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11화 (109/120)

111화

카르티에 또 벗다

“영애가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아니 지금까지보다 더 많이 더 적극적으로 백작님께 잘해 주세요.”

레이디 페르소나가 연애 상담을 하러 온 해밀턴 영애에게 말했다.

“네? 잘해 주라고요? 그거야 제가 늘 해 오던 일이라 어렵진 않은데… 괜찮을까요?”

해밀턴 영애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절 믿으세요. 기왕이면 지나치다 싶게, 요란하게 잘해 주시면 더 좋아요. 영애가 원하는 만큼 양껏 맘껏 좋아하는 티를 내세요. 사방팔방 소문나게.”

“정말로 그렇게 해요? 저… 레이디처럼 평생 가면 쓰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니죠?”

“하하, 걱정 마세요. 그게 다가 아니니까요. 실은 그다음이 정말 중요해요. 여기서부터 이 악물고 독해지셔야 해요.”

“벌써부터 떨리네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연애 고수들이 절대로 실패할 수 없다고 말하는, 백전백승 밀당의 기술이지요. 이 방법이면 백작님 아니라 누구라도 넘어오지 않을 수 없답니다. 게다가 잘하면 영애와 백작님의 관계가 완전히 뒤바뀔 수 있어요.”

해밀턴 영애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극정성으로 잘해 주다 어느 날부터 연락을 딱 끊고 종적을 감추는 겁니다. 그때부터는 절대로 백작님 눈에 띄어선 안 됩니다. 그분 근처에 그림자도 얼씬하면 안 돼요.”

“그럼 백작님이 아주 홀가분하다고 좋아하지 않을까요?”

레이디 페르소나가 해밀턴 영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이때 영애의 태도가 매우 중요해요. 이번 일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보면 됩니다. 영애의 삶에서 백작님을 완전히 도려낸 듯한 태도를 보여야 해요. 하실 수 있겠어요?”

“아아….”

이 정도 가정에도 해밀턴 영애는 마음이 약해진 듯했다.

“이미 말했지만 심성이 고운 영애에겐 쉽지 않은 일일 거예요. 하지만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굳은 신뢰예요.”

“레이디에 대한 신뢰요?”

“아니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요.”

“…….”

“그렇게 연락을 끊으면 영영 잊히는 게 아닐까, 영원히 멀어지는 게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들 거예요.”

“맞아요. 벌써부터 걱정이 돼요.”

“하지만 영애는 그렇게 쉽게 잊힐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백작님 마음속 당신의 자리는 이미 매우 커져 있을 거예요. 그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해밀턴 영애가 다시 결의에 찬 눈을 빛내며 힘주어 말했다.

“한번 해 볼게요.”

“좋아요. 영애가 행적을 감춘 동안 애가 닳는 건,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영애가 아니라 백작님이 될 겁니다.”

“사실 상상이 안 가요. 백작님이 정말 절 궁금해 하실까요?”

“자신에게 열렬히 구애하던 사람이 갑자기 소식을 뚝 끊는다? 궁금함을 넘어서 사람 미치게 하는 거거든요 이게.”

“어머, 백작님이 괴로워하실까요?”

“섣부른 동정심으로 대사를 그르치면 안 됩니다, 영애. 그와의 아름다운 미래를 생각하면서 독해져야 해요. 그가 보이는 조바심에 무관심하게 반응해야 해요. 그래야 그가 몸이 달아서 당신에게 집착하죠.”

“몸이 달아서 집착… 오호호호.”

“여하튼 영애가 냉정하게 나올수록 그동안 보지 못했던 그의 낯선 모습들을 보게 될 겁니다.”

“열심히 해 볼게요.”

“여기까지만 잘해도 충분하긴 한데, 더 극적인 반응을 얻어내는 심화 단계가 있긴 하거든요.”

“뭔데요?”

해밀턴 영애가 부쩍 의욕을 보였다.

