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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06화 (104/120)

106화

연애는 눈치껏 잘

동방에서 온 현자, 메스세데스의 대스승 가라사대.

“사람이 오직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면 평생 수련을 해도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우선할 때, 나 자신보다 더 아끼는 타인이 생길 때, 우주의 보잘것없는 존재였던 우리는 비로소 무한하고 영원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공작은 다소 멍한 표정으로 굳어 있다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그동안 사랑에 대해 하신 말씀과는 많이 다른데요?”

“글쎄요, 전하께서 제 말을 곡해하신 것 아닙니까?”

“사랑은 감정 낭비일 뿐이다, 여색을 멀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시지 않았습니까?”

항의가 담긴 제자의 눈빛에 마스터 현은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답했다.

“전하, 스승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학생은 성실하고 좋은 학생입니다. 그러나 뛰어난 학생은 스승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지요.”

* * *

“그래, 내 인생에 연애는 무슨! 남자 아니라도 이렇게 좋은 게 많은데!”

주욱 들이켠 맥주잔을 바닥에 탁 내려놓으며 마사가 호기롭게 내뱉었다.

이곳은 메르세데스 성에 설치된 찜질방.

알레스의 설계에 따라 메르세데스 성과 관광객들이 묵을 숙소에 찜질방이 만들어졌다.

방 한가운데 마정석인 라피스로 열을 내는 가마를 두었고, 한쪽엔 주변에 가득한 눈과 얼음을 채운 얼음방도 마련했다.

말린 약초와 허브를 묶어 찜질방 벽에도 걸고 가마 안에도 넣어 좋은 향이 은은히 퍼지게 했다.

“마사, 눈 여왕의 궁전도 먹어 봐. 시원하고 달콤해!”

빙수 그릇을 끌어안은 알레스의 눈에서 별이 와르르 쏟아졌다.

이곳에서 땀 흘린 후 먹는 메르세데스식 빙수인 눈 여왕의 궁전은 그야말로 별미였다.

“아,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뭉쳤던 근육 하나하나가 아기 몸처럼 말랑말랑해지는 것 같아요.”

밤비가 평소엔 볼 수 없는 노곤한 얼굴로 말했다.

“밤비 경, 여기선 긴장 풀고 푹 쉬어요.”

알레스도 기지개를 쭉 펴며 권했다.

“어흐, 아가씨 너무 좋네요. 뼈까지 노글노글 녹아내릴 것 같아요. 만성 어깨 결림이랑 손목, 무릎 아프던 것도 씻은 듯 사라졌어요.”

마사가 두 번째 잔에 맥주를 채우며 즐거운 듯 말했다.

“마사, 다 좋은데 술은 적당히 마셔. 안주로 이것도 좀 먹어 봐.”

알레스는 삶은 달걀 하나를 내밀었다.

찜질방 간식으로 빙수와 함께 삶은 계란도 꼭 구비해 달라고 관리인에게 부탁해 두었다.

맥주는 마사가 제도에서부터 짐마차에 싣고 온 거였다.

추운 곳에서 시원하게 마시면 더 맛있을 것 같다며 부득부득 챙겨 왔다.

특급 유모는 못 말리는 애주가였다.

그의 초연하 직진 남친은 술을 한 모금만 먹어도 온몸이 새빨개져서 잠이 드는 음주 약골인데 말이다.

그래도 마사의 기분이 풀린 것 같아 알레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까 낮에 사탕당근 농장에 갔을 때부터 여행 내내 들떴던 마사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더랬다.

건드리면 천둥 벼락이 떨어질 것 같아 슬슬 눈치를 보던 참이었다.

그러다 찜질방에 온 후로 서서히 먹구름이 걷히더니 언제 흐렸냐는 듯 완전히 쨍한 날씨가 됐다.

“아, 내가 두 사람을 위해 챙겨 온 것이 있어요.”

알레스가 천으로 덮은 볼을 내놓았다.

“이게 뭡니까?”

“그동안 수고해 준 두 사람을 위해 레이디 페레티가 준비한 특별 서비스!”

“먹는 겁니까?”

“재료를 주방에서 구해 오긴 했지만 먹을 건 아니에요. 피부에 양보할 거예요.”

