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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18화 (118/120)

118화

악한 사람 약한 사람

스노브 가문은 원래 마법적 내력이 미미한 가문이었다.

대신 대대로 장사와 무역에 재능을 발휘했고, 그런 만큼 사람의 욕망과 심리에 밝았다.

그중 13대 후작인 머스코비 매먼 스노브는 외국의 사정에 밝을 뿐 아니라 암암리에 그 지역의 흑마법과 사술, 마약, 독초 등에 흥미를 가졌다.

그러다 그는 동방의 마족 중 하나인 잉친족에게 제국에 흔한 지하자원인 하겐배라를 헐값에 넘겨주고 사술 하나를 배워 왔다.

‘황사마독’이라는 이름의 그 사술은 사실 하급의 잡술이었으나 적재적소에 쓰면 생각지 못한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 사술은 처음엔 마력도 주술도 아닌 약물이나 씨앗 같은 물질로 존재했다.

그러다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그제야 주술적인 힘이 발아했다.

그 조건이란 다름 아닌 질투에 찌든 심장이었다.

즉 물질에 불과한 일종의 약물은 누군가의 질투심과 만났을 때 비로소 저주가 됐다.

황사마독이 듣는 사람과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진 이유였다.

황사, 즉 노란 뱀은 그 지역에선 질투를 의미했다.

사람의 마음속에 은밀히 침투해 가장 약하면서도 추악한 부분을 헤집고 물어뜯었다.

사술을 사용하는 이는 도리어 크게 어려운 것이 없었다.

자신이 노리는 사람에게 그저 슬쩍 씨앗을 뿌리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그 안의 약한 부위에 뿌리를 내린 씨앗은 알아서 점점 자라나 마음을 온통 점령했으니까.

“약한 사람은 말이야, 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야.”

스노브가 마침내 쥐고 놓아 주지 않던 알레스의 턱을 팽개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가진 게 아무리 으리으리하게 많아도 소용없어. 선대 황제를 봐. 세상을 다 가지고도 제가 뭘 가졌는지 모르잖아. 제가 쥔 것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자꾸만 남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 든다 이 말이지.”

아무래도 스노브는 외국에 도피해 있는 동안 말을 못 해 어지간히도 답답했던 모양이다.

약 꺼내 놓은 지가 언젠데 여태 떠들고 있어?

알레스는 방금 전 스노브에게 잡혔던 턱을 돌리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질투심 하나 때문에 평생 자신을 지지해 준 친우도 간단히 배신하더군. 신탁을 핑계 대며 황제에게 접근했지만, 실은 그 안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노란 뱀을 본 거지. 황제씩이나 돼서 꼭두각시처럼 내 혀끝에 놀아나던 꼴이라니.”

그의 얼굴은 마치 영광의 시절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런데 그 메르세데스의 애송이가 내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지. 어리다고 얕봤던 게 문제였어.”

메르세데스의 애송이?

스노브가 무슨 소리를 하든 대충 흘려듣던 알레스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럼 지금까지 떠든 그 황제의 질투 어쩌고 했던 얘기가 메르세데스와 관련이 있는 얘기였던 거야?

알레스는 공작이 어렸을 때 벌어졌다던 그 비극적인 사건을 떠올렸다.

메르세데스 공작가가 반역을 모의했다는 누명을 쓴 상황.

사방이 적인데 공작 부부는 사라지고 어린 공자는 피신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 영지민들이 나서 메르세데스를 지켰다고 했지.

스노브가 꾸민 계략이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공작이 복수하려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게 선대 황제의 질투심 때문이었는지는 몰랐다.

듣다 보니 스노브도 스노브지만 그 선황이란 작자야말로 나쁜 놈이잖아?

선대 메르세데스 공작과는 절친한 친우였다면서.

얼마나 대단한 질투심인지 몰라도 그런 사술 하나에 그렇게까지 망가지다니.

“황제도 한바탕 좌지우지하며 가지고 논 사술이기에 그런 꼬맹이 하나쯤은 쉽게 보내 버릴 줄 알았더니. 하필 사술이 말을 안 들어.”

