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16화 (116/120)

116화

미처 알지 못한 것들

“말하기는 쉽습니다만.”

브린 황자가 난처한 얼굴로 입을 뗐다.

“대체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마법 통신구로 소설을 읽게 하자니.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이야기군요.”

영애들이 쓴 이야기를 탈라리아 매신저 같은 마법 통신구의 원리를 이용해 출간해 보자는 알레스의 제안에 브린이 보인 반응이었다.

“헤르메스가 보이는 행보를 보면서 영감을 얻곤 해요. 가장 앞서서 영리하게 마법식을 활용하는 곳이잖아요.”

원래 전령 길드였던 헤르메스가 여론 조사와 정보 수집 쪽으로 발 빠르게 방향을 틀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마법식 덕분이었다.

저쪽 세상 유망 IT 기업을 떠오르게 하는 헤르메스를 알레스는 늘 탐냈다.

주식이 있으면 사고 싶다는 심정으로 어떻게든 인연을 맺어 함께 사업을 벌이고 싶어 했다.

지난번 마법식 이야기로 설전을 벌일 때 눈치를 보니 브린 황자가 헤르메스 쪽에 인맥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본인이 마법식 천재이기도 하니.

소설 출간을 계기로 브린 황자를 끼고 헤르메스와 인연을 맺게 되면 일석이조일 것 같았다.

“아,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으로 출간하기보다는 하루에 1화, 혹은 말씀하신 출판업계의 금언을 반영해 5화씩 끊어서 보여 주는 건 어떨까 생각해 봤어요.”

브린은 정말이지 멋모르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알 수 없는 촉이 찌르르 오는 걸 느꼈다.

“마법식과 출판에 뛰어난 능력을 지니신 전하라면 분명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저는 확신해요.”

알레스가 이렇게 바람을 집어넣기도 했고.

하긴 내 능력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물론 내 등골을 빼먹으려고 한 소리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알레스의 마수에 슬슬 걸려들기 시작하는 브린.

“참, 그때 헤르메스에 아는 분이 있다고 하셨죠? 이번 출간과 관련해 의논도 하고 조언도 구할 겸 그분을 제게도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네? 헤르메스의 지인이요….”

“기왕이면 헤르메스의 길드장을 한번 만나 뵙고 싶어요. 대체 어떤 분이 이처럼 길드를 현명하게 이끄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여하튼 만나면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아요.”

“아, 길드장이요….”

브린이 눈에 띄게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왜요? 어려운 부탁인가요?”

“그게… 헤르메스의 길드장이 낯을 많이 가려서요. 의외로 숫기가 없다고 할까, 내성적이라고 할까, 대인기피증이 있다고 할까.”

황자의 목소리와 흔들리는 눈동자를 봤을 땐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알레스는 브린의 반응이 매우 의심스러웠지만 무리하게 추궁할 순 없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브린이 아닌 다른 경로를 찾아봐야겠다고 조용히 결심할 뿐이었다.

알레스가 한바탕 들쑤시고 돌아간 후, 브린은 방금 본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홀로 감흥에 젖어 있었다.

알레스가 내놓은 제안들은 정말이지 말이 안 되는 소리인데, 그녀가 떠난 이후에도 여전히 브린의 마음을 들쑤시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가능할 것도, 의외로 괜찮은 결과가 나올 것도 같고….

아니, 점점 잘될 것 같은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안 팔리는 책만 만든다는 조롱과 비웃음을 샀던 지난날들이여.

이번이야말로 내 솜씨를 증명하고 대박 출판사로 우뚝 설 기회인가.

알레스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어 버린 브린이었다.

아 참! 브린은 또 다른 중대 사안을 떠올렸다.

레이디 페레티가 자꾸만 헤르메스에 접근하려는데 어쩌지?

카이트에게 대비하라고 귀띔을 해 줘야 하나….

* * *

이른 시간부터 브린 황자를 조이려 부랴부랴 외출을 한 알레스는 심히 배가 고팠다.

무척 흥분했다가 긴장이 풀리니 잊고 있던 허기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 같았다.

