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해
“세상엔 말이야,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게 하는 독도 있어. 평생을 남의 이야기에 종속된 삶을 살게 하는 독이지.”
“그런 독이 있어요? 끔찍하네요.”
저녁식사를 한 후 드래곤 특강이 이어졌다.
카르티에 저택의 음식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헤라클레스가 메르세데스로 출장을 가고 없는 요즘, 알레스는 간만에 살아 있는 음식을 먹는 기분을 만끽했다.
사실 카르티에 저택에서 저녁을 해결하는 건 이곳에 올 때부터 알레스의 계산에 있던 일이었다.
넋 놓고 식탐 발동하며 우물거리다 밤비가 떠올라 조금 미안했지만.
카르티에와의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밤비를 먼저 돌려보냈다.
제품 주문 때문에 일거리가 잔뜩 밀리기도 했고.
미안, 밤비 경 몫까지 내가 충분히 먹고 갈게.
신들린 듯 씹어 삼키는 알레스의 모습을 카르티에가 기겁한 얼굴로 쳐다봤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그렇게 배불리 먹은 후라 살짝 졸음이 왔지만, 독 이야기에 알레스는 반짝 정신이 들었다.
“그 끔찍한 독을 다른 말로 질투라고 하지.”
“아, 질투.”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그의 불행을 자양분 삼아 살아가는 자들은 주인공이 될 수 없어. 누군가를 질투하는 순간 그 삶에 신경 쓰느라 자기 삶을 잊게 되거든.”
절로 스노브의 흉흉한 얼굴이 떠오른 알레스가 말했다.
“제가 아는 어떤 독버섯이 생각나네요. 지체 높고 고상한 귀족의 탈을 쓰고 있지만 결국 질투를 품은 곰팡이였군요.”
“표현 한번 정확한데? 그런 자의 삶은 노예의 삶이라고 할 수 있지. 남의 삶에 영원히 종속돼 있으니. 그런 자들은 끽해야 남의 이야기에 긴장감이나 더해 줄 뿐이잖아.”
카르티에는 주인공 이야기에서 알레스가 새로 벌였다는 매니지먼트 사업 이야기로 넘어갔다.
“자기관리법이 궁금하다고 했나?”
“영애들의 고민 상담을 하다 보니 뭔가 미진한 느낌이 들어서요. 철저한 관리 하면 카르티에 공작 전하 아닌가요?”
“알긴 아는군.”
“자기관리나 자기계발에 대해 전하의 조언을 들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지금까지 했던 주인공 얘기를 접목시켜 보면 어떨까?”
“주인공을요? 어떻게?”
“영애들에게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써 보라고 하는 거지. 자신이 꿈꾸는 삶을 그대로 이야기로 만들어 보는 거야.”
“오, 카르티에 전하. 당신은 진정 위대한 드래곤이었군요.”
“영광인 줄 알아.”
당신이 알려 준 방법은 내가 잘 주워 먹을게요.
느끼한 게 흠이지만 늘 최고만 보여 주는 카르티에는 앞으로도 자신이 쫓아가야 할 이정표일 거라고 알레스는 다시금 생각했다.
“자, 이제 나 허브 탕에서 바스 타임 가져야 하니까 이제 그만 가.”
카르티에가 이렇게 말하며 용틀임하듯이 기지개를 켰다.
역시 자기관리가 철저하시군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꼭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여러 번 물을까 말까 주저하던 알레스가 더는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마침내 운을 뗐다.
“실은 이쪽 세상으로 온 뒤로 줄곧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어요.”
“더 묻고 싶은 게 있나 보군.”
“난 내 이야기를 찾아 이곳으로 왔다지만… 원래 이 몸의 주인인 알레스는 어떻게 된 거죠?”
알레스는 가슴 한편에 늘 묵직하게 얹혀 있던 의문을 용기를 내 꺼내 놓았다.
“원래 알레스?”
“네. 페레티 백작 부부의 진짜 영애요.”
