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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12화 (110/120)

112화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전하가 용이라고요? 등에 있는 그 문신 얘기가 아니라?”

알레스는 얼결에 카르티에 공작의 뒤태가 아니라 본모습까지 엿보고 말았다.

멀쩡하게 옷을 갖춰 입은 카르티에가 고개를 까딱했다.

두 사람은 호수가 있는 숲에서 돌아와 저택의 응접실에 마주앉아 있었다.

멜로먼 퐁파두르 카르티에 공작은 실은 용 혹은 드래곤이라 불리는 상위 종족이라고 했다.

용은 원래 스스로를 신에 버금갈 만큼 완벽한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인간 같은 하위 종족 따위는 상대하지 않고 홀로 고고히 산다고 한다.

그렇게 몇 천 년을 살았더니 조금 심심하고 지루한 것 같아 폴리모프라고 부르는 인간화를 거쳐 속세에서 유희 중이라나.

어쩐지 너무 완벽해서 인간이 아닌 것 같더라니. 정말로 인간이 아니었잖아!

“장난이죠?”

알레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카르티에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저 말을 믿으라고?

“레이디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난들 내 정체를 밝히고 싶었겠습니까. 음흉한 레이디에게 내 순결한 모습을 들키지 않았다면.”

“말씀 참 이상하게 하시네요. 그냥 조용히 사라지셨으면 저도 몰랐을 거 아니에요. 호수에서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겠죠.”

“오, 그럴 수도 있었겠네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내가 꽤 흥분하고 말았거든요.”

카르티에가 퇴폐적인 눈빛을 줄줄 흘리며 알레스를 주시했다.

저 인간이 호수 물을 잘못 먹었나?

알레스가 미간을 찌푸리는데 카르티에의 얼굴이 닿을 듯이 바짝 다가왔다. 서로의 호흡이 얽혀 들었다.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알레스는 결국 침을 꾸울꺽 삼키고 말았다.

뭐야… 잡아먹으려는 건가? 자기 정체 들켰다고?

일진 한번 사납네.

여차하면 찜질방 삶은 달걀한테도 깨진 실력으로 박치기라도 할까 어쩔까 알레스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카르티에의 입술이 알레스의 귓가를 파고들어 낮게 속삭였다.

“당신, 이 세계 사람 아니지?”

알레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지나갔다.

알레스가 얼른 얼굴을 때고는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카르티에가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방금.”

“방금이라면…?”

“아까 호수에서 본체화 했을 때 기운을 감지했지. 아무래도 폴리모프한 동안은 감지력이 좀 둔해지거든. 이물질 냄새가 확 나더라고.”

“이물질이라뇨!”

“동족이란 뜻이야. 당신이나 나나 원래는 이 세상에 속한 인간이 아니지.”

“갑자기 말투가 싹 달라지셨네요.”

“아, 같은 이물질끼리 있으니 내가 너무 편하게 풀어졌나.”

난 하나도 안 편한데? 알레스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어쩐지 인간 중에선 드물게 재미있다 했더니, 그런 깜찍한 이유가 있었군. 드래곤의 관심을 끄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야.”

“이거 영광이네요.”

“역시 재밌다니까.”

알레스는 여전히 믿기지 않았지만, 자신의 비밀을 이처럼 한눈에 꿰뚫어보기까지 하니 카르티에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드래곤이란 증거가 여기저기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이 응접실만 해도 비늘이 가득 달린 괴물의 모습이 아름답게 그려지거나 새겨진 장식품이 많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 역시 용 무늬가 화려하게 상감돼 있었다.

그때 부득이하게 훔쳐보게 됐던 그의 뒤태 역시 목에서부터 발목까지 용 문신이 꿈틀대고 있었고.

물로 가득 찬 그 몽롱하고 축축한 방도 그렇고, 물 계열 마법사라는 것도 그렇고.

그는 인간이 아니고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저기요, 용이면 신비한 능력 같은 것도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인간은 볼 수 없는 걸 본다든지, 서로 다른 세계를 넘나든다든지.”

“묻고 싶은 게 있나 보군?”

