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고백은 입모양으로
공작이 북부의 매서운 추위에 익숙지 않은 알레스를 위해 마법으로 방한막을 둘렀다.
“눈고양이들이랑 친하신가 봐요.”
공작의 다리에 몸을 비비는 고양이들을 보며 알레스가 말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 녀석들 만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니까요.”
“운 좋은 고양이들이네요.”
매일 미남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다니.
공작부인이 되는 여자도 매일 아침 저 얼굴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겠지.
아, 아름다운 인생이여.
“운은 내가 좋은 거겠지요. 이렇게 귀여운 녀석들과 가깝게 지낼 수 있으니.”
“눈고양이들 정말 귀여워요.”
알레스도 공작이 하는 것처럼 고양이의 턱이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듣기로 눈고양이들은 천사 같은 생김새와는 달리 성질이 매우 까칠하고 사납다 했다.
예쁘다고 섣불리 손을 뻗었다가는 피를 보기 일쑤라고.
그런 눈고양이들조차 미남은 알아보는 건지.
마치 순한 양처럼 머리며 턱이며 등이며 옆구리며 공작에겐 마구 내어주고 있었다.
알레스도 공작에게 묻어가 슬쩍 만져 볼까 했지만, 어째 자신을 쳐다보는 고양이들의 눈빛이 매서워 보였다.
자신과 눈만 마주쳐도 발톱을 세우는 것 같고 하악질을 하는 것 같고.
귀를 뒤로 바짝 눕힌 모습이 왠지 자신을 싫어하는 듯 보이는 건 괜한 망상일까.
손만 대 봐. 확 할퀴거나 콱 물어 버릴 테니까.
이렇게 냥냥거리는 것 같았다.
영지민들에 이어 눈고양이들까지 적대감을 드러내는 걸까!
고양이를 상대로 괜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알레스에게 공작이 말했다.
“매일 아침 알레스 당신과 이 행운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
방심한 사이 또 공작의 프러포즈를 받은 걸까?
라면 먹고 갈래? 아니고 같이 고양이 밥 주러 갈래?
대답을 기다리는 공작의 다정한 눈길이 알레스의 얼굴에 집중되자 어쩐지 눈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날카로워진 듯했다.
“그거 압니까? 당신 눈고양이랑 많이 닮았어요.”
눈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이래저래 진땀이 나는 것 같아 알레스는 공작에게 부탁했다.
“카이트, 방한막 좀 잠깐 걷어 주시겠어요?”
“춥지 않겠습니까? 이곳의 추위는 제도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알아요. 입김을 내쉬면 바삭바삭 얼어붙는다면서요? 이곳의 참맛을 느껴 보고 싶어요.”
이 후끈한 분위기를 얼른 냉각시켜야죠.
나도 찬바람 쐬고 정신 좀 차리고요.
알레스의 말에 공작은 하는 수 없이 방한막을 걷었다.
순식간에 얼얼한 추위가 온몸을 후려쳤다.
알레스는 허공을 향해 입김을 하아 하고 내쉬었다.
반짝이는 얼음 결정들이 후두두 떨어졌다.
“와아, 정말이네요. 예쁘고 신기해요.”
이 말도 곧 투명한 얼음 조각이 되어 쏟아졌다.
“밤비 경이 그러는데, 익숙해지면 원하는 모양도 만들 수 있다면서요?”
투두둑.
“어렸을 때 친구들이랑 내기도 했대요.”
토도독.
“그거라면 나도 꽤 능숙합니다. 보여 줄까요?”
투둑.
“네!”
톡.
공작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알레스를 향해 입을 움직였다.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그의 도톰한 입술이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허공에 입김을 내놓자, 이내 그의 손바닥 위로 반짝이는 얼음 결정이 내려앉았다.
‘내 이름?’
공작이 알레스에게 건넨 것은 투명한 얼음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이름, 알레스였다.
알레스가 자신의 손 위로 옮겨온 그 얼음 결정을 신기한 눈으로 보고 있을 때, 공작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도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사….’
