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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17화 (117/120)

117화

죄와 뱀

마법식으로 움직이는 마차를 세상에 공개하기 전, 메르세데스 공작은 청매단에 한 가지 중대한 지시를 내렸다.

메르세데스의 정보 조직인 청매단은 공작의 지시에 따라 제국 전역의 마정석 광산을 조사했고, 몇몇 곳을 빼고는 광산의 실소유주가 스노브 후작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겉으로 드러난 소유 가문들은 눈가림에 불과했다.

모두 모종의 거래를 통해 광산의 명의를 스노브에게 넘긴 상태였다.

한마디로 제국의 마정석은 스노브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영지 내에 마정석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지만, 그 마정석으로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메르세데스가를 제외하면.

청매단의 보고를 받은 공작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법식 도입의 여파가 여러 가문에 미치지 않고 스노브가에 집중될 테니 말이다.

스노브의 비리가 한꺼번에 불거지고 마정석 가격이 폭락하자 스노브의 몰락을 감지한 이들이 그에게서 빠르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오직 이익으로 엮인 사이거나 불만이 있어도 스노브의 위세에 눌려 감히 내색하지 못하던 관계였기에 금세 허물어질 연합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스노브가 몰락의 절정은 황비인 오하라가 종적을 감춘 일이었다.

오하라는 계약대로 스노브가 그녀를 가장 필요로 할 시점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스노브의 뒷배가 되어 주기는커녕 안 그래도 죄 많은 인간에게 괘씸죄까지 얹어 준 셈이었다.

참으로 절묘한 가출이 아닐 수 없었다.

수많은 죄목으로 스노브가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메르세데스 공작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복수라지만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이 탐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후작에게 복수할수록 세상이 좀 더 좋아지고 살 만해지니 조금 위안이 되는군요. 당신을 징벌하는 일은 어쩔 수가 없겠습니다.」

완전히 파산한 스노브는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외국으로 달아났다.

대귀족이자 황제파의 수장으로 오랫동안 헌신해 온 것을 참작해 구속하지 않고 예우해 준 것을 이용한 것이다.

메르세데스를 비롯한 여러 가문에서 외국으로 수사관을 파견해 그를 체포할 것을 청원했으나, 황제가 기각했다.

두 번째 아내마저 달아난 황제의 심중을 헤아려 사람들도 더 이상 강하게 압박하지 못했다.

전후 사정을 알고 있는 알레스만 왜 당장 스노브를 잡아 가두지 않느냐고 길길이 뛰었을 뿐.

씩씩거리며 따지러 온 알레스에게 황제는 이렇게 변태 같은 소리만 늘어놓았다.

「짐 같은 폭군에겐 스노브처럼 썩은 인간도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선황도 친우이자 충신인 메르세데스 선대 공작과 간신인 스노브 후작을 동시에 쥐고 있었던 거지.」

「그래서 선대 폐하께서는 결과가 좋으셨습니까?」

화가 난 알레스가 비꼬며 물었다.

「글쎄, 선대와 짐은 또 다르거든. 선대는 스노브에게 이용당했다면, 짐은 스노브를 이용한다는 차이일까.」

당신이 선대보다 더 악랄하다는 거네. 알레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스노브가 외국에서 복수의 칼을 갈면 어쩌려고.

메르세데스 공작도 스노브가 행여 알레스에게 해코지를 할까 봐 염려돼 수사관의 해외 파견을 건의한 것이다.

비용이나 인력, 절차 등은 모두 메르세데스에서 부담하고 준비하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독버섯은 완전히 씨를 말려야 후환이 없을 터.

그런데 저 변태 황제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오래된 신탁처럼 누군가는 황제가 될 운명이고 누군가는 악당이, 누군가는 영웅이 될 운명인 게지.」

이런 알 수 없는 말이나 중얼거릴 뿐.

설마설마 혹시…?

황제가 오하라를 좋아하기라도 했던 거 아니야?

