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이것이 주인공 버프
천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드래곤 특강이 시작되었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힘 중 최고의 힘이란 게 있지. 뭐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더군. 절대자라거나 신이라거나 대자연이라거나 우주라거나 법칙이라거나.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면 돼.”
알레스가 뭘로 할까 생각하다 물었다.
“당신 같은 드래곤도 그 힘의 지배를 받나요?”
카르티에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자존심 상하지만, 그래.”
“그렇다면 최고의 힘이 맞긴 한가 보네요.”
“난 주로 꿈이라고 불러.”
“꿈? 왜 하필 꿈이에요?”
“변덕이 심하고 이중적이거든. 왜 덧없는 과거도 꿈, 희망찬 미래도 꿈이라고 하잖아.”
“의미야 어떻든 듣기에는 꽤 예쁘네요. 절대자를 지칭하는 말치곤.”
“하여간 최고의 힘 그 양반이 이야기를 참 좋아해. 다양한 이야기의 씨앗으로 이 세상을 꽉꽉 채웠지.”
“갑자기 이야기라니….”
“방금 이야기 씨앗이라고 했지?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았단 뜻이야. 이 양반 취미가 자기가 심은 이야기가 어떻게 자라서 뻗어 나가나 지켜보는 거지.”
“그럼 심은 사람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예요?”
“대강 짐작이야 하겠지만, 세세한 과정이나 디테일까진 모를 거야.”
“약간 악취미 같네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히 정해져 있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나씩 받았다는 것.”
단호한 어조로 말하던 카르티에가 이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당신한테만 기회를 한 번 더 줬을까? 보통은 아무리 눈 뜨고 못 볼 망작을 만든다 해도 그걸로 끝인데 말이야.”
가늘게 뜬 카르티에의 눈 속에서 루비 조각이 붉은 빛을 발했다.
“왜 하필 당신한테만 후하게 인심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건 이유를 알 것 같아. 거기서나 여기서나 악녀이긴 마찬가지인데 왜 거기선 비참했고 여기선 바라는 대로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건지.”
“저도 그것 때문에 문득문득 불안해요. 내 몫이 아닌 행운을 가로챈 것 같아서. 사실 진짜 내 몸도, 내 삶도 아니잖아요.”
“아니, 정확하게 당신 몫이야. 갑자기 모든 게 당신의 생각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건 당신이 주인공이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지.”
“그런 결심은 한 적도 없지만, 설령 결심했다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죠?”
알레스가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 보냈다.
“무슨 상관이냐니. 그게 처음이고 끝이고 전부인걸.”
카르티에가 진실을 알고 있는 자의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인공인데 어떻게 일이 안 풀릴 수 있겠어? 주인공이 안 되는 이야기 봤어?”
“그러니까… 내가 왜 갑자기 주인공이냐고요.”
“주인공이 된다는 건 자기 이야기를 더 이상 피하지 않는다는 거고, 엉뚱한 곳에 가서 기웃거리지 않는다는 거고, 자기 이야기를 제대로 끌고 간다는 거야. 어때? 왜 주인공이 됐는지 알겠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알레스가 더욱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하자 카르티에의 고운 눈썹이 꿈틀했다.
“흠, 내가 인간의 이해력을 과대평가했나.”
“기분만 나빠지려고 하는데요?”
“하나하나 입에다 넣어 줘야 하는군.”
그는 용무늬 잔에 담긴 터치 오브 카르티에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첫 번째로 출시한 커피, 키스 오브 카르티에가 부드럽고 향긋한 풍미를 자랑했다면, 최근 출시한 터치 오브 카르티에는 다크로스팅의 깊고 묵직하고 강렬한 맛이 나는 커피였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입 안에서 커피를 굴리던 카르티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쪽 세상에서 당신은 눈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눈사람지기였지. 하지만 그 역할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으로 살기로 결심했어. 악녀로 살기로 말이야.”
알레스가 침묵으로 수긍했다.
“말이 악녀지, 남의 이야기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넣은 거라 아무리 아등바등 살아도,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굴어도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없었겠지. 애초에 자기 이야기가 아니니 주인공이 되는 건 턱도 없고 남의 이야기 속 악역 정도나 됐겠지.”
“그래서 그렇게 되는 일이라곤 없었나.”
“엉뚱한 데서 삶을 낭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정말 치열하게 살았는데….”
“하지만 여기로 와선 많은 것이 바뀌었지. 자기 이야기를 제대로 찾아왔단 뜻이야.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당신은 주인공이 되기로 한 거야. 그러자 모든 것이 당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지.”
“내 이야기란 건 눈사람지기의 이야기란 건가요?”
알레스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그렇지. 저쪽 세상에서 당신이 도망치려고 했던 그 이야기.”
“하지만… 눈사람지기라고 해도 아무것도 지킬 수도 막을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걸요. 여기서도 눈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아니, 당신이 그들을 바꾸거나 구제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눈사람에겐 눈사람의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럼 눈사람지기의 역할은 뭐죠? 제가 여기 와서 뭘 했다는 거예요?”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봐 주는 것, 그들을 기억해 주는 것. 그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는 것. 그런 게 눈사람지기의 역할이야.”
“기억해서 전하는 것….”
“당신은 자기 이야기를 찾아 눈사람 중의 눈사람, 눈사람의 왕에게 왔는지 모르지. 그리고 이번엔 눈사람들을 모른 척하지 않았어. 그들을 각자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게 하려고 노력했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썩히고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인데….”