“제가 이물질이라는 걸 알아봤으니, 혹시 왜 여기 오게 된 건지도 알고 있나 해서요.”

카르티에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더니 발을 까딱거렸다.

“궁금해? 세상의 비밀을 알려주는 대가는? 공짜는 없다고 말했을 텐데.”

그랬지. 당신의 신조는 ‘공짜는 없다’, 내 신조는 ‘밥값은 하자’.

참 이물질스럽군.

알레스는 팔짱을 끼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관두세요.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 아니거든요. 솔직히 지금까지 살기 바빠서 궁금해 할 겨를도 없었어요.”

“세게 나오네. 하긴 그래야 레이디 페레티지.”

카르티에는 예의 그 퇴폐미 듬뿍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몰라. 다른 세상에서 당신이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짐작 가는 건 있지.”

알레스는 카르티에를 만나려 했던 목적을 떠올렸다.

“실은 제가 요즘 새로운 사업을 또 하나 팠거든요. 주로 영애들의 고민을 듣고 해결책을 의논해 주는 상담소 역할이에요. 오늘 뵙기를 청한 것도 이 일 때문에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였고요.”

“정말 놀랍군. 그새 또 새로운 사업을 벌인 거야? 메르세데스 여행 사업을 벌인 지도 얼마 안 됐잖아. 나한테 신상 액세서리를 보낸 지도 얼마 안 됐고.”

“지난번 황실 무도회 때 영업한 효과를 톡톡히 봤죠. 사실 이렇게 빨리 반응이 올 줄은 몰랐어요.”

“황실 무도회 때 영업을? 정말이지 당신은 날 얼마나 자지러지게 할 셈이지? 마르지 않는 재미의 샘이라니까.”

“저한테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정말이야? 다른 세상에서는 어땠지? 재미가 없었나?”

“거기선… 재미는커녕 사람들이 저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했어요.”

“그건… 여기서도 마찬가지잖아.”

콱! 알레스가 카르티에의 짓궂은 얼굴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래요! 하지만 여긴 적어도 친구가 있죠. 극소수이긴 하지만요. 아무래도 이 몸의 원래 주인 덕분인 듯하지만.”

“거기선 친구도 없었어?”

“음… 네. 자랑은 아니지만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제가 좀 악독한 편이었거든요.”

“그건… 지금도 그렇잖아?”

우씨! 알레스가 천연덕스런 얼굴로 이죽거리는 카르티에를 향해 눈을 흘겼다.

“아 네네, 심하게 사악했습니다. 다들 절 악녀라고 불렀어요. 일하던 곳에서 성공하려고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죠. 됐습니까!”

“그런데 거기선 성공도 못 하고 친구도 없었고 재미도 없었다는 얘기지?”

“하아, 너무 대놓고 후려치는 거 아닙니까?”

“여기 와선 손대는 일마다 잘되고 친구도 생기고 무려 드래곤에게 재미있다는 인정도 받고.”

“드래곤의 인정은 필요 없다고요.”

알레스가 열을 내든 말든 카르티에는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 됐다.

“참 이상하네. 악녀에게 왜 기회를 준 걸까?”

“기회요?”

“거기선 아등바등해도 손에 넣지 못했던 걸 왜 이리로 와서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줬느냔 말이야. 하필 악녀에게.”

“하긴 여기 온 후로 일이 이상할 정도로 잘 풀리긴 했어요. 웬만한 건 제가 의도한 대로 됐으니까.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불안할 만큼 운이 좋았어요.”

“흐음….”

카르티에가 루비 같은 눈을 반짝이며 알레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영혼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혹시 나한테 털어놓지 않은 비밀 같은 게 있어?”

알레스는 속으로 움찔했다.

카르티에는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리 당신이 이물질이라도, 그것만으로는 이 위대한 드래곤 님의 관심을 끌기가 쉽지 않단 말이지. 격이 맞지 않잖아? 드래곤과 대등하게 관계를 맺으려면 그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거든.”

카르티에의 붉은 눈동자가 묘한 빛을 발했다.