막상 떠나보내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서 저렇게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이상한 소리나 하는 건….

알레스는 이내 흠칫하며 잠깐이나마 이런 몹쓸 가정을 한 자신을 꾸짖었다.

* * *

그러게, 그때 스노브를 잡아들여야 한다고 했냐, 안 했냐!

이래서 한번 지뢰는 영원한 지뢰라는 것인가.

스노브에게 납치되어 벌써 몇 시간이나 굶은 알레스는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황제를 원망했다.

하여간 말을 징그럽게도 안 듣는 건 귀신도 안 잡아가는 전남편이기 때문인가.

가장 큰 문제는 알레스가 없어진 걸 측근들이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알레스가 제도에서 가장 큰 공연장인 맥켈란 홀의 특별석에서 노래 연극 <나의 눈사람>을 관람하는 줄 알 것이다.

그런 후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엠마 홀에서 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공연 축하 무도회 ‘아이스 볼’에 참석한 줄 알 것이고.

더욱이 가면무도회여서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을 터.

공연이 끝나고 축하 무도회를 열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도 알레스였다.

바야흐로 봄이 무르익고 여름이 시작되려는 계절.

겨울 평화 시즌이 끝난 메르세데스에서 눈물의 송별을 받으며 철수한 소로 형제와 샤를테론 연극단은 열렬한 요청 속에 제도의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마침내 검증된 인기 공연만 상연 허가가 나오고 유명 배우들만 설 수 있다는 맥켈란 홀에서 공연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축하하는 기념식 비슷하게 무도회를 기획한 것이었다.

얼음과 눈처럼 보이는 장식재와 조명을 이용해 홀을 꾸미고 무도회에 ‘아이스 볼’이란 이름을 붙여 공연의 분위기를 이어가도록 했다.

환상적인 분위기가 나도록 춤곡의 선정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곁들이는 술이나 다과도 메르세데스식 빙수 ‘눈 여왕의 궁전’이나 머랭쿠키 ‘얼음왕자의 미소’ 등 겨울왕국이 떠오르게 하는 것들로 준비했다.

이미 제도의 명물이 된 헤라클레스의 천타빵과 말편자 빵, 커피 키스 오브 카르티에와 터치 오브 카르티에를 기본으로 깔았음은 물론이다.

청량한 맥주와 공연 관람의 필수품인 팝콘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이렇게 멋들어지고 풍성한 잔칫상을 차려놨는데, 그랬는데 왜!

왜 도대체 나는 이렇게 칙칙한 곳에서 배를 곯고 있어야 하는 거지!

알레스는 이 환장할 갭에 더욱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밤비 경이 있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터.

최근 패션, 귀금속 사업 때문에 더욱 바빠진 밤비를 반강제로 호위 기사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일에 온전히 몰두하라는 알레스 나름의 배려였다.

그 후 밤비의 후임을 새로 뽑았는데, 알레스보다 먼저 스노브 일당에게 당해 저쪽 구석에 포박된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장정이 바로 호위 기사 새드릭 경 되시겠다.

실력도 품성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밤비에게 비할 바는 못 되었다.

하긴 밤비 경만 한 기사를 구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새드릭 정도면 괜찮은 기사였지만 운이 나빴는지도.

그래도 죽은 건 아니어서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모시던 주인이 잘못되면 어차피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지만.

아까부터 걱정이 되는 건, 새드릭보다 훨씬 처치하기 쉬운 알레스 자신을 왜 아직까지 멀쩡하게 놔두었느냐는 점이었다.

얼마나 더 지독한 걸 준비해 놓았기에?

원래 한 방에 보내는 것보다 두고두고 피를 말리는 게 더 잔인한 법이다.

알레스가 이런 생각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마침내 등불이 켜지고 스노브가 등장했다.

솔직히 알레스는 스노브의 얼굴을 보고 흠칫할 정도로 놀랐다.