“어쨌든 이번엔 못 본 척하지 않았지. 자신을 위한 것이었든, 눈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든 움직이기 시작했어. 당신이 고군분투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어 보였는지, 나조차도 흥미를 갖게 될 정도였지. 축하해. 자기 이야기를 찾은 걸.”
카르티에가 화사하게 웃으며 우아하게 박수를 쳤다.
잠시 멍하게 있던 알레스가 따지듯 물었다.
“주인공이 되기 싫은 사람도 있나요? 누구나 주인공이 되길 꿈꾸지만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순 없는 세상이잖아요.”
“응, 좋은 지적이야. 있더라고. 꼭 주인공이 되기 싫은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누구나 얼마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는데 그걸 마다하고 헛짓거리들을 하더라고.”
“그건, 당신 말마따나 인간이 하등한 종족이라서 그런지도 모르죠. 드래곤인 당신이 보기엔 인간이 아등바등하는 게 한심해 보일지 몰라도, 인간들에겐 주인공이 되는 게 녹록치 않은 일이라고요.”
“쉬운데? 자기 이야기에선 자기가 주인공이잖아. 자기 이야기에선 숨만 쉬어도 주인공이라고. 문제는 자꾸만 남의 이야기에 가서 기웃댄다는 거지.”
“뭔가 김빠지는 소린데요.”
“방금 말했잖아.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데도 되지 못하는 이유. 번지수를 잘못 찾았기 때문이라고. 어떻게 하면 주인공이 될까 머리를 싸매기 전에 이야기를 제대로 찾아왔는지부터 살펴봐야지.”
“자기 이야기보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더 탐나면요? 자기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요?”
“저쪽 세상에서 한번 해 봐서 알지 않아? 나름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다며?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려고 기를 쓰고 발버둥을 쳐도 결국 결과는 어땠지? 남의 이야기에서 한바탕 쇼를 한 거밖에 더 돼?”
알레스는 간만에 쓰린 감각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다른 이야기가 더 좋아 보인다, 내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할 문제지. 정말로 나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실은 남의 눈을 의식하고 남의 기준에 맞추려 한 건지.”
“아니면 그저 비겁했던 것일지도요.”
“그거야 인간 나름의 사정이 있을지 모르겠네. 여하튼 자기 이야기가 있어야 주인공이지. 공주랑 공주병은 다른 거잖아?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하고 과시해도 결국 남의 이야기에 ‘자의식 과잉의 엑스트라’로 기록되겠지.”
“잔인하네요, 정말.”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법칙이나 힘은 인간의 관점에선 잔인하지.”
“듣다 보니 주인공이라는 게 무슨 만능열쇠 같아요.”
“만능이지. 다 알게 되면 깜짝 놀랄 정도로.”
알레스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카르티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갈구하는 눈빛을 보내면 내가 가만있을 수 없잖아.”
“말 좀 느글거리게 하지 마세요.”
“대체 내 필살기가 왜 안 통하는지 모르겠어. 다들 내 매력에 깜빡 넘어가는데 말이야. 눈사람 말고는 눈에 안 들어오나 봐.”
“눈사람 아니라도 눈에 들어오고요, 그저 버터가 제 취향이 아닐 뿐입니다.”
“역시 재밌단 말이지.”
“전 한껏 진지한데요.”
“그만 좀 웃겨.”
입으로는 저렇게 말하면서 카르티에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아 놔, 용존심 상해.
하긴 저렇게 톡 쏘는 면이 레이디 페레티의 매력이지.
2300년 전에 만났던 드래곤 레이디 디아나를 생각나게 하잖아?
카르티에는 그녀의 톡 쏘는 화염 맛을 생각하면서 특강을 이어갔다.
“당신이 메르세데스의 순위를 올리기 위해 안달복달하는 그 빌보아 차트 말이야, 그 역시 다른 게 아니라 주인공 자질 순위라고 보면 돼.”
“빌보아 차트가요?”
“얼마나 충실하게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차트라고 할 수 있지.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황제마저도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어.”
하긴, 오죽하면 독초를 씹어 가며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겠어. 아주 상 주인공이지.
알레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로잘린 황녀가 갑자기 순위에 오른 이유? 자기 이야기를 찾았기 때문이지. 연모인 클럽의 회원 중 하나이던 황녀가 자기 연모인 클럽을 거느리게 됐지.”
“빌보아 차트 붙박이 1위인 당신은 그럼….”
“뭐? 그걸 말해야 아나? 나 드래곤이야.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 당연히 주인공 중의 주인공이자 세계의 왕이니 1위는 나의 운명이지. 빌보아 차트 자체가 나를 위해 준비된 이야기랄까.”
그만, 그만!
알레스가 질린 표정을 짓자 자제한 카르티에가 일부러 메르세데스 이야기를 꺼냈다.
“카이트를 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주인공감이잖아?”
“뭐 그건 그래요. 언제 어디서나 그의 머리 위로 주인공 조명이 떨어지죠.”
알레스가 미간을 펴고 곧장 수긍했다.
“그래서 나는 카이트를 좋아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외면하거나 도망친 적이 없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말이야. 남들 보기엔 그 삶이 좀 피곤하고 답답하고 괴팍할지 몰라도, 본인은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길 포기한 적이 한 번도 없지. 그는 늘 정면 돌파였어.”
왠지 애처로운 이야기였다.
눈사람의 이야기는 늘 이렇게 알레스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카르티에의 말대로라면 결국은 먼 길을 돌고 헤매다 되돌아오고 말았지만.
눈사람의 곁을 지키는 눈사람지기의 이야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