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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08화 (106/120)

108화

이토록 후끈한 데이트

미친다.

자신은 강한 마법력을 지녔다. 여차하면 신수를 소환할 수도 있다.

검술도 꽤 높은 경지이기에 더더욱 일당백이다.

웬만해선 다치거나 죽을 위험이 없는 본인이 홀로 전장에 나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굳이 힘없는 사람들을 사지로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라니.

이 얼마나 고결하고 오만한 태도인가.

“그뿐 아니라 공작 전하는 영지민들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계세요.”

“빚? 지난번에 밤비가 들려줬던 과거의 그 일 말인가요?”

“예. 메르세데스가 큰 어려움에 처하고 선대 공작 전하와 공작부인마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영지민들이 이 성을 지켰거든요.”

“전투를 혼자 감당하려는 건 영지민에게 보은하는 전하 나름의 방식이군요.”

정말이지 이 공작을 어찌한단 말인가.

눈사람도 이런 눈사람은 처음 본다며, 알레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지닌 마법력에 비례해 호구력도 치솟는 것 같았다.

영지민들은 공작을 깊이 사랑하고 섬길 수밖에 없었다.

공작 덕분에 더 이상 전장에서 자식이나 배우자, 부모, 연인을 잃지 않아도 됐으니까.

아무리 공작이 이제 자신의 행복을 찾겠다고 선언했어도, 이 일만큼은 놓지 않을 것이다.

영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하는 걸까?

알레스는 괜히 심란해졌다.

아, 이 이상 파고들면 안 될 것 같은데….

성으로 돌아온 알레스는 저녁 식사 후에 결국.

공작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데이트 말입니까?”

“예, 데이트 코스는 제가 정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럼, 한 시간 후에 찜질방에서 봬요.”

그리하여 저쪽 세상에서 말로만 듣던 찜질방 데이트를 하게 되었던 것인데.

“밤비 경도 온몸 근육이 풀린다면서 좋아했거든요. 카이트도 여기서 좀 쉬시라고요.”

“정말 신기한 경험이군요.”

막상 후끈후끈한 찜질방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으려니 꽤나 어색했다.

오긴 왔는데, 이런 데선 뭘 하는 거더라?

찜질방을 만들 때 찜질 전용복과 수건도 세트로 제작해 달라고 부탁했다.

알레스는 수건 한 장을 가져와 조심스럽게 접고 말았다.

“여기선 이렇게 하는 거래요, 카이트.”

그러곤 곱게 만 양머리를 공작의 머리 위에 살포시 올렸다.

공작은 알레스가 이끄는 대로 양머리를 얹은 채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귀여워.

공작의 말간 얼굴을 본 알레스는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하지만 눈을 조금 아래로 내리면.

찜질방 가득한 훈기로 얇은 튜닉이 몸에 딱 달라붙어 공작의 골격과 근육을 요염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목 아래는 전혀 귀엽지 않은 실정이었다.

“내 머리 위에 있는 이거, 알레스도 하면 안 되나요?”

공작의 요청에 알레스는 양머리를 하나 더 만들어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렸다.

그 모습을 본 공작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곧이어 눈가에서부터 귀까지 서서히 발갛게 물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그런 얼굴이 되는 거죠?

혹시 나랑 같은 생각?

그렇게 생각하니 알레스도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손부채를 만들어 얼굴 앞에서 팔락대고 있자니 공작이 말했다.

“찜질방이 정말 후끈하군요. 알레스가 말한 대로 몸도 마음도 몽롱하게 풀어지는 것 같습니다.”

“가끔 그렇게 풀어지시는 것도 괜찮아요.”

덥고 답답하면 앞섶의 단추도 몇 개 풀어헤치시면….

“얼음방이라는 곳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공작은 그 후로도 얼음방에 자주 들락거렸다.

아무래도 불 계열 마법사라 몸에 열이 많은 듯싶었다.

“저, 카이트, 너무 더우면 눈 여왕의 궁전을 드셔 보세요. 어마어마하게 시원할 거예요.”