알레스는 무심코 그의 입모양을 읽다가 얼굴을 붉혔다.
사탕이나 사람을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공작이 건넨 얼음 결정의 모양은 사탕이나 사람이 아니었다.
공작의 심해안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아, 카이트, 생각보다 잡기에도 능하군요.
“저도 입김으로 카이트의 이름을 만들 수 있도록 연습해야겠어요.”
투두둑.
알레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매일 불러 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샤라락.
공작의 마음이 눈송이처럼 나부꼈다.
* * *
“동쪽에 있는 프러포즈 명소와 키스 벤치는 나와 밤비가 둘러보고, 서쪽에 있는 건 마사와 헤라클레스가 다녀오도록.”
알레스가 답사 업무를 지시했다.
“아가씨, 의도가 너무 뻔하시잖아요.”
마사가 항의했다.
“알면 잘 다녀오도록. 내가 전부 다 살펴볼 순 없잖아!”
알레스가 일부러 더 딱딱거렸다.
공작의 고백 앞에 우물쭈물하는 자신의 모습이 마사와 헤라클레스 커플에게 투영돼 괜히 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완벽한 장소를 마련해 줬으니 제발 진도 좀 나가고 오라고.
왠지 팽팽해진 분위기를 깨며 밤비가 보따리를 내밀었다.
“저, 아버지가 레이디께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맛을 좀 보시지요.”
보따리를 풀자 빛깔부터 군침이 도는 푸딩이 나왔다.
“아버지가 직접 만드신 겁니다.”
푸딩을 직접 만들었다면 아버지가 혹시?
“이곳으로 오시기 전에 남부에서 푸딩 가게를 하셨거든요. 솜씨가 꽤 좋으세요.”
전직 푸딩 가게 주인, 현직 청매단 단장이며 메르세데스에 푸딩 노래를 전파한 그….
“밤비 경의 부친이 패트릭 단장이신가요?”
“예, 성에서 두 분 인사 나누셨지요.”
“밤비 경이 그분 딸이었다니! 그럼 노래 속 푸딩을 좋아하는 앤은 밤비 경 어머니?”
“아, 저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겨우겨우 공작가에 발탁되어 기사 서임식을 앞두고 있을 때 단장님이 저를 양녀로 삼아 주셨지요. 귀족가의 전속 기사가 되려면 이런저런 지원이 필요하다면서요.”
“그랬군요. 참 달고 부드럽네요. 푸딩이 입에서 사르르 녹아요.”
알레스가 두 눈 가득 감동의 빛을 글썽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마사와 헤라클레스가 티격태격하며 떠나고, 알레스도 밤비와 함께 방한 마차를 타고 프러포즈 스팟들을 향해 출발했다.
준비된 장소를 둘러보기 위해 잠시 마차를 세울 때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몰려나와 알레스를 노려보았다(알레스 시점).
사탕당근 밭과 공동 작업장을 둘러볼 때처럼 이번에도 노려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무언가 위협적인 기운이 다가오는 게 불쑥불쑥 느껴졌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는지, 급기야….
웬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무섭게 굳은 얼굴로 다가오더니 무쇠 같은 주먹을 알레스를 향해 뻗었다.
흡, 알레스는 놀라서 숨을 멈추었다. 멱살? 머리채?
그러나 그는 주먹을 허공에 띄운 채 무뚝뚝하게 한마디 내뱉었을 뿐이었다.
“오다 주웠습니다!”
“……?”
알레스가 얼떨결에 손을 내밀자 그가 무언가를 냅다 쥐여 주고는 등을 휙 돌려서 가 버렸다.
손바닥 위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토끼 모형이 놓여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밤비가 나무 토끼를 보고는 말했다.
“눈토끼네요. 여기선 행운을 가져다주는 동물입니다. 토끼들이 사탕당근을 먹어도 내쫓지 않는 걸 보셨지요?”