“자, 당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차례야. 당신도 내 비밀을 알았으니까. 교류의 대가는 이것으로 하지.”

애써 잊고 살고자 했고, 이쪽 세상으로 와서는 거의 벗어났다고 생각한 일을 또 끄집어내야 하다니.

알레스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카르티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 전 눈사람 병이 있어요.”

“눈사람 병이라면 눈사람이 보인다는 그?”

“눈사람 병을 아세요?”

“뭐 조금. 역시 눈사람들의 수호자였군. 그래, 그 정도는 돼야 드래곤의 친구가 될 만하지.”

카르티에가 흡족한 표정을 짓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왜 악녀가 됐지? 눈사람의 수호자가 악녀가 되긴 쉽지 않을 텐데?”

“수호자는 무슨요. 그냥 눈에 이상한 게 보이는 병이 있었고, 그런 병을 달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안 보이는 척하기로 했어요.”

“그게 안 보이는 척한다고 안 보이는 게 아닐 텐데?”

“네, 그래서 화가 치밀더라고요. 난 알고 싶지 않은데 자꾸 보여 주니까. 보면 마음이 안 좋으니까. 그런데 또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없으니까. 나더러 대체 어쩌라는 건지.”

알레스는 실로 오랜만에 예전처럼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를 원망이 반항심으로 변했고요. 보란 듯이 눈사람들과는 정 반대로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겠지. 왜냐하면 그건 당신 이야기가 아니니까.”

“내 이야기요?”

“당신이 왜 이쪽 세계로 왔는지 이젠 좀 더 알 것 같군.”

“눈사람이랑 관련이 있나요?”

“내 생각은 그래.”

“여기 와선 눈사람이 보인 적은 딱히 없는데요…. 꿈에서만 한 번 봤나?”

“그렇지만 눈사람 중에서도 상 눈사람이 한 명 있잖아?”

이 공작, 아니 용은 어디까지 얼마나 아는 거야?

괜히 민망해진 알레스가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나도 눈사람 참 좋아하는데.”

카르티에가 갑자기 몽롱한 눈빛을 흘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이 고상한 드래곤이 그나마 상대해 주는 인간은 고고하고 고결한 정신을 지닌 인간, 즉 눈사람들이지. 메르세데스처럼 말이야.”

“카이트 말이에요?”

“그렇지. 당신이 여기 오기 전에 내가 유일하게 애정하던 인간. 그러고 보니 우리 이상형이 겹치네?”

이상형이라니….

황녀에, 푸른 불꽃의 고결 연모인 클럽 영애들에, 영지민들에, 그것도 모자라 드래곤까지 꼬이는….

이 눈사람 공작 정말 어떻게 된 거야? 저주 풀리더니 폭주하는 거야?

알레스의 황당한 얼굴을 보며 카르티에가 매우 교태로워 보이는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렇게 아끼고 애정하는 인간이라면서, 카이트가 힘들고 괴로울 때 왜 도와주지 않았어요?”

알레스가 따지듯 물었다. 저주에 걸린 걸 알았을 텐데 왜 모른 척한 거야?

“우리 드래곤은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아. 인간들의 권력이나 욕망, 희로애락에도 관심이 없지. 다만 인간 사이에서 약간의 유희를 즐길 뿐.”

잘났다, 잘났어. 얄미운 마음에 알레스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자, 나한테 상담 받으러 온 거랬지? 상담하는 법을 상담하러 온 거랬나?”

“그런 셈이었죠. 참, 아까 그런 말 했잖아요. 저쪽 세상에서 되는 일이 없었던 건 내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고.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알레스는 줄곧 마음이 쓰이던 것에 대해 물었다.

“안 그래도 그 얘길 하려고. 지금부터 이 드래곤 님이 천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귀한 특강을, 그것도 일대일로 해 줄 테니 잘 듣도록.”

카르티에가 어깨를 으쓱하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들었지? 드래곤은 웬만해선 인간들 일에 참견 안 한다고. 특강료는 당연히 매우 비쌀 예정이야. 앞으로 나를 얼마나 재미있게 해 줄지 기대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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