알레스가 내민 빙수 그릇을 받아 든 공작은 거의 원샷 하듯 한입에 부어 넣었다.

“이곳에서 먹는 눈 여왕의 궁전은 시원함이 배가되는군요! 속이 뻥 뚫리는 기분입니다.”

파랗게 일렁이는 공작의 눈만 봐도 얼마나 시원한지 와 닿았다.

“그래요, 카이트. 행복이 뭐 별건가요? 우리를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를 완전히 벗어 버릴 순 없겠지만 가끔 이런 소소한 행복 찾기를 포기하지 말아요.”

“소소한 행복….”

“그런 사소한 일로 크게 달라질 게 있겠나 싶지만, 봐요, 이렇게 땀 내고 빙수만 먹어도 날아갈 것처럼 후련하지 않아요?”

“정말 그렇군요.”

“이렇게 또 살 만해진답니다. 별것 아닌 데서 힘을 얻고 또 하루하루 헤쳐 나가는 거죠.”

당신이 짊어진 영주의 의무를 어느 날 완전히 벗어 던질 순 없어도, 소소한 즐거움과 기쁨까지 외면하진 말자고요.

틈틈이 짬짬이 번개로 행복해지자고요.

알레스가 환하게 웃어 보이자 그 웃음이 고스란히 공작의 얼굴로 옮겨갔다.

순간 알레스의 눈에 포착된 문제의 그것.

빙수를 한입에 들이켜서인지 공작의 도톰한 입가에 어린애처럼 노랗고 하얀 시럽이 묻어 있었다.

유혹하는 건가….

이미 본 이상 알레스는 그 입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세상엔 맛있는 것이 많고 많지만, 지금 이 순간 알레스가 간절히 먹고 싶은 건 오직 하나.

하필 공작의 입가에 묻은 요망한 시럽이었다.

수십 년 식탐 인생에 찾아온 최대 위기 앞에 과연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여기서 공작의 입가에, 아니 하필 공교롭게도 공작의 입가에 자리를 잡은 저 시럽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간다면?

한 번 훔쳤는데 두 번은 못 훔칠까.

하지만 이곳은 머리카락도 축축이 젖고 걸친 옷도 몸에 척척 달라붙고 숨이 턱턱 차올라 호흡이 절로 거칠어지는 후끈한 찜질방.

위험해도 너무 위험했다.

알레스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 대신 손을 공작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공작의 입가에 묻은 시럽을 부드럽게 훔쳤다.

어, 그런데 이 행동이 뜻밖에 위험했다.

공작의 파란 눈이 묘하게 요망한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 순간, 알레스는 목덜미를 움찔하며 자기가 이런 소리도 낼 수 있었나 싶은 소리를 냈다.

“끼앙!”

공작이 시럽을 훔쳐가는 알레스의 엄지손가락을 날름 집어삼킨 거였다.

손가락 끝에 촉촉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이 훑고 지나갔다.

그래 놓고 공작은 자기가 더 놀라서 눈이 쟁반만 해져서는 펄쩍 뛰어올랐다.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그만.”

“카이트도 이 시럽이 무척 맛있었나 봐요. 양보 없으시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알레스는 심장이 목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 귀에 제 심장 고동이 쿵쾅거렸다.

위험해….

알레스는 특단의 조치로 빙수 옆에 가져다 둔 삶은 달걀을 들어올렸다.

“카이트, 여기 다른 간식도 있거든요. 시럽에 너무 집착하지 않으셔도….”

처음엔 삶은 달걀을 공작의 이마에다 톡 쳐서 껍질을 깨뜨리며 장난을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반듯하고 훤한 이마를 보는 순간 알레스는 멈칫했다.

저렇게 예쁜 이마에 흠집이라도 나면 안 되지.

그리고 홀린 듯이 삶은 달걀로 자신의 이마를 내리쳤다.

퍽.

알레스는 예상치 못한 고통에 깜짝 놀라서 이마를 감싸 쥐었다.

달걀은 혹시 돌멩이인가 싶게 예상을 초월하게 딱딱했다. 보니까 껍질에 금도 제대로 가지 않았다.