“예?”

“자자, 질문은 그만. 두 사람 다 여기 간이침대에 누워 봐요.”

주저하는 마사와 밤비를 알레스는 억지로 선베드처럼 생긴 간이침대에 눕혔다.

그런 다음 볼에 있는 재료들을 주걱처럼 생긴 조리도구로 두 사람의 얼굴에 척척 발랐다.

흠칫 놀란 마사와 밤비가 물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피부가 아주 매끈해지고 윤기가 좔좔 흐른대.”

알레스는 주방에서 밀가루, 생크림, 달걀흰자, 오이, 감자, 찻잎, 꿀 등 미용 팩 재료를 얻어 한데 섞었다.

이쪽 세상에서도 귀족들은 미용을 위한 마사지나 팩, 필링 등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마사나 밤비는 그런 걸 할 형편도, 성격도 못 되니까.

보스인 알레스가 직원 복지를 챙길 수밖에.

팩을 하는 동안도 둘은 불편해하며 틈만 나면 일어나려고 파닥거렸지만, 알레스가 제압했다.

“내가 일러줄 때까지 그 상태로 편히 누워 있어요. 잠깐 자도 좋고.”

두 사람의 얼굴에 반죽을 다 올린 알레스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제가 아가씨를 꾸며 드려야죠! 솥뚜껑 같은 얼굴에 이 아까운 걸 올려서 뭐 합니까? 안 그래도 가는 곳마다 영지민들이 아가씨만 애타게 쳐다보는데.”

이번 방문은 상견례나 마찬가진데 말이에요!

“왜 걸핏하면 솥뚜껑이래? 그거랑은 하나도 안 닮았고 마사 얼굴은 오밀조밀하기만 한데. 오죽하면 초연하 인기남이 물불 안 가리고 쫓아오겠어.”

마사의 기분이 풀린 것 같아 알레스는 일부러 헤라클레스 얘기를 슬쩍 꺼냈다.

“그러네요. 한참 어린 나이네요. 자기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그 어린 사람이 제대로 알기나 하겠어요.”

마사의 목소리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헤라클레스가 어딜 봐서 어려?”

“물론 생긴 거나 하는 짓이 중늙은이 같긴 하지요. 친정 오빠인 양 행세할 때는 깜빡 속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 나이에 여자를 몇이나 만나 봤겠어요.”

“공유 마차 간이 카페에서 여자 손님들 줄창 보는데?”

“어휴, 그 말이 아니잖아요. 앞으로 다양한 여자들을 만나 보면 세상에 괜찮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지금 자기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했는지 알게 되겠죠.”

“난 헤라클레스의 여자 보는 눈이 터무니없이 높다고 생각하는데? 그동안 빵 머리라고 놀린 거 취소야. 이제 보니 보통내기가 아니었어.”

“여자 보는 눈이 높긴요. 아무 여자한테나 헤벌쭉하는데.”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웃음이고. 나름 접대용이랄까. 내가 가능한 한 말하지 말고 웃으라고 했다니까.”

“아무리 아가씨가 그러셨대도 저도 그러고 싶으니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공작 전하 좀 보세요. 다른 영애한테 눈길 한번 허튼 미소 한번 주시는 적이 없잖아요.”

어허, 카이트야 매우 특별한 사람이고. 어따 막 갖다 붙이셔?

알레스의 목이 괜히 뻣뻣해졌다.

“그런데 마사, 아까 사탕당근 농가에 갔을 때부터 기분이 안 좋은 거 같던데. 무슨 일이 있었어?”

입을 비죽거리며 주저하던 마사가 마침내 퉁명스레 내뱉었다.

“명인님, 명인님, 하면서 찬사를 보내니까 아주 정신을 못 차리던데요 뭐.”

역시, 시아라는 이곳 피티시에가 헤라클레스에게 호감을 표하는 걸 봤구나.

알레스는 헤라클레스를 변호할 말을 떠올렸다.

“같은 분야 장인에 대한 존경심을 표한 거고, 당연히 헤라클레스 입장에선 자부심을 느꼈겠지. 개인적인 관심하고는 다른 것 같아.”

