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09화 (107/120)

109화

너무 달달하잖아?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꽃미남 마부, 아니 이제 진짜 배우로 데뷔한 소로 사 형제가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말했다.

“저희는 그냥 마님이 시키시니까, 마님께 잘 보이고 싶고 기회를 주신 것에 보답하고 싶어서 열심히 따랐을 뿐인데….”

“하다 보니 힘들어도 보람과 재미를 느끼게 됐고, 생각지 않게 약간의 재능도 발견하게 됐고….”

“그러자 배우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성공이란 것도 꿈꿔 보게 됐고요. 그런데 무대에 오르자….”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콰르토, 세군도, 프리메로, 테르세로, 4-2-1-3남 순서로 대사를 받았다.

매끄럽게 연기만 잘하던데?

무슨 사고가 있었나?

누가 우리 순둥이들 겁줬니?

첫 무대를 칭찬하러 분장실을 찾은 알레스는 제국의 F4가 눈망울을 아롱거리며 늘어놓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게….”

꽃미남들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우리의 연기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우린 받을 것만 생각했거든요. 잘했다는 칭찬, 멋있다는 찬사, 성공적인 데뷔를 축하하는 박수 같은 것들이요.”

“그걸 얻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했던 겁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벅차면서도 두렵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2-4-1-3남 순서로 한마디씩 했다.

난 또 뭐라고.

잠시 긴장했던 알레스는 안심하며 한숨 돌렸다.

얘들아, 제발 그러지 좀 마.

그렇게 생겼으면 성격이나 태도는 좀 불량해야 세상이 공평하지 않겠니?

누가 유명한 호구 집안 아니랄까 봐 착해 빠져서는.

물론 알레스도 품위 유지를 위해 말은 이렇게 할 거지만.

“지금 그 마음, 여러분이 앞으로도 잊지 않길 바랄게요. 배우로서 길을 잃을 때마다 오늘 이 초심을 기억하세요.”

“아아, 명심하겠습니다, 레이디.”

“첫 공연 멋지게 해냈어요. 더욱이 그런 마음 자세라면 앞으로 훌륭한 배우가 될 거란 확신이 듭니다.”

“레이디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 그래서 말인데요, 한 가지 더 당부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이제 데뷔도 하고 어엿한 배우가 되었지만 당분간 연애 금지 규정은 유지합니다.”

“……!”

“실은 이제부터가 중요해요. 오늘이야 첫 공연이어서 조용히 넘어갔지만 당장 다음 공연부터는 팬들의 공세가 시작될 겁니다. 이때 틈을 보였다간 한 방에 훅 가는 수가 있어요.”

공연 연습만으로도 바쁘고 힘들어 연애하고 싶은 마음도 여유도 없지만….

“첫째도 조신, 둘째도 조신, 셋째도 조신이에요!”

레이디 페레티가 검지를 세우고 강조 또 강조하는 말을 들으며 꽃미남 배우들은 생각했다.

공작 전하와 치맥도 드시고, 이상한(?) 춤도 추시고, 영육의 연금술도 맛보시고, 키스도 하신 레이디께서 저희한테….

‘이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알레스는 소로 형제들을 바짝 조인 후, 공연을 도와준 샤를테론 연극단의 분장실을 찾았다.

샤를테론 단장과 단원들이 분장을 지우다 말고 반갑게 맞이했다.

“레이디 페레티, 멋진 무대였지요?”

“여러분이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저희도 오랜만에 무척 즐거웠답니다.”

다들 배우답게 감격에 겨운 표정과 몸짓을 지어 보였다.

이 열정적인 배우들 사이에 있으면 늘 기를 빨리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며 알레스가 샤를테론 단장에게 속삭였다.

“단장님,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괜찮고말고요. 천년이 가도 잊히지 않을 불후의 명작 ‘나의 눈사람’을 쓰신 위대한 작가이며 동심의 수호자인 레이디 페레티께서 부르시는데!”

“아, 예예. 그럼 잠시 이쪽으로.”

알레스는 단장과 함께 간이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생각난 김에 의논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따로 당부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소로 사 형제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 아무래도 제가 관리하기 벅찰 것 같아서요. 공연 준비라든가 배우 관리를 전문가이신 샤를테론 단장님이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어머나, 저야 영광이지요.”

“앞으로 공연에 치중하시다 보면 생활 연기를 할 여력이 없으실 거예요. 극단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페레티 상단에서 운영 자금을 지원하겠습니다.”

“저희 단원들이 꿈을 펼칠 기회를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지원까지요? 아아, 레이디는 뜨거운 사막을 헤매는 나그네의 오아시스요, 깜깜한 밤바다에서 조난당한 뱃사람의 별빛이요, 목마른 사슴들의 성스러운 우물이며….”

“아, 예예. 단장님 마음은 잘 알겠고요. 지원했던 돈은 어차피 1브릭스도 남김없이 다 회수할 거니까 걱정 마시고요.”

“네? 회수요? 사채… 하시는 건 아니죠?”

“투자라고 말씀드리죠. 아마 얼마 안 돼서 극단이 벌어들이는 돈이 어마어마해질 거예요. 본전 회수하고도 남을 겁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계약서를 꼼꼼히 봐야겠군요.”

“언제나 그러시는 게 좋을 거예요. 수익 배분 외에도 중요한 조건이 있어요.”

“중요한 조건이라니 긴장되는군요. 뭔가요?”

“아무리 배우들의 인기가 높아지고 바빠져도 두 달에 한 번은 꼭 무료 공연을 한다는 조건이요.”

“무료 공연?”

“아까 이곳 주민들이 공연에 푹 빠진 모습을 보니 흐뭇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앞으로 보육원이나 교도소나 시골마을 같은 데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면 좋겠어요.”