“그런데 좀 더 두둑한 배짱과 약간의 연기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거라서… 영애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감당해 볼게요. 저 정말 이번에 굳게 마음먹었어요.”

“영애가 이렇게 결의를 보이시니 그럼 말씀드릴게요. 1단계 잘해주기, 2단계 잠적 후에 백작님은 분명 당신에게 접근할 거예요. 처음엔 그의 관심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그런데도 귀찮게 굴면 그땐.”

“그땐?”

“가차 없이 따귀를 날리는 겁니다!”

“네에?”

“고개가 홱 돌아갈 정도로 야무지게 때리는 게 중요합니다.”

“따귀라니… 무사할까요?”

“물론 맞은 직후엔 화가 나고 황당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백작님은 곧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날 이렇게 막 대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어머나!”

이치를 터득한 해밀턴 영애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하지만 이건 조금 고난도 기술이라 1, 2단계를 진행해 보시며 천천히 생각하셔도 돼요.”

“심화 단계까지 갈 수 있도록 열심히 해 볼게요.”

“좋아요. 우리의 계획에 ‘롤링 스칼지’란 이름을 붙일게요. 오늘부터 1단계를 마음껏 즐기세요.”

스칼지 백작, 구를 준비나 하셔.

* * *

알레스는 자신이 본 얼마 안 되는 저쪽 세상 드라마, 영화, 소설 내용을 쥐어짜 상담에 써먹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을 좀 덜 하고 그런 것들을 좀 더 챙겨볼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그래도 저쪽 세상에서 들은 다양한 ‘썰’은 상담의 중요한 밑천이 되었다.

이곳에서 쌓은 인맥도 십분 활용했다.

「늘 편두통에 시달려요. 주치의도 명확한 원인을 모르겠대요. 주변 사람들도 점점 꾀병이라고 생각하고….」

「여행을 권할게요. 토르테 자작가라면 재정이 꽤 든든한 걸로 알고 있어요. 경비 걱정이 없다면 조금 멀리 떠나시는 걸 추천합니다.」

「여행이요?」

「요즘 겨울 여행의 성지로 각광받고 있는 북부 메르세데스도 좋고, 아예 외국도 좋고요. 여하튼 완전히 새로운 환경으로 가세요. 자신에게 맞는 장소를 찾아 떠나세요. 두통이 사라지는 곳이 분명 있을 거예요.」

「외모에 자신이 없어서 자꾸만 위축돼요. 얼굴을 바꿀 수도 없고. 이번 생은 그른 거죠?」

「우리가 예쁘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건, 알고 보면 타고난 미모가 아니에요. 여러 요소가 복합된 매력이죠. 즉 이번 생에 해결 가능한 일이라는 겁니다.」

「제게도 매력이 될 만한 게 있을까요?」

「있는 건 찾고 없는 건 만들어야죠. 코코 밤비와 마담 샤를테론을 소개해 드릴게요. 당신이란 보석을 안팎으로 갈고닦아 주실 분들이에요.」

결혼보다는 일을 하고 싶다는 당찬 영애들에게는 적성에 맞는 교육기관이나 직장을 연결해 주었다.

영리한 영애 몇 사람은 페레티 상단의 직원으로 은밀히 뽑기도 했다.

이렇게 닥치는 대로 상담을 해 오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다.

슬슬 밑천이 딸리기 시작한 알레스는 인풋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끼아악, 끼악!”

오후 3시, 어김없이 비에커가에 울려 퍼지는 카르티에 알람.

그래, 자기관리라면 카르티에를 따를 사람이 없지.

늘 앞서 가고,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 주는.

너무 완벽해서 가끔 인간이 아닌 것 같지만, 지금 내가 도움을 구할 곳은 카르티에밖에 없어!

알레스는 상담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자신도 상담을 받기로 했다.

이번엔 카르티에 저택에 일부러 일찍 도착했다.

