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레이디 페르소나
“이제는 정말 사람을 더 뽑아야겠어요.”
집을 비운 사이 쌓인 서신과 서류들을 정리하며 마사가 말했다.
“그러려면 사무실도 따로 얻어야겠고요. 아니, 저택을 새로 알아볼까요?”
알레스도 이쯤에서 전문 경영인을 물색해 봐야 하나 어쩌나 고민이 됐다.
사업 분야도 늘고 규모도 점점 커지니 언제까지고 인맥과 운에만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재에 밝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 냉혹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악마 같은 인간 어디 없나?’
적임자가 영 떠오르지 않았다.
쌓여 있는 서신과 서류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상품 구매 문의.
밤비가 디자인한 드레스와 액세서리, 구두, 가방 등을 주문하고 싶다는 내용으로, 메르세데스로 떠나기 전에 손을 써둔 대로였다.
황실 무도회 때 알레스가 주렁주렁 입고 달고 간 밤비의 작품들이 귀족 영애들의 가슴에 소유욕의 불씨를 지폈다면.
그들을 거부할 수 없는 지름신의 세계로 이끌 후속 작업이 필요했다.
그 물건들을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슬쩍 흘려야 할 터.
제도의 트렌드 리더인 카르티에 공작과 로잘린 황녀에게 물건을 협찬해 주고 그들의 시종과 하녀에게 부티크 이름과 연락처를 남겨 두었다.
이제 애가 달은 영애 탐정단이 알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나 다를까 지난 무도회에 선보인 ‘매그놀리아 컬렉션’에 대한 문의가 빗발쳤다.
“이제 주문량으로 보나 제품 종수로 보나, 럭셔리 쪽을 부업으로 하는 건 무리가 있어 보이네.”
알레스가 주문 요청서들을 훑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정식 부티크를 오픈해야 할 것 같아. 밤비 경은 어떻게 생각해요?”
“사업적으로야 그렇게 하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만….”
“물론 경영 방향이 아니라 밤비 경의 심중을 묻는 거예요. 어떤 일이 더 좋은지, 어떤 일이 더 하고 싶은지. 호위와 디자인 중에.”
“저는… 둘 다 좋고 둘 다 하고 싶습니다.”
밤비의 저 티끌 하나 없는 밤색 눈은 진심이다.
공작에게 진짜 여동생이 있다면 딱 밤비 같지 않을까, 알레스는 가끔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올곧은 것이 반드시 올바른 것은 아니다.
자신의 창의력과 감각을 조합해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드는 일과 귀족들 뒤치다꺼리하는 일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물론 오랜 수련을 통해 어떤 경지에 이르고, 주인을 향한 신뢰와 충절을 지키는 것이 명예롭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런 가치에 목숨을 걸기도 하고.
하지만 알레스는 그게 과연 자연스러운 것일까 의심스러웠다.
더욱이 이런 신분제 사회라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조작된 생각일 수 있지 않을까.
밤비에게 재능이 없다면 또 모른다지만.
“그럼, 내가 딱 정해 주면요? 그대로 따를 건가요?”
“글쎄요, 우선 레이디의 뜻을 듣고 싶습니다.”
“좀 더 확실하고도 장기적으로 시장에 뿌리내리려면 럭셔리 분야를 독립시켜서 본격적으로 키워야겠죠. 그걸 이끌 적임자는 당연히 밤비 경이고요.”
“하지만 지금은 레이디를 호위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스노브 일당이 그 어느 때보다 독이 바짝 올라 있을 테니까요.”
으, 또 스노브야. 그 영감 때문에 뭘 못 하네.
사실 스노브만 아니면 호위까지 필요한 일은 딱히 많지 않잖아?
조금 걱정은 되지만 아무리 스노브라도 정말 그렇게 멍청한 짓을 벌일까?
“다른 호위를 구하는 건요?”
“정 바라신다면 알아보겠지만 시간은 좀 걸릴 겁니다. 전하께서 아주 까다롭게 고르실 테니까요.”
