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죽일 듯한 환대
영지민들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쏘아보는 눈빛이 알레스의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였다.
솔직담백하고 가식을 싫어하는 북부인들답게 적의를 숨길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알레스는 얼굴뿐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깐깐한 시선이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작은 흠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가 살벌했다.
그들에게 등을 지고 있을 땐 뒤통수로도 섬뜩한 기운이 다가와 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아무리 기질이 무뚝뚝한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이방인을 향한 단순한 반감이나 경계심이라기엔 지나친 감이 있었다.
혹시 벌써 이상 신호를 감지한 걸까? 공작과 나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다는?
공작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비상한 촉이 발동했을 수도 있어.
알레스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니면 설마 벌써 소문이 퍼진 걸까? 내가 공작의 청혼을 거절했다는?
청혼을 받아들였대도 마음에 안 들겠지만, 감히 공작의 청혼을 거절한 것은 그보다 더한 대역죄일 터였다.
이러다 돌을 집어넣은 눈덩이 같은 게 날아오는 건 아닐까 싶어 알레스는 절로 목이 움츠러들었다.
영지민들의 열성적인 반대와 험담과 모함이 절실히 필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쓰러지고 싶진 않았다.
예상보다 더 노골적인 위협을 느끼며 알레스는 마을 대표의 안내에 따라 시럽을 만드는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낡았지만 깔끔하게 관리한 조리기구들이 정돈돼 있는 작업장에는 검고 반질반질하고 커다란 솥 네 개가 김을 올리고 있었다.
“아까 보신 사탕당근과 산열매를 끓여서 눈 여왕의 궁전에 올릴 시럽을 만듭니다.”
원래는 집집마다 혹은 몇몇 농가나 마을 전체가 조합을 이뤄 차별화된 재료와 비법으로 고유의 시럽을 만들었지만, 관광객을 대상으로 만드는 방법을 단순화한 것이었다.
관광객에게 선보이고 제도 분점에도 내놓을 시럽은 헤라클레스가 함께 선별했다.
각자의 주방에서 연구한 결과를 서신을 통해서만 나눴던 터라, 현지의 작업장을 둘러보는 헤라클레스의 눈이 평소 같지 않게 반짝거렸다.
알레스도 보글보글 끓는 솥 앞에서 사업 구상에 빠졌다.
메르세데스식 빙수인 눈 여왕의 궁전을 찜질방과 함께 보급하는 건 어떨까? 찜질방 필수 음료인 살얼음 식혜 대신으로 말이지….
그러다 알레스는 문득 느껴진 살기에 흠칫 놀랐다.
등 뒤로 뭔가가 왔다 간 듯한데…?
처음엔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 아닌가 의심했지만, 분명 손이나 둔기 같은 게 다가왔다 멀어지는 기척을 몇 차례나 느꼈다.
뭐야… 설마 절절 끓는 솥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건 아니겠지? 조리도구로 뒤에서 후려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주방이라는 곳이 매우 위험천만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도 있고 칼도 있고 무쇠도 있고 몽둥이도 있고….
영지민의 반대를 등에 업고 공작의 청혼을 거절하려다 아예 세상을 등지게 되는 건 아닌가 두려웠다.
“처음 뵙습니다, 레이디 페레티. 저는 이번 사탕당근 농가 체험과 비법 시럽 대회 관리를 맡은 시아라고 합니다. 메르세데스 공작가 전속 파티시에입니다.”
다행히 이곳 사람 같지 않게 상큼발랄한 아가씨의 등장으로 잔뜩 긴장했던 알레스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그녀는 알레스에게 예를 갖춘 후 곧장 헤라클레스를 찾았다.
“천타빵의 명인인 브레이브 경을 뵙게 돼 영광입니다. 만나면 여쭙고 싶은 게 많았거든요. 오늘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시아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헤라클레스에 대한 존경과 격찬과 감탄의 말을 한참이나 쏟아냈다.
뒷목을 긁적이며 쑥스러운 듯 웃는 헤라클레스의 입이 함박같이 벌어졌다.
마사가 그토록 싫어하는 헤픈 웃음이었다.
위험해… 알레스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작업장에서 나오자마자 다시금 쏟아지는 영지민들의 눈총에 남 연애 걱정할 때가 아니란 현실을 자각해야 했다.
