다.
“그곳에서의 나는 어느 순간부터 행복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내가 지독한 불치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공작의 깊고 파란 심해안을 바라보며 알레스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그 병을 스스로 눈사람 병이라고 불렀어요. 눈사람이 보이는 병이었는데 어렸을 땐 나만 보이는 줄 몰랐어요.”
알레스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처음엔 나쁘지 않았어요. 눈사람은 예쁘고 귀여웠으니까. 눈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전에는요.”
알레스의 눈에 쓸쓸한 빛이 감돌았다.
“눈사람들의 미래를 알기 전에는 말이죠.”
알레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슬프고 괴로운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내가 처음으로 본 눈사람은 나의 부모님이었어요.”
* * *
부모님은 남에게 나쁜 소리 한번 해 본 적이 없는 그런 분들이었다.
너무 물러서 늘 손해를 보고 살면서도 남 걱정이나 세상 걱정엔 누구보다 앞장서 참견하고 싶어 했던 순박한 분들.
눈사람의 아이로 태어나 조금 가난하게 살았지만 나쁘지 않은 유년 시절이었다.
한때는 세상의 눈사람들이 모두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냉장고를 만드는 게 내 어릴 적 꿈이었다.
그때는 나도 세상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들이 사랑하는 세상이라서.
그런 부모님을 차례로 떠나보내고 난 뒤 깨달았다.
눈사람이 무엇인지, 눈사람을 보는 내 병이 어떤 것인지.
그들은 어리석고 미련하게도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할 가치가 없는 것을 사랑했다.
세상의 온갖 불행은 그들을 특별히 좋아하는 듯했다.
아름답고 연약하고 선량하고 무해하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일찍 사라지는 것들.
나는 그런 눈사람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