아, 행운의 눈토끼. 이걸 왜…?
“사탕당근 농가에 갔을 때도 느꼈지만, 영지민들이 레이디를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무뚝뚝한 사람들이라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방금 그 나무 토끼 같은 것이 다 호감의 표시입니다.”
이게? 호감이라고?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정말로 가는 곳마다 ‘오다 주웠다’면서 무언가를 떠안기는 이가 점점 늘었다.
심지어 떠나는 마차 안에다 오다 주운 것을 집어 던지다시피 하고 도망가는 이도 있었다.
“오다 주웠네?”
“오다 주웠소!”
제국의 북부, 메르세데스의 영지. 이 지역 길바닥엔 뭐가 그렇게 많이 떨어져 있는 건지.
이곳 영지민들은 길에서 뭘 그렇게 많이 줍줍 하는 건지.
어느덧 마차 안에 가득해진 오다 주운 것들을 보며 밤비가 웃었다.
“이것 보십시오. 다들 레이디를 좋아합니다.”
“왜요? 나를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요….”
“공작 전하의 손님이시니까요.”
“그런 이유로 이렇게까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하가 레이디께 각별한 호감을 품고 계시다는 걸 영지민들도 알고 있습니다.”
“네에? 아니 뭐 그런 것까지 영지민이 알고….”
역시 살벌한 영지민 시월드로군.
혹시 오다 주운 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건가?
“공작 전하가 아끼는 분이라면 분명 좋은 분일 거라고 이곳 영지민들은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어어, 나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가면 어떡해?
“공작 전하가 좋아하는 분을 영지민들이 좋아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잠깐만요! 여기서 이러면 안 되잖아요.
시월드면 시월드답게 다들 들고일어나 반대하란 말이야.
“전하의 친구는 영지민의 친구, 전하의 적은 영지민의 적, 전하의 연인은….”
사탕당근 싸대기라도 날려 보라고요!
일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거냐고요!
자신의 의도와는 영 다르게 움직이는 영지민들을 보며 알레스는 적잖이 당황했다.
허탈한 기분에 빠져 있던 알레스는 전부터 납득이 잘 안 가던 점을 밤비에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영지민들은 어째서 공작 전하를 저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는 거죠? 성군을 향해 어느 정도야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다지만 내 눈엔 지나쳐 보여서 말이죠.”
알레스의 솔직한 물음을 밤비는 잠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맞다, 레이디는 그 사실을 모르시지.
“레이디, 제가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사실이 있군요. 그러니 레이디께서 영지민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실 만도 합니다.”
“내가 모르는 사실이요?”
“메르세데스는 오랫동안 제국 북부의 국경을 지켜오지 않았습니까. 그 탓에 전하께서도 연중 이백 일을 전장에 계시고요.”
“예, 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타 지역 사람들은 언뜻 생각하겠지요. 이곳 영지민들은 늘 전투에 동원되느라 어렵고 고달픈 삶을 이어가고 있을 거라고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변경에서 전투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니.
“하지만 실제로 전장에 나가는 인원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공작 전하와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닌 정예 기사단만 전투를 치르지요. 그나마 기사단은 스무 명씩 돌아가면서 참전하고요.”
“…그러니까 거의 전하 혼자 전장을 지키신다 그 말인가요?”
“예,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 이런 대형 눈사람, 아니 호구를 봤나.
알레스는 날아가려는 뚜껑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어째서 그렇게 된 거죠?”
“선대 때도 영지민 동원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공작 부부께서 워낙 검술과 마법 실력이 뛰어나셨던 터라 전투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시긴 했지요.”
“그렇더라도 지금처럼 한 사람이 감당하는 것은 좀….”
“맞습니다. 가신들이나 영지민도 만류했습니다. 그래도 카이트 전하는 고집을 꺾지 않으셨지요.”
“대체 왜요?”
“강한 마법력과 검술 실력을 지닌 본인 한 사람으로 족한데, 괜한 생명을 위험으로 내몰고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