이게 무슨 소리야?

그 황사마독인가 뭔가 하는 걸 공작에게도 썼단 말이야?

“설마 아홉 살짜리 애한테 사술을 썼다고?”

납치된 이후 알레스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안 되나?”

“그 황사마독이라는 게 사람의 질투심을 이용해서 표적 삼은 사람도 망가뜨리고 결국 자기 자신도 망가뜨리는 사술이라는 거 아니야?”

“아주 잘 이해했네? 페레티가의 둔녀라고 불리던 계집이 어째서 이렇게 똑똑해졌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아니, 아홉 살짜리가 질투라는 게 뭔지 알기나 하겠어?”

“어린아이라고 무시하면 쓰나. 질투가 아니면 원망과 미움이라도 있겠지. 아이들이 전부 천사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스노브가 흉하게 웃었다.

“뭐, 어쨌든 사술이 불발됐으니까. 미카엘과 캄파넬라, 그 건방진 것들의 자식 놈한테 불행의 맛을 제대로 보여 줄까 했더니. 에이 퉤퉤.”

알레스는 초라해진 스노브의 몰골을 보고 조금씩 고개를 들던 인간적인 동정심마저 깡그리 사그라지는 걸 느꼈다.

스노브 말마따나 사술도 듣지 않을 악녀 주제에 동정심이라니, 너무 오만했다.

스노브는 사술이 작동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알레스는 알아챌 수 있었다.

사술은 카이트 안에서 착실하게 힘을 발휘했음을.

눈사람지기인 만큼 눈사람들에 대해선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소년의 원망과 미움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했을 것이다.

그 사술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저주가 되었을 것이다.

카이트가 자신을 다그치며 행복과 기쁨을 멀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 그를 괴롭힌 저주가 여기서 생겨난 거였구나!’

스노브의 죄명은 이것이었다.

한 사람이 스스로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용서하지 못한 채 인생을 낭비하게 한 죄.

“그러고 보니 메르세데스의 애송이가 들이닥치기 전에 페레티의 망아지를 얼른 해치워야겠군.”

스노브가 곁에 있던 수하에게 턱짓을 하며 지시했다.

“이 약들을 전부 다 저 계집의 입에 쏟아 넣어.”

알레스가 이를 악문 채 몸부림을 치며 약을 먹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내가 여기서 잘못되면 카이트는 또다시 저주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겠지?

카이트에게 말해 주어야 해.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자신을 미워하지 말라고.

“살려고 발버둥 치는 꼴이 아주 보기 좋군. 메르세데스의 애송이가 네년을 그리 각별하게 생각한다면서? 이거 가슴이 찢어질 것 같겠군.”

스노브는 이죽거리며 수하에게 다시 지시했다.

“기절시켜서라도 당장 먹여. 꾸물거리다 녀석이 영웅놀이 할 기회를 줄 순 없지. 그동안 주제도 모르고 날뛰느라 수고했다, 레이디 페레티.”

퍽.

스노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둔탁한 타격음이 터졌다.

두개골이라도 아작 났을 법한 소리였다.

쿵.

몸이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소리.

“그 영감 드럽게 말 많네.”

알레스에게 약을 먹이라는 지시를 받은 사내가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투덜거렸다.

“저 영감이 말이야, 예전부터 그렇게 말이 많았단 말이지. 뒷구멍으로 구린내 나는 일을 시키면서 무슨 유세가 늘어지는지. 썩은 내가 진동을 하는데 귀족 나리랍시고 훈계는.”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알레스는 눈만 커다랗게 뜬 채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사내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귀족 아가씨, 나 기억할지 모르겠네.”

누구?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긴 한데….

기억을 뒤지느라 알레스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며 건들거렸다.

“왜? 기억 안 나? 아니면 내 말투가 맘에 안 드나? 마음에 안 들면 또 황실 근위대라도 출동시키지 그래?”

아? 이 남자는.

“그때 음식 나눔장 앞에서 일부러 난동을 부리다 끌려간 그….”