“알레스!”

놀란 공작의 절규가 찜질방을 흔들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공작이 알레스의 이마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아야, 그냥 달걀 껍데기를 까려 했을 뿐인데요. 생각보다 이 달걀이 만만치가 않네요. 역시 삶은 달걀이야, 하하.”

알레스가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멋쩍게 웃으며 나름 농담까지 얹었다. 민망해 죽을 것 같아서.

하지만 공작은 전혀 우습지 않은지 굳은 얼굴로 삶은 달걀을 내리쳤다.

“왜 그랬습니까. 껍질을 까려면 나한테 말하지 그랬습니까.”

“아니, 그렇다고 주먹으로 내리치시면…. 달걀이 완전 곤죽이 됐잖아요.”

어쨌든 후끈하고 위험한 분위기도 덕분에 곤죽이 되어 사라졌다.

* * *

드디어 공연의 막이 올랐다.

꽃미남 마부들의 피 땀 눈물로 이루어진 데뷔 무대이자, 알레스가 그간 갈고 닦아 온 이야기를 선보이는 무대이기도 했다.

처음엔 관광객을 위한 즐길 거리로 기획됐지만, 지금은 거기에 메르세데스 영지민에게 주는 선물의 의미도 더해졌다.

들어보니 이 지역이 문화, 예술 방면 인프라에 취약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국경 지역의 분쟁과 혹독한 자연환경 탓에 그간 문화적인 여유를 즐기기 힘든 형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약점을 역으로 이용해 온통 눈으로 뒤덮인 이곳을 겨울 여행의 명소, 연인들의 성지, 겨울 유흥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 생각이었다.

눈의 영지에서 상연되는 눈사람 이야기.

알레스는 이 노래 연극 역시 이곳을 대표하는 문화 상품으로 키우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메르세데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숙제였다.

저쪽 세상 스노우맨 이야기랑 조금, 조금보다 살짝 많이 겹치는 면이 없지 않지만.

눈사람 공작의 땅에서 눈사람 병을 앓고 있는 자신이 눈사람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무슨 이야기를 하겠느냐고!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알레스는 이렇게 소리 높여 외쳤다.

하얗게 눈 덮인 벌판에 덩그러니 서 있던 커다란 메밀 창고. 그 창고를 개조한 극장에 영지민들이 꽉꽉 들어찼다.

마침내 노래 연극 ‘나의 눈사람’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눈이 무대 위에 펼쳐진 마법 같은 광경에 집중했다.

처음에 관객들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섬세한 조각상 같은 꽃미남 배우들의 모습에 술렁거렸다.

그들의 아름다운 노래와 멋진 춤에 넋을 빼앗겼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객들은 점점 배우들이 연기하는 눈사람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훌쩍훌쩍.

어느새 관람석이 눈물로 젖어들었다.

덩치 큰 어른들이 아이처럼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순박한 관객들은 급기야 앞다투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눈돌아!”

“밍키야!”

“똘아!”

“올라프!”

“방실아!”

“맥시밀리안!”

“일론!”

“세바스찬!”

“찰떡아!”

어린 시절, 꿈과 사랑을 가르쳐 주었던 나의 눈사람.

어느 날 털모자와 털목도리만 남긴 채 홀연히 떠나가 버린 그 첫 친구, 첫사랑, 첫 이별의 이름을 사람들은 목 놓아 불렀다.

부족한 것이 많은 척박한 땅, 풍족한 것이라곤 지천에 쌓인 눈밖에 없던 메르세데스에선 누구나 반려 눈사람 하나쯤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오랜 시간을 건너 잊고 살았던 나의 눈사람을 만났다.

관람석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알레스도 덩달아 마음이 찡해져서 코끝을 쓱 훔쳤다.

이 노래 연극이 영지민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을까?

이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릴 수 있을까?

나아가 더 많은 사람이 행동하도록 용기를 북돋우고, 더 많은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

이 밤은 관객들에게도, 첫 무대에서 혼신의 연기를 펼친 배우들에게도, 누구보다 알레스 자신에게도 매우 낯설고 이상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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