공작 전하가 기다렸다는 듯이 호위 자리를 꿰차실지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으신지요?
안 그래도 호시탐탐 노리고 계시거든요. 레이디의 안전을 핑계로 밀착 호위할 기회를.
얼른 공작부인이 되셔서, 최소한 약혼자라도 되셔서 메르세데스령에 계시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실 텐데 말이지요.
밤비가 실은 스노브보다 공작 때문에 골치 아파하고 있다는 걸 알 길 없는 알레스는 분위기를 살피다 말했다.
“물론 밤비 경만 한 기사를 찾기가 매우 힘들다는 걸 알아요. 나도 밤비 경이 곁에 있어서 든든하고요. 하지만 그 재능이 너무 아깝잖아요?”
“과찬이십니다.”
“다른 미래도 고민해 주면 좋겠어요. 꼭이요.”
밤비의 밤색 눈이 고요히 빛났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매그놀리아 컬렉션에 관한 문의 외에 쌓여 있는 나머지 반은 사실 기대치 못한 서신들이었다.
물론 영업도 하고 명함도 돌렸지만, 이렇게 빨리 뜨거운 반응이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편지의 발신인은 이름도 낯선 영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수신인은 하나같이 ‘페레티 매니지먼트’.
황실 무도회 때 함께 말 춤을 춘 영애들이 상담을 요청하는 서신들이었다.
이쯤 되면 지난 무도회 때 꽤 훌륭한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황제의 의뢰도 매우 유리하게 처리했고, 두 가지 사업의 홍보 효과도 톡톡히 보았으니.
상담하려는 내용은 연애 고민부터 진로 고민, 사교계 따돌림, 가정불화, 만성두통과 우울감, 미용, 투자 전망 등 다양했다.
이 다양한 의뢰마다 걸맞은 해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 걱정도 살짝 됐지만, 알레스는 배짱 좋게 생각했다.
어차피 모든 문제의 근원은 자기 자신.
의뢰인에 대해 면밀하게 관찰하다 보면 분명 적합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으리라.
설령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 해도 수다를 떠는 것만으로 최소한 기분 전환은 될 것이다.
대부분의 고민거리는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순간 절반은 해결된 거라지 않은가.
사실 본인의 문제는 그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오랫동안 절실하게 들여다보았을 테니 그 답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더구나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상담까지 의뢰할 정도라면 문제를 해결할 소질이 다분한 사람들일 거라고 알레스는 예상했다.
그래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고객에 대해 알아두는 게 좋겠지?
기본 성격이나 특징, 가문, 평판이라든가 인간관계 등을 상담 전에 숙지해 두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페레티 상단의 그 방면 전문가가 곧 출장을 가서 제도에 없을 거란 사실이었다.
첫 번째 겨울애가 여행단을 제도에서 메르세데스령으로 인솔해 갈 사람이 필요했다.
이동수단이 바뀌기도 했고, 정식 관광 일정을 진행하는 건 처음이라 메르세데스 쪽에만 일을 맡겨 두기엔 무리가 따랐다.
메르세데스의 아이언스와 호흡을 맞출 이쪽 사람이라면… 뭐 직원이라야 뻔하니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제도에서 알레스를 호위하며 제품 주문을 소화해야 할 밤비를 빼면 마헬 커플밖에 더 있겠는가.
알레스는 이번 파견으로 일타쌍피를 노릴 속셈이었다.
메르세데스 관광 사업의 첫발을 성공적으로 떼고, 두 사람 진도도 훌쩍 나가고.
그건 그렇고, 특급 유모의 빈자리를 어떻게 메운다?
마침 알레스의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인물이 있었다.
세상만사에 호기심이 있고 모르는 게 없으며, 조사와 분석에 도가 튼 영리한 여우.
<엠파이어 타임스>의 기자인 스토커 남작.
그에게 도움을 청하면 아주 찰떡이겠다며 알레스는 무릎을 쳤다.