그 재활용 쓰레기!

“흠흠, 이거 알아봐 주니 영광이네. 뒷골목에선 행크, 찰거머리 행크라고 부르지. 어때? 몸은 괜찮고?”

“아… 응. 덕분에. 그런데 행크가 여긴 웬일이야?”

“내가 왜 찰거머리 행크인 줄 알아? 갚아 줄 건 절대 잊지 않고 갚아 주거든. 끈질기게 달라붙어 반드시 피를 본단 말이지.”

예전 그 일로 나한테 앙심을 품고 복수하러 온 거야?

이 무슨 산 넘어 산이야!

알레스의 머릿속이 다시 아득해졌다.

“저 영감이 사람을 아주 우습게 봤거든. 엉터리 정보를 주고 사람을 부려 먹은 것도 모자라 불리해지니까 꼬리 자르기를 하더란 말이지.”

그가 다시 생각해도 열 받는지 이미 쓰러진 스노브의 다리를 걷어찼다.

“새로 개장한 급식소에 가서 멍청한 귀족 영애 하나 겁주면 되는 만만한 일이라더니, 그게 어딜 봐서 만만한 일이야. 덕분에 감옥에서 여섯 달이나 썩었다고.”

그래서 스노브에게 복수하려고 지금껏 기회를 엿보고 있었구나.

그때 황실 음식 나눔장 앞에서 난동을 부릴 때도 동네 불량배치고는 근성이 있다 싶더니.

그래서 잘 다듬으면 의외로 재활용 쓰레기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던 거고.

알레스는 행크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어쨌든… 덕분에 살았어, 행크. 정말 고마워.”

위험에서 구해 준 것에 대해 알레스가 인사했다.

행크는 코를 쓱 훔치더니 어울리지 않게 조금 쑥스러운 기색을 띠고 말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가씨가 한 말이 자꾸만 생각이 나더라고.”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알레스가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눈을 아주 무섭게 치뜨면서 그랬잖아. 나더러 가치가 똥이라고.”

“아, 그건….”

하필 그런 말을. 그래서 좋았다는 거야 뭐야?

“그리고 생전 처음 듣는 말도 했지. 귀족이든 평민이든 신분으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대신 그 사람이 가진 가치를 봐서 차별한다고.”

그런 말도 했나?

“정말 이상한 말이었지. 그런데 감옥에 있는 내내 생각이 나는 거야. 사람 미치겠는 거지.”

그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사람을 구별 짓는 건 신분밖에 없는 줄 알았거든. 아무개가 어떻다 설명하는 것도 신분이 전부라고 생각했지. 뭐 후작 나리, 귀족 영애, 평민 녀석, 천한 아무개 같은. 그런데 다른 구별법이 있다는 거야.”

행크의 눈이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게 초롱거렸다.

“가치? 똥이 됐든 뭐가 됐든 나한테 가치라는 게 있다고? 그럼 똥 말고 다른 가치도 잘하면 생길 수 있다는 건가?”

그의 얼굴이 조금씩 상기됐다.

“신분이라는 건 내 마음대로 어쩌지 못하는 거지만 가치라는 건 혹시 내가 바꿀 수 있는 건가? 처음엔 이해가 안 갔지만 점점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지.”

어째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이, 재활용의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영리한 행크였다.

그가 다시 한번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까 말했지, 갚아 줘야 할 건 반드시 갚는다고. 감옥에 있는 동안 심심할 뻔했는데, 이리저리 짱구 굴리느라 지루할 틈 없게 만들어 준 거, 그거 갚은 거야.”

알레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행크가 하는 말을 듣다 빙긋 웃으며 한마디 했다.

“당신이 찰거머리라 다행이야.”

쓰러져 있던 호위 기사 새드릭을 부축해서 그곳을 벗어나며 알레스는 스노브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스노브, 미안하지만 이건 내 이야기야. 그래서 당신 맘대로는 안 될 거야. 남의 이야기에서 악역 노릇 하느라 그동안 고생 많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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