괜히 당 떨어져서 비틀거리기 전에 뭐라도 먹자며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바삐 걸음을 옮기던 알레스는 식당 문 근처에서 멈칫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들리는 달그락 소리?

아네모네 저택까지 동행했던 밤비는 밀린 주문 때문에 알레스를 집 앞까지 호위한 후 거래처로 곧장 떠나야 했다.

여행 일정상 마사와 헤라클레스가 벌써 돌아왔을 리는 없고.

상단의 직원들도 이제는 저택 밖에 마련한 크고 작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저택의 고용인을 늘리려면 차라리 상단의 직원을 한 명 더 늘리겠다고 고집해 딱히 시중드는 사람도 없었다.

시중을 받는 게 익숙하지 않고 영 불편하기도 해서 말이다.

설마 백주대낮 번화가에 도둑이나 강도가?

아니면 스노브가 보낸 자객?

그것도 아니면 산업 스파이? 정적? 납치범? 소음공해로 이성을 잃은 이웃? 그때 물고 뜯었던 아무개?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하나 보다.

켕기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알레스는 왔던 길을 되짚어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그만 바람과는 다르게 어떤 물건을 쳐서 떨어뜨렸다.

금속으로 된 물건인지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기도 했다.

땡그랑 땡땡땡 떼구루루루….

소리가 울리자마자 발소리가 재빠르게 다가오는 게 들렸다.

당황한 알레스는 급한 대로 눈에 보이는 길쭉한 물건, 빗자루를 손에 들었다.

그걸로 어쩌려는 건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알레스.”

하지만 다정한 음성과 함께 나타난 이는 메르세데스 공작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알레스는 빗자루를 든 채 굳어졌다.

“카이트? 대체 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

“내 요리 솜씨를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요리 솜씨라뇨… 그것 때문에 거기서 여기까지 왔다고요? 설마 이번엔 텔레포트로 온 거겠죠? 마법과 경공술로 밤새 직접 달려왔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알레스의 말에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정말 또 달려온 거예요? 라피스가 그렇게나 많은데, 편하게 텔레포트를 해도 되잖아요.”

알레스가 기가 차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데도, 공작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메르세데스의 땅에 라피스가 많이 묻혀 있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건 내 것이 아니니까요.”

아니, 메르세데스의 주인인 당신 것이 아니면 누구 것이랍니까? 혹시 내 건가?

“처음부터 라피스는 대자연의 것입니다. 마침 운 좋게도 우리 영지에 그것들이 풍부하게 있기에 유용하게 쓰긴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잠시 빌려 쓴다는 생각입니다.”

잠시 빌려 쓰는 거라니…. 왜 저 라피스가 내 재산이다, 저 마정석이 내 거다, 말을 못 하는 거니!

“빌려 쓰는 건데 함부로 낭비할 순 없지요. 꼭 필요한 곳에 아껴서 쓰려고 합니다. 어차피 나에겐 마법력도 있으니까요.”

아, 저 눈사람 중의 상 눈사람을 어쩌면 좋지.

공작과 친하게 지내면 라피스는 물 쓰듯 쓸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알레스는 빙긋이 웃고 있는 눈사람 공작을 망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요리 솜씨를 자랑한다는 건 또 뭐람.

“그런데 요리를 하신다는 건 무슨 소린지…. 요리도 할 줄 아세요?”

“아, 내 정신 좀 보십시오. 알레스에게 내 요리를 자랑하러 와 놓고선. 우선 식당으로 가서 식기 전에 식사부터 하시죠.”

식탁 위에 이미 몇 가지 음식이 올라와 있었다.

“하나만 더 완성하면 됩니다. 잠시만요.”

공작은 급히 조리대로 몸을 돌려 하던 요리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요리를 하느라 등 근육이 움직이는 걸 볼 때마다 알레스는 식욕을 요동치게 하는 맛있는 냄새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입에 침이 마구 고였다.

아아, 가뜩이나 내가 먹는 것에 사족을 못 쓰는 걸 알면서.

그 얼굴 그 등판에 요리까지 잘하는 건 반칙 아닌가요!