서신을 보내온 영애들에게 답신을 보내 상담 일자를 정하고, 스토커 남작의 도움을 얻어 고객 데이터를 확보하고, 도서관에 가서 상담하려는 분야의 지식을 쌓고….
알레스는 새로운 일을 앞두고 의욕에 불탔다.
이때만 해도 알레스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일이 훗날 자신에게 얼마나 든든한 세력을 안겨 주며, 자신을 사교계 실력자로 만들어 줄 기반이 될지.
“그게 제일 큰일이네.”
알레스가 전에 없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쌓여 있던 두 갈래의 서신을 대충 정리하고 나니, 이제 남은 중대 사안은 하나.
“헤라클레스가 없는 동안 뭘 먹고 살지?”
이참에 소문난 레스토랑이나 베이커리 등 맛집 순례를 해 보는 것도 좋겠지만….
황제 말마따나 조심성 없이 외부 음식을 덥석덥석 먹었다가 독살의 위험에 노출되기라도 하면?
독버섯 일당이 괜히 독버섯이겠는가. 가뜩이나 독이 바짝 올랐다는데.
재료를 사서 천만년 만에 요리라는 것을 해 봐?
음, 차라리 독을 삼키는 게 낫겠군.
알레스는 결국 헤라클레스에게 오래도록 먹을 수 있는 빵과 유통기한이 긴 쿠키 같은 것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 놓고 갈 것을 부탁했다.
물론 헤라클레스는 거기서 더 오버해 자신의 능력과 영혼을 최대한 끌어모은 병조림들까지 만들어 놓고 갔다.
이런 것까지 병조림으로 만들 수 있나 싶은 별별 요리들이 병 속에 담겼다.
마님이 한시라도 배곯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그의 결의가 저쪽 세상 레토르트 식품 비슷한 걸 탄생시킨 것이다.
알레스는 그 별별 병조림들을 먹을 때마다 감탄하며 생각했다.
식탐이 역사를 바꾼다고.
* * *
“제가 잘못한 거죠? 남자는 튕기는 여자에게 더 매력을 느낀다는데. 전 그만 처음부터 얼이 빠져서는…. 스칼지 백작님 뒤를 졸졸 따라다녔거든요.”
해밀턴 영애가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고 말했다.
“그러니까 영애가 좋아한다는 걸 스칼지 백작님도 알고 있단 말이죠?”
“알고 있다 뿐인가요. 제가 백작님께 목을 맨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요?”
“흐음, 그렇군요.”
“역시… 돌이킬 가망이 없는 거죠? 흐흑.”
“가망이 없긴요. 울지 마세요, 영애.”
“저는요, 좋아서 좋다고 표현한 거밖에 없는데 흐흑, 그게 죄가 되나요?”
“아니요, 죄가 아닙니다. 영애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레이디 페르소나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레이디 페르소나는 반가면을 착용한 알레스로, 황실 무도회 때의 이미지를 살려 가면을 트레이드마크로 삼았다.
“이렇게 귀여운 영애의 진가를 백작님이 모르시다니 참으로 안타깝네요. 그가 영애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제가 도와드릴게요.”
“흑, 어떻게요?”
“일단 지금부터는 울지 않으셔야 해요.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영애는 워낙 심성이 고우셔서 제 지도를 잘 따라오실지 조금 걱정이 되네요.”
레이디 페르소나가 입을 새 부리 모양으로 만들며 고심하자 해밀턴 영애가 눈꼬리가 처진 순한 눈에 애써 힘을 주며 결의를 보였다.
“아니에요, 독해질게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레이디의 지도를 악착같이 따를게요.”
“네, 저를 믿고 제 말을 따라 주세요. 영애의 사랑을 꼭 이루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레이디!”
“우선 터치 오브 카르티에와 얼음왕자의 미소부터 드시면서 연애 기운을 받으세요.”
레이디 페르소나가 카르티에의 신상 커피와 메르세데스 특산 머랭쿠키를 고객에게 권했다.
맛있는 것도 좋고 일하는 것도 좋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일하는 건 더더욱 좋고.
“자, 해밀턴 영애, 이렇게 해 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