그 이상야릇한 방을 한 번 더 보기 위해서는 아니고, 마차와 장식용 말을 맡겨 두었던 주차장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지금껏 신세를 지면서 한 번도 직접 살펴보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게다가 겨울을 맞아 공유 마차 영업을 쉬고 있는 요즘이니 카르티에 저택의 한구석을 하루 종일 차지하고 있을 텐데.

알레스는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티에가의 집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주차장이 있다는 쪽으로 향했다.

직접 안내하겠다는 집사의 말을 사양하고 홀로 나섰다.

저택의 부지를 공짜로 차지하고 있는 주제에 괜히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형편도 나아졌으니 주차비를 좀 내라거나, 말들에게 들어가는 관리비를 내라고 눈치를 줄 수도 있지 않은가.

하긴 이제 비용을 낼 때가 되긴 했나….

여하튼 조용히 다녀오고 싶었다.

잡생각을 하느라 갈래 길에서 잠시 헷갈렸지만, 뭐 헤매 봤자 저택 안이지 생각하며 되는 대로 발길을 옮겼다.

가도 가도 주차장처럼 보이는 데가 나오지 않자 알레스는 그제야 슬슬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무슨 저택 부지가, 그것도 제도 번화가에 있는 부지가 이리 넓은 건지.

정원이 아니라 아예 숲 하나가 들어와 있는 듯했다.

저택 안에서도 길을 잃거나 산짐승의 공격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할 무렵, 급기야 눈앞에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라니! 대체 어디까지 온 거람!

물 계열이라더니 방을 온통 물로 채운 걸로는 모자라 이렇게 큰 호수까지 판 게 아닌가 싶었다.

여기서 냉수마찰이라도 하는 건지.

겨울이라 그런 건지, 화창한 오후인데도 호수 위로 물안개가 잔뜩 피어올라 있었다.

뭔가 호수 괴물이라도 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긴장한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주변을 둘러보던 알레스는 순간 얼어붙었다.

호수 위 자욱한 안개 너머로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공포심에 헛것을 본 거야.

알레스는 애써 부정하며 이를 악물다 딱 마주치고 말았다.

번뜩이는 두 개의 붉은 빛과.

저건 마치 짐승이나 괴물의 안광….

여기까지 생각한 알레스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머릿속으로는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래봬도 저쪽 세상에서 과학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이자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회색 빌딩 숲에서 차가운 도시 여자로 살아온 몸이었다.

그런 알레스에게 이건 감당할 수 없이 야성적인 상황이었다.

게다가 조금 남아 있는 이성을 쥐어짜 파악하건대 저건 매우 거대한 괴물이었다.

저 한 쌍의 붉은 안광이 저 위 높다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독버섯이나 독초 따위가 아니라 거대 괴물을 조심해야 하는 터프한 세상이었다니!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레이디 페레티, 역시 적극적이시군요. 내 몸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괴물이 느끼한 소리를 한다?

“정말이지 못 당하겠군요. 웬만해선 정체를 들키는 일이 없는데, 역시 당신은 특별해.”

잠깐만, 이건… 설마?

“드래곤까지 당황하게 만드는 당신이란 인간은 정말.”

“……?”

이건 카르티에 공작의 목소리가 분명한데 드래곤 어쩌고 하는 건 대체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지?

알레스는 두려워서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비스듬히 땅바닥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조심스레 위로 올렸다.

“아악!”

안개 낀 호숫가에 알레스의 비명소리가 퍼져 나갔다.

“아오 씨, 제발 옷 좀 입고 다녀요!”

알레스가 다시 고개를 휙 돌리며 타박을 주자 카르티에가 느긋하게 대꾸했다.

“여긴 내 사유지에 있는 호수인걸요, 레이디? 난 늘 홀가분한 상태로 자연과 소통합니다. 마음의 교류, 아시지요?”

“모르겠고! 옷이나 입으세요.”

“오늘은 내 문신을 구경하지 않습니까?”

“문신은 이제 됐고요, 그보다 제가 방금 본 게 뭐죠?”

카르티에가 난처한 듯 재미난 듯 묘한 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본 건… 내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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