“흠….”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는 듯하던 카르티에는 따끈하고 향기로운 허브탕으로 홀홀히 가 버렸다.
이런 말을 남긴 채.
“그녀도 어딘가에서 주인공으로 살고 있다면, 언젠가 그 이야기를 우리도 듣게 되겠지. 기다려 보자고.”
* * *
“해밀턴 영애, 2단계 수칙은 잘 지키고 있겠지요?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니까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해요.”
레이디 페르소나가 매니지먼트 고객인 해밀턴 영애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힘들지만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어요. 스칼지 백작님을 안 보고 참는 것만으로 너무나 괴로운데, 심지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흐음, 짐작이 가는데요?”
“레이디의 말이 맞았어요! 어제는 글쎄 제가 오가는 길에 일부러 숨어 계시다가 우연인 척 막아서는 거예요.”
“어머나, 귀여우셔라.”
레이디 페르소나의 맞장구에 해밀턴 영애도 눈을 초승달처럼 접으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얼른 몸을 숨기는 백작님의 옷자락을 제가 이미 보았는데 말이죠. 연모하는 분의 일거수일투족, 작은 움직임, 머리카락 한 올과 그림자까지 얼마나 잘 보이는지.”
두 손을 모은 채 환희에 찬 말들을 재잘대는 해밀턴 영애의 모습을 보며 레이디 페르소나는 생각했다.
당신이 더 귀여워.
페레티 매니지먼트사에 연애 상담을 요청한 해밀턴 영애는 지금 ‘연애 불패 밀당의 기술’ 중 2단계에 도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을 환히 밝히던 기쁨의 빛이 이내 사라지며 해밀턴 영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잠시 정신을 놓을 뻔했지만 레이디와의 약속, 아니 저 자신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매몰차게 백작님을 모른 척했답니다. 순간 그분의 얼굴에 떠오른 황당함과 서운함과 노여움의 표정이라니.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답니다.”
해밀턴 영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레이디 페르소나가 그녀의 손등을 다정하게 도닥였다.
“잘해 냈어요, 영애. 지금 느끼는 괴로움과 슬픔이 앞으로 몇 배 큰 행복과 기쁨을 약속할 거예요.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잘했어요.”
“고맙습니다. 레이디의 격려 덕분에 힘들지만 견딜 수 있었어요.”
“이젠 제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영애는 2단계를 훌륭하게 견뎌 내시겠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아니, 잘하면 3단계 고급 기술까지도 구사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불꽃 따귀 말인가요?”
왜 기대하는 표정이 지나간 것 같지? 잘못 본 거겠지?
“아, 네네. 물론 꼭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라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진 마시고요.”
“어머, 그럼요, 호호.”
웃는 입을 가린 손이 유독 매워 보였다.
“참, 해밀턴 영애, 저희가 새로 개발한 자기관리법이 있어서 소개해 드리려고요. 특허까지 신청한 매우 효과적이고 특별한 관리법이랍니다.”
“무척 궁금한데요?”
“안 그래도 요즘 2단계 수행 중이시라 바깥 활동 하기 힘드시잖아요. 또 스칼지 백작님 생각에 마음이 싱숭생숭 어지러우시고요.”
“네, 바로 딱 그렇답니다.”
“이럴 때 마음을 줄 다른 일이 있다면 견디기 한결 수월한 법이죠.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보다는 자신을 향상시키는 일이면 더욱 좋을 테고요.”
“그렇지요. 한동안 그분의 애를 태우다가 짜잔 하고 그 앞에 나타났을 때 기왕이면 전보다 멋져진 모습이면 좋잖아요.”
“현명하세요, 영애.”
레이디 페르소나는 우선 맞장구를 치고는 말을 이었다.
“연애를 열심히 하는 것도 멋진 일이죠. 자신의 사랑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건 인생에서 매우 고귀하고 중요한 일이잖아요? 그런가 하면 인생에는 또 다른 가능성도 있지요.”
“연애가 아닌 다른 일 말씀이신가요?”