원래도 잘난 얼굴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더욱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악당이어도 마음고생을 하면 얼굴이 훅 가는 건 마찬가지구나 싶었다.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서 부스스했고, 몰라볼 정도로 눈과 뺨이 푹 꺼지고 굵은 주름이 깊게 파여 있었다.

거기다 피부는 갈라질 것처럼 거칠거칠했다.

하긴 귀족으로 호의호식하던 사람이 빈털터리가 됐으니.

아무리 외국에 연줄이 있다 해도, 귀빈 대우 받는 건 다 옛말일 터.

스노브의 몰골을 보고 알레스는 정말 틀렸구나 싶었다.

악과 깡밖에 남지 않은 그는 눈에 뵈는 게 없을 테니.

평생 오로지 이익을 쫓아 살아온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티끌만큼의 이득조차 없다 해도 저지를 것이다.

자신의 복수심을 채울 수만 있다면.

알레스는 긴장을 꿀꺽 삼켰다.

스노브가 입을 열자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 망아지에게 어울리는 최후의 만찬이 뭘까?”

독이라도 먹이려는 걸까? 최대한 서서히 퍼지는 거겠지?

“넌 악독한 년이라 저주도 사술도 안 통할 테지. 그렇다고 독약을 쓰기엔 좀 밋밋하단 말이야. 마약이 좋겠어.”

저기요, 선입견 그거 해로운 겁니다.

내가 사실 저주 빨이 팍팍 받는 체질일지 누가 압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이 순간 알레스는 독약이나 마약을 먹고 죽는 것보다는 저주에 걸린 채라도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렇게 삶에 미련이 많은 인간인 줄 몰랐다.

스노브가 큭큭거리면서 말했다.

“제국에 널리고 널린 하겐배라가 알고 보니 동방에서 마약을 만드는 재료더란 말이지. 그쪽 암시장에 그걸 헐값에 대주고 용돈벌이를 좀 했지.”

환약부터 가루까지 다양한 형태의 약을 늘어놓으며 그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좋을까? 더러운 환각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게 좋으려나?”

먹잇감을 가지고 노는 맹수처럼 스노브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말이야, 아주 귀여운 노란 뱀이 한 마리 있었단 말이지.”

“……?”

“그것만 있으면 황제도 어린애 어르듯 주무를 수가 있었지.”

추억에 잠긴 듯 아련하기까지 한 표정을 짓던 스노브는 별안간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크큭, 크크큭, 그 사술이 말이야, 황제한테 통하는데 거지한테 안 통하더란 말이지. 정말 웃기지 않아?”

아무래도 훅 간 건 스노브의 얼굴만이 아닌 것 같았다.

“거지보다 더 약해 빠진 제국의 태양과 황제보다 더 자기 확신에 찬 거지라. 거지보다 더 그릇이 작은 황제와 황제보다 더 그릇이 큰 거지라. 그리고….”

혼자 킬킬거리던 스노브는 돌연 알레스의 턱을 잡아챘다.

그의 눈이 혐오로 이글거렸다.

아니, 방금까지 기분 좋으신 것 같더니. 갑자기 성질을 내고 난리야. 아무래도 조울증이지 싶다.

“너처럼 악독한 것들한테도 안 통하고! 너 같은 것은 자기 가치는 물론이고 남의 가치도 한눈에 알아보고 등급을 매기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한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누가 누구더러 악독하다는 거야?

알레스는 두려운 와중에도 스노브가 횡설수설하는 말 사이에서 의미를 파악하려 애썼다.

“암, 악한 사람에겐 절대 듣지 않지. 그럼 어떤 사람한테 듣느냐.”

그는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 주는 양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악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 질투라는 노란 뱀에게 놀아나는 건 언제나 약한 사람들이지.”

저 아버님, 저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약골이거든요. 턱 좀 놔 주면 안 될까요?

알레스가 스노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자 그는 놓아 주기는커녕 더 세게 힘을 주며 대뜸 호통을 쳤다.

“어떤 사람이 약한 사람인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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