의외의 조건에 샤를테론 단장이 입꼬리를 올렸다.

“레이디는 참, 알 수 없는 분이세요. 좋습니다. 소로 형제를 비롯해 우리 단원들이 마침 그곳들과 인연이 깊으니까요.”

“고마워요. 무료 공연 비용은 제가 계산에서 빼 드릴게요.”

알레스가 시원하게 쏘는 시늉을 했다.

* * *

메르세데스령 답사 일정이 모두 끝나고 제도로 돌아가는 날.

올 때 느꼈던 문제점을 감안해 갈 때는 마법진으로 텔레포트 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까운 라피스를 잔뜩 써야 하는 일인 만큼 알레스는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공작이 단호하게 권했다.

공작은 곧 방문할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영지에 남아야 했다.

공작 없는 메르세데스는 시럽 없는 빙수요, 크림 없는 케이크이니까.

성공적인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해 그는 반드시 거기 있어야 했다.

그런 이유로 가뜩이나 본인이 함께 갈 수 없는 이때, 그 먼 거리를 마차로 며칠씩 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며 만류한 것이다.

노상강도를 만날 수도 있고, 지금은 제국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마수가 실은 몇 마리 남았을 수도 있고, 스노브 같은 정적이 암살자를 보낼 수도 있다는 둥 공작은 오만 걱정을 늘어놓았다.

만에 하나 알레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의 삶은 찜질방 달걀처럼 곤죽이 되어 버릴 것이며, 죄책감에 평생 수절할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매우 진지하게도 했다.

꼼짝없이 텔레포트 해야 할 상황이었다.

알레스 일행은 제도로 돌아가기 전, 눈 여왕의 궁전에 올릴 시럽 원액 받아 가기 위해 첫날 둘러봤던 사탕당근 농가에 잠시 들렀다.

다행히 처음 왔을 때처럼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알레스를 노려보지는 않았다.

혹시 노래 연극을 본 걸까? 아니면 그새 나에 대한 평판이 나아진 걸까?

어쨌든 영지민의 적대감이 줄어든 건 분명한 듯한데, 이걸 좋아해야 할지 아쉬워해야 할지, 알레스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분명 영지민 시월드의 반대를 업고 공작의 청혼을 물리치려는 속셈으로 이곳에 왔는데 말이다.

헤라클레스가 사탕당근 시럽 원액을 받아 실은 후, 마차가 막 떠나려 할 때였다.

“레이디 페레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을 대표가 황급히 불렀다. 그 뒤로 마을 사람들이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옮겨 오고 있었다.

또 오다 주운 건가?

무심코 생각하던 알레스는 주민들이 가져온 것의 실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알레스는 물론 무뚝뚝한 북부인들조차 도저히 오다 주웠다고는 표현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마을의 특산물인 사탕당근으로 만든 황금빛 반투명한 그것은 다름 아닌 알레스의 등신대였다.

차가운 얼음 위에서 사탕당근 시럽으로 재빨리 모양을 만들고 식혀서 굳힌 일종의 설탕 공예품이었다.

아무리 시럽과 얼음을 다루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라 해도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었다.

알레스의 실제 키, 몸집과 똑같이 만든 스케일에 한 번 놀라고, 이목구비와 특징적인 표정까지 섬세하게 살려낸 관찰력과 솜씨에 두 번 놀라는, 그런 달인의 경지였다.

“이걸 어떻게….”

“단걸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저쪽 세상 한국의 ‘뽑기’ 1등 상품보다 더 크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설탕 등신대를 마주하고 있자니, 알레스는 혈중 당도가 치솟아 머리가 다 어질어질해지는 기분이었다.

코피를 흘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너무 신기해요. 아가씨의 특징을 어쩜 이렇게 잘 살려 냈대요? 눈썰미도, 손재주도 보통이 아니네요.”

곁에 선 마사도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아, 그런 거였구나.

알레스는 그제야 그날 느꼈던 의아함이 풀리는 듯했다.

알레스를 꼭 닮은 등신대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마을 주민 모두가 합심해서 알레스의 얼굴을 뚫어질 듯 노려본 덕분이었다.

그들은 알레스의 얼굴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며 생김새와 특징을 기억했다.

공동 작업장에서 알레스가 조리 과정을 살펴볼 때 등 뒤에서 오락가락했던 위협적인 움직임도 비로소 해명이 됐다.

레이디 몰래 좀 더 정확한 치수를 재고자 한 주민들의 열성어린 시도였던 것.

알레스를 향한 그들의 마음은 애초부터 열렬한 호감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먹죠? 박제를 해야 할까 봐요.”

먹기엔 너무 훌륭한 예술품이었다.

“레이디, 아끼지 말고 맘껏 드십시오. 메르세데스로 오시면 저희가 이깟 설탕 등신대는 매일매일 만들어 드릴 테니까요!”

이 말을 하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영지민들의 얼굴을 보자 알레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의 눈빛이 너무도 강렬하고 간절해서, 지금이야말로 여행 상품 특전으로 준비한 선글라스가 절실히 필요한 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밤비는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지었지만,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보십시오, 저희 영지민들이 레이디를 무척 좋아한다니까요.

이토록 달달한 영지민 시월드의 프러포즈라니.

알레스의 계략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지고 말았다.

곱게 싼 설탕 등신대와 함께 제도로 텔레포트 하는 동안 알레스는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자신이 정말로 공작부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이 결혼에 어울리는 인간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오래 괴로워할 틈은 없었다.

제도로 돌아와 보니 엄청난 일거리가 알레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여기저기서 보내 온 서신과 주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