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대작 냄새가 납니다
“하아… 너무 감동적이었다.”
알레스가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엔 배를 잡고 깔깔대던 레이디가 이번엔 숙연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니 밤비는 조금 긴장이 됐다.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밤비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재빨리 알레스의 얼굴부터 몸 구석구석을 훑으며 물었다.
“안 괜찮아요.”
당연히 괜찮다고 할 줄 알았던 레이디가 곧장 괜찮지 않다고 말하자, 놀란 밤비가 얼른 알레스에게 다가가 밤색 눈을 크게 뜨고 안색을 살폈다.
“어디가 어떻게 불편하십니까?”
밤비의 궁서체 물음에 알레스가 웃음을 풉 터뜨렸다.
“아,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너무 감동을 받은 나머지 안 괜찮다는 뜻이었는데.”
“정말이십니까?”
알레스가 해명했음에도 밤비는 쉽사리 의심을 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을 감지하시면 곧바로 제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들 때 보면 공작이랑 꼭 닮았다.
그러고 보니 카이트는 잘 지내고 있을까?
알레스는 문득 그리움을 닮은 감정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좋은 글을 읽고 난 직후라 마음이 말랑말랑해진 탓인 것 같았다.
“저, 아무래도 제가 레이디의 안구를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상념에 빠진 알레스에게 밤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말투가 어찌나 진지하고 엄숙한지,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어 얼결에 허락할 정도였다.
밤비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재빠르면서도 능숙하고 꼼꼼하게 알레스의 눈꺼풀을 까뒤집어 확인했다.
“긴장 풀어요, 밤비 경. 정말로 이 글들이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이라 나도 모르게 들떠서 장난을 좀 친 거예요.”
알레스가 책상 위에 쌓인 종이 뭉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상담소를 찾아온 고객 분들이 쓴 글 말인가요? 그렇게 재미가 있습니까?”
“솔직히 기대 이상이에요.”
알레스는 새로 도입한 특허 받은 비장의 자기관리법이라고 소개하며, 매니지먼트사를 찾아온 영애들에게 이야기 쓰기를 주문했다.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영애들은 반신반의하며 시간이 나면 한번 해 보겠다는 뜨뜻미지근한 대꾸를 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막상 써 보니 생각보다 재미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실은 이 영애들에게 숨겨진 이야기꾼의 재능이 있었던 걸까.
겨우 사흘 만에 5화 이상 되는 분량을 써 와서는 기대에 찬 얼굴로 자신이 쓴 것을 알레스에게 디밀기 시작했다.
읽고서 소감을 말해 달라고.
알레스는 조금 귀찮다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지만, 실컷 바람을 넣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심드렁한 반응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열렬한 반응을 보이며 원고 뭉치들을 받아들었지만,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다.
미안한 얘기지만 영애들이 평소 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유치하거나 답답하다는 생각이 자주 들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이 그처럼 좁고 평면적이고 지겨운 것이기에 그런 것이겠거니 이해했다.
그래서 은연중에 그들의 이야기도 유치하고 뻔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억지로 원고의 첫 장을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레스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영애들이 쓴 이야기들은 알레스의 기대를 훌쩍 넘을 정도로 훌륭했다.
로맨스면 로맨스, 판타지면 판타지, 코미디면 코미디.
겨우 5화 남짓한 분량이었지만 저마다 대작의 향기가 물씬 났다.
이 영애들이 밥 먹고 맨날 머릿속으로 이야기만 생각했나?
어떤 것은 재기 발랄하고 위트가 넘치고, 어떤 것은 강렬하고 독특했고, 어떤 것은 묵직한 감동이 있었다.
이야기마다 지닌 분위기나 특색은 천차만별이었지만, 재미있고 감동적이라는 점은 같았다.
5화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 아쉽고, 뒷이야기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이런 게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상황인 걸까?
가슴이 뻐근해지는 감동, 뒷덜미가 오싹해지는 전율을 느낀 알레스는 이 이야기들이 단순히 자기관리나 계발을 위한 것으로만 그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이 이야기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하고 싶다는 생각에 발을 동동 굴렀다.
‘아, 맞다. 이야기라면 그가 있었지!’
알레스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귀인 하나.
이번에야 말로 당신을… 알레스가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음산하게 웃었다.
알레스가 방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밤비는 급히 서신을 써서 오후 2시 전인 것을 확인하고 우체통에 넣었다.
영지에 있는 공작에게 보내는 기별이었다.
[메르세데스 공작 전하께.
사안이 급한 것 같아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어제 기별을 드렸는데 하루 만에 잇따라 기별을 드리는 이유는, 레이디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방금 전만 해도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리시던 분이 잠시 후엔 눈물을 훔치며 침울해 하셨습니다.
안위를 묻는 제 물음에 실제로 ‘안 괜찮다’고 대답하셨지만, 이내 농담인 척 말을 돌리셨지요.
걱정이 되어 직접 안구 상태까지 확인해 보았지만 주목할 만한 이상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음독이 아닌 것은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정말로 괜찮으신가 싶어 안심하려다가도 문득 음산하게 웃으시는 모습에 걱정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신체적인 이상보다는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있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레이디의 상태가 좋지 않은 가장 유력한 원인은 아무래도 식사의 질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유추해 봅니다.
아시다시피 레이디께선 음식의 맛과 질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시는데, 늘 수준급 요리를 정성스럽게 올리던 브레이브 경이 지금 여행 사업 때문에 메르세데스에 가 있으니 자세한 말씀은 안 하셔도 무척 곤란하실 겁니다.
삶의 낙 중 가장 큰 부분에 지장이 생겼으니 기운이 없으실 만도 하지요.