“흥, 그뿐이면 말을 안 하죠. 그 메르세데스의 파티시에가 브레이브 경의 팔 근육까지 주물럭거렸다고요. 명인님, 몸은 어떻게 관리하세요오, 하면서 말이에요!”

이런. 실드 쳐 주기도 쉽지 않게 만들어 놨잖아.

알레스가 속으로 꿍얼거릴 때, 마침 밤비가 지원을 나섰다.

“아마 시아는 정말로 체력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봤을 겁니다. 파티시에가 하는 일이 의외로 강한 체력을 요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시아 역시 따로 근육 단련과 검술 연습을 하거든요.”

“하긴 천타빵의 비결도 헤라클레스의 무지막지한 팔 힘이잖아.”

알레스도 냉큼 거들고 나섰지만 마사는 콧방귀를 뀌며 비꼬았다.

“흥, 존경한다고 띄워 주면 몸도 까서 보여 주겠네요.”

“아항, 마사 질투하는 거구나. 정작 헤라클레스의 깐 몸을 본 건 마사면서. 그러니까 책임을 져야지.”

“제가 뭘 했다고 자꾸 책임을 지라고 하세요.”

“남자의 순정을 가져간 책임?”

“저는 가져간 적 없네요.”

“그럼 대체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거야? 마사 말대로 헤라클레스는 마사의 취향도 아니고, 헤라클레스의 마음을 받아 줄 생각도 없다면서 왜 그렇게 화가 났냐고!”

“저는 원래 그런 파렴치한 인간들을 싫어해요! 별생각 없이 이 여자 저 여자 홀리는 말이나 하고!”

마사, 전혀 앞뒤가 안 맞는 억지인 건 본인도 알고 있지?

헤라클레스가 들으면 또 울겠네.

하지만 덕분에 마사 역시 헤라클레스에게 마음이 없는 건 아니라는 사실은 확인한 셈이었다.

레이디와 유모가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는 밤비의 표정은 딱 이것이었다.

마사와 헤라클레스의 연애사에 이렇게 긴 시간 참견할 일인가.

결국 둘은 알아서 잘 지낼 것 같은데….

정작 급한 것은 레이디 페레티와 공작 전하의 진도였다.

레이디를 공작부인 자리에 앉히기 위해 그동안 갖은 물밑 작업을 해 왔고, 결국 레이디를 홈그라운드로 모셔오지 않았는가.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낸다면 그보다 애석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중차대한 시기에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마사 부인이 하필 남자 때문에 저리 정신이 나가 있으니….

레이디를 메르세데스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할 텐데.

“저, 레이디,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마침내 밤비가 알레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뭔데요? 편하게 말해 봐요.”

“겨울애가 여행 코스 중에 ‘공작과 눈고양이의 길’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아, 공작 전하가 평소 눈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길에서 고양친구 체험을 해 보는 것 말이죠?”

“이른 아침에 답사를 나가 봐야 할 텐데요. 하필 제가 내일 본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부친이 서운하다며 잠깐이라도 들르라고 성화를 하셔서요. 아침 식사만 하고 곧장 돌아오겠습니다.”

“걱정 말고 천천히 다녀와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메르세데스 성 안이고 공작 전하가 계시니 안전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참,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가면 눈고양이들이 겁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귀여운 눈고양이들을 보고 싶으니 나 혼자 조용히 살펴보고 올게요.”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 * *

아침 햇살을 받은 눈이 반짝반짝 빛을 내는 오솔길.

공작의 눈동자처럼 새파란 하늘 아래 길 양옆으로 은빛 자작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훤칠한 실루엣 하나가 들어왔다.

천천히 걷는 그의 뒤로 은빛, 금빛, 잿빛, 줄무늬, 점무늬 털 뭉치들이 졸졸 따라왔다.

‘귀여워….’

눈고양이들도 공작을 좋아하는지 아침밥도 뒷전인 채 공작을 따라 산책을 나선 듯했다.

마침내 알레스를 발견한 공작이 환하게 웃었다.

“알레스.”

그의 입에서 나온 그녀의 이름이 곧 반짝이는 얼음 결정이 되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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