알레스가 기쁨인지 괴로움인지 모를 감각에 몸부림치는 사이, 음식이 전부 차려졌다.

가짓수가 많진 않아도 하나하나 때깔부터 맛있어 보였다.

일단 눈으로 먹는 건 합격.

공작이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는 가운데 알레스가 맛을 보았다.

이 음식 한 입, 곧장 저 음식 한 입, 쉬지 않고 이 음식 저 음식 한 입씩.

알레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카이트, 언제부터 요리를 한 거예요? 빈말이 아니고 음식들이 전부 맛있어요.”

알레스의 진심어린 감탄이 쏟아졌다.

“전장에서 야영을 자주 하다 보니 요리를 해 볼 기회가 몇 번 생겼습니다. 해 보니 적성에 맞고 재미가 있더군요.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하다 보니.”

뭔가 웃픈 얘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은 눈치도 없이 왜 이렇게 맛있는지.

정말로 자랑할 만한 솜씨였다.

공작은 알레스가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는 듯 그윽한 눈길로 바라만 보았다.

우적우적 쩝쩝대며 먹기 바쁜 사람이 받기에는 과분한 눈빛이었다.

민망해진 알레스가 한숨 돌리고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요리 솜씨를 자랑하고 싶어지신 거예요? 관광객들은 어쩌고요.”

“오늘은 찜질방에서 휴식을 취한 후 밤에 노래 연극을 보러 가는 일정이라서요. 딱히 내가 없어도 되는 날입니다.”

“그럼 좀 쉬시지.”

“알레스가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공작의 담백한 말이 알레스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알레스도 공작의 자양강장제 같은 얼굴을 봐서 좋긴 했다.

게다가 맛있는 음식도 먹고. 요즘은 끼니를 때우는 게 고역이었는데 말이다.

“푸딩은 패트릭 단장님이 만드신 건가요?”

알레스가 도기 컵에 담긴 푸딩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예, 제도에 간다고 하니 알레스에게 전해 달라며 살뜰하게 챙겨 주셨습니다.”

맛있는 음식으로 기분이 좋아진 알레스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 특히 상담 받는 영애들이 쓴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고 감동적인지에 대해 한참을 재잘재잘 늘어놓았다.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다정하게 웃는 공작을 보며 알레스는 자꾸만 괜한 상념에 빠져들었다.

당신을 만나는 것이 내 이야기인 걸까?

눈사람과 눈사람지기는 어울리는 한 쌍이긴 한데, 이번엔 내 이야기에서 도망치지 말아 볼까….

심지어 요리도 이렇게 잘하는데 말이야.

카르티에의 말처럼 이번엔 내 이야기를 제대로 찾아왔기에 주인공의 삶이 기다리는 걸까?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고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그런 주인공의 삶이 정말로 내 삶이라고?

* * *

주인공의 삶 좋아하네.

그럼 그렇지.

아니면 구르는 주인공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 뭐 그런 콘셉트인가.

알레스는 어둡고 차가운 곳에 감금돼 주린 배를 움켜쥐고 훌쩍거렸다.

결국 바짝 독이 오른 스노브에게 납치돼 오들오들 떨고 있는 신세.

석 달 전, 스노브는 비참한 몰골로 해외로 도피했다.

썩을 대로 썩은 그의 부정과 비리가 잇따라 드러난 데다, 마법식 마차의 등장과 그로 인해 거의 모든 분야에서 거세게 일어난 마정석 프리 운동으로 마정석 값이 곤두박질쳐 폭삭 망하고 만 것이다.

그 와중에 스노브가 꽂은 황비인 오하라 가넷 네슬라가 황궁에서 사라져 잠적한 일은 그의 몰락에 쐐기를 박았다.

아가판투스가 감히 황제를 기만한 죄를 물으며 얼마나 소름 돋는 분노 연기를 펼쳐 보였는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런데 말이다.

스노브가 원한을 산 사람은 한둘이 아니고, 스노브가 망하기를 빌고 스노브에게 저주를 퍼부은 사람도 한둘이 아닌데.

왜 ‘같이 지옥으로 떨어질 제물’로 나, 레이디 페레티를 찍은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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