“네, 우리 인생은 연애만 하기엔 너무 기니까요. 마침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 때, 다른 일도 한번 구상해 보시면 좋지 않겠어요?”
“말씀을 들으니 그렇긴 하겠네요.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영애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써 보는 거예요.”
“저를 주인공으로요? 소설 같은 걸 쓰라는 말씀인가요?”
“네, 무엇을 쓰셔도 좋아요. 스칼지 백작님과의 러브 스토리를 쓰셔도 좋고, 앞으로 하고 싶은 다른 일에 대해 쓰셔도 좋고요.”
“저 자신을 집어넣고 싶은 이야기를 쓰라는 말씀이군요.”
“이해력이 좋으세요, 영애.”
“좋아요, 한번 해 볼게요. 마침 몰두할 일이 필요하던 참이고, 재미도 있을 것 같아요.”
“저도 눈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한 편 썼는데, 마음이 복잡할 때 큰 위로가 됐어요.”
“어머, 레이디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쑥스럽지만 그 이야기로 노래 연극도 만들었어요. 지금은 메르세데스령에서 상연하고 있고요. 겨울이 끝나면 제도에서도 상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너무나 멋진 일이네요. 제도에서 하면 꼭 가서 보고 싶어요. 기왕이면 스칼지 백작님과 연인 사이가 되어 함께 보러 가면 좋겠네요, 호호호.”
“영애의 이야기도 기대할게요.”
* * *
“저, 여행을 떠나기가 힘들어졌어요.”
“저런, 무슨 일이 있었나요?”
토르테 영애가 레이디 페레티의 상담소에 와서 기운 빠진 얼굴로 말했다.
만성 편두통을 앓는다기에 여행을 떠나라고 권한 영애였다.
가문에서 외국과의 무역으로 돈을 꽤 벌어들였기에 여행 경비 걱정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외국 물정에 밝은 가문이기에 기왕이면 멀리 떠나라고, 외국도 좋다고 권한 터였다.
얼마 전까지 여행 계획을 세우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았는데.
혹시 집안 분위기가 보수적이어서 허락을 받지 못한 걸까?
“가문의 상황이 갑자기 나빠져서요. 여행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좀 그래서요.”
“자작가의 재정은 꽤 탄탄하지 않았나요?”
“그게… 외국의 거래처에서 갑자기 약속을 어겨 큰 손해를 입게 됐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물을 싣고 오던 배 한 척이 해적에게 납치됐고요. 부친은 선원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시느라 경황이 없으시고요.”
“저런, 상심이 크시겠어요.”
이거 뭔가 냄새가 난다. 스노브 영감의 구린내가.
외국과의 무역에 관해서는 스노브가 이권을 장악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무래도 토르테 자작이 스노브에게 뭔가 밉보인 것 같았다.
레이디 페르소나가 토르테 영애의 손을 단단히 쥐고서 말했다.
“영애, 이상한 소리 같겠지만 날 믿고 들어주세요.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반드시 상황이 좋아질 테니 자작님께 결코 포기하지 말고 버티셔야 한다고 영애가 곁에서 말씀드려 주세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처음엔 눈만 깜빡이던 토르테 영애가 이내 영민해 보이는 눈에 결연한 빛을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레이디.”
“그리고 상황이 안타깝게 됐지만, 여행의 꿈도 버리진 마세요. 여행 계획을 말할 때 영애가 무척 행복해 보였거든요.”
“맞아요, 편두통도 많이 호전됐죠.”
“곧장 떠날 수는 없더라도 영애의 꿈은 계속 이어 가세요. 이야기를 통해서요.”
“이야기요?”
“실은 저희가 새로 도입한 자기관리법이 있거든요.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써 보는 거예요. 영애가 떠나려고 했던 그 여행, 직접 가기 전에 이야기를 통해서 먼저 떠나는 거죠.”
“아, 제가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 겪는 이야기를 상상해서 쓰는 거군요.”
“영애의 이야기는 저도 몹시 궁금한데요? 쓰시면 저한테도 보여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