제가 없는 재주를 끌어모아 곁에서 챙겨 드리려 하지만, 음독의 위험 때문에 신중을 기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라는 것을 전하께 보고 드립니다.
제도에서 밤비 올림.]
* * *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마법식 연구는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는지요?”
아침 댓바람부터 아네모네 저택에 들이닥친 알레스를 브린 황자가 뜨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또 무슨 여우 짓을 하러 온 거지? 뭘로 나를 쥐어짜려고?
카이트도 여기 없는 마당에.
게다가 저 점잖은 척하는 말투는 뭐고? 그게 더 무섭다고.
브린이 몸을 사리며 물었다.
“레이디 페레티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우리 두 사람이 만나는 건 아무래도 조심스럽지 않습니까. 거사를 앞두고 괜히 스노브의 의심을 살 수도 있고.”
사실 스노브보다는 행여 카이트의 오해를 살까 걱정이지만. 그게 더 무섭다고.
정말이지 저 맹수 커플한테 치여서 못살겠네.
“예, 맞는 말씀이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게 제가 이처럼 이른 시간에 달려오다시피 한 건 그만큼 황자 전하께 좋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전하고 싶었던 제 마음을 알아주시면 좋겠네요.”
알레스의 말에 브린 황자는 더욱 몸을 사리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레스는 가져온 원고 뭉치를 내밀었다.
어차피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이야기에 자신 있으니까.
브린도 그 바닥 전문가이니 척 보면 물건인지 아닌지 금방 알아볼 것이다.
그 물건을 가져온 사람이 아무리 꺼림칙한 인물이라도 말이다.
영애들에게 칭찬 폭포를 쏟아 부은 후 허락을 받고 가져온 원고들이었다.
“귀족가 영애들이 필명으로 비밀리에 쓴 소설들인데, 한번 보시겠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브린은 당황했지만, 곧 원고를 받아 그 자리에서 읽어 보기 시작했다.
“받자마자 바로 읽으시네요. 그래도 의자에는 앉은 후에 보시지요?”
“다른 건 몰라도 원고는 묵히지 않는다는 게 내 철칙이죠.”
브린은 눈으로 원고를 읽으면서 대꾸했다.
다소 촐싹대고 가벼우며 땍땍거리는 황자지만, 생긴 것 같지 않게 자기 일에서는 성실하고 솜씨도 좋다는 건 알레스도 인정하는 바였다.
아무리 황자가 만만해 보이고 등쳐먹기 쉬운 타입이라 해도 실력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면 알레스도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브린은 선 채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버린 듯했다.
하나를 다 읽자 쉴 틈도 없이 다음 것을 읽기 시작했다.
자기 앞에 있는 레이디 페레티도 잊고 세상도 잊은 것 같았다.
마침내 원고에서 고개를 든 그의 눈을 보고 알레스는 빙긋 웃었다.
걸려들었네, 빠져들었어.
알레스의 예상이 맞았다.
“영애들이 쓴 소설이라고요? 정말로 처음 쓴 것이 맞습니까?”
그렇게 묻는 브린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굉장한 물건이군요. 대작 냄새가 풀풀 납니다.”
“모두 5화 정도밖에 없는데요? 그것만 보고 단정하실 수 있나요?”
“우리 선수들은 말이죠, 딱 5화만 보면 압니다. 될작인지 아닌지.”
“그래요? 대단한 경지인데요?”
“레이디는 잘 모르시겠지만, 출판업계엔 1화에 목숨을 걸고 5화에 끝장을 보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이 원고들은 모두 뒷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네, 저도 그랬어요. 솔직히 저도 이 이야기들을 보자마자 이건 꼭 책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가장 먼저 황자 전하께 달려온 거지요.”
“이거 정말 감사합니다, 레이디.”
브린이 싹 바뀐 태도와 눈빛으로 인사했다.
“정말 대단한 이야기들입니다. 모두 계약하고 싶군요. 아예 이 소설들에 걸맞은 시리즈를 하나 신설하면 어떨까 싶기도 하고요. 어떤 이름이 좋을까… 뉴 클래식 시리즈? 스토리 퀸 시리즈?”
혼자서 너무 멀리까지 가 버리는 황자였다.
“저 황자 전하, 이 이야기들을 출간하면 대박이 날 거라는 판단에는 저도 동의해요. 애초에 그래서 전하를 찾아온 거고요. 거기에 출간 형태에 관해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요.”
알레스가 이곳을 찾은 진짜 이유를 떠올리며 말을 꺼냈다.
“출간 형태? 표지를 아주 화사하게 꾸미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고급스러워 보이는 양장본?”
그건 출간 형태가 아니라 책의 형태잖아요, 이 황자님아.
“아니요, 제가 말씀드리려는 건 독자들에게 책을 어떻게 보여 줄까 하는 것과 관련이 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레이디 페레티의 평소 행동 패턴을 생각하며 브린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들, 책으로 출간하기 전에 다른 형태로 먼저 출간하는 건 어떠세요?”
“네? 책이 아니면 어떻게 출간을 한다는 거지요?”
“황자 전하의 특기와 무기가 있잖아요. 기왕이면 그걸 이용해 보는 거죠.”
“내 특기와 무기?”
“탈라리아 매신저 같은 마법 통신구로 읽을 수 있게 하는 거 어때요?”
“지금 마법 통신구와 통신망을 이용하자는 겁니까? 배보다 배꼽이 크지 않으면 좋겠군요.”
“그래서 헤르메스의 탈라리아를 말씀드린 거예요. 빌보아 차트의 순위 집계나 여론 조사를 그걸로 하잖아요. 활용 방향을 반대로 해 보자는 거죠.”
“어디서 어디로?”
“지금까지는 사람들한테서 정보를 수집했다면, 이번엔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는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