그들의 눈길은 집요한 면이 있었다. 마치 철천지원수의 얼굴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려는 것처럼.
그렇게 심장이 쫄깃해지는 영지민과의 1차 상견례를 마치고 알레스 일행은 메르세데스 성으로 향했다.
메르세데스 성은 북부인들의 성답게 기교나 장식 없이 단순하고 투박했지만, 웅장한 규모는 보는 이를 압도했고 특유의 고상한 분위기가 있었다.
공작은 직접 안내하며 성의 구석구석을 보여 주었고, 가신들과 고용인들도 소개해 주었다.
전반적으로 저쪽 세상에서 한창 유행하던 미니멀 라이프의 모델 하우스 같은 곳이라는 게 알레스의 감상이었다.
‘어? 저 사람은!’
역대 공작들과 공작부인들의 초상화가 걸린 복도로 안내됐을 때였다.
알레스는 한 초상화 앞에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선대 공작, 즉 카이트의 부친인 미카엘 라줄리 메르세데스 공작의 초상화였다.
알레스가 거기서 본 것은 분명 저쪽 세상 사내 킹카의 얼굴이었다!
카이트와 닮은 듯하지만 훨씬 더 차가운 눈빛과 표정을 지닌 바로 그 얼굴.
이쪽 세상에 와서 처음 공작을 만났을 때도, 알레스는 그가 사내 킹카와 꼭 닮아서 깜짝 놀랐고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이 전혀 다르다고 느끼게 되었다.
지금 그의 모친인 선대 공작부인의 초상화를 보니, 카이트의 눈빛과 표정은 부친보다는 모친을 닮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카이트, 어머니를 닮았군요.”
“그렇습니까. 마법력도 어머니께 물려받았습니다.”
“그래요?”
마법 쓰시는 시어머니(?)라니 멋지다.
알레스는 다시 한번 선대 공작부인의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카이트와 같이 다정하고 상냥한 눈빛에 왠지 모를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그나저나….
사내 킹카를 꼭 빼닮은 저 선대 공작은 어찌 된 일일까.
‘하긴 카이트를 처음 보았을 때도 사내 킹카랑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랐잖아? 지금 와서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 말이야.’
그러니까 아버님도 직접 보면 사내 킹카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일지 모르지.
그냥 잘생겨서 닮아 보이는 것으로.
알레스는 그렇게 납득하고 넘어갔다.
성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간 공작의 집무실에서 드디어 동방에서 온 공작의 스승, 마스터 현을 만났다.
‘그 적토마 타고 와서 카이트에게 이런저런 아재 취향을 주입하신 분이 저분이군.’
알레스가 초면에 신기한 눈을 하고 이모저모 뜯어보아서인지 공작의 스승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페레티, 페레티 백작의 영애시라는 거지요?”
그는 살짝 넋이 나간 듯이 중얼거렸다.
사실 마스터 현이 얼빠진 표정이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지독한 제국식 이름 기억상실증이라서 중요 귀족은 물론 가까운 가신들의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기왕 제국에 정착할 거라면 제국식 이름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주변에서 아무리 말해도 필요 없다며 역정만 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높은 경지에 오른 검사답게 눈썰미는 뛰어났다.
알레스의 얼굴에서 십수 년 전 잠시 만났을 뿐인 페레티 백작 부부의 흔적을 순식간에 찾아냈다.
물론 잠시 만났다고는 해도 자신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이들이었기에 결코 잊을 수 없었지만.
“레이디가 페레티 가문의 영애였단 말이지요.”
“제가 레이디의 성함이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리티라고 몇 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공작이 참다못해 스승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 페레티가 그때 그 페레티인지 몰랐다는 게지요.”
“우리 메르세데스가 줄곧 페레티 영애의 소식을 챙겨 오지 않았습니까.”
“여하튼 저는 몰랐다니까 자꾸 그러십니다.”
곁에서 보다 못한 뵈커 기사단장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대스승께선 제국식 이름을 통 기억 못 하시지 않습니까. 그 탓에 대스승과 신은 지금껏 전하가 푹 빠져 정신 못 차리고 계신 분이 과거 은인 가문의 영애인지 몰랐습니다. 그저 제도의 어떤 사특한 레이디에게 빠져….”
기사단장의 꾸밈없고 눈치도 없는 말을 가로막으며 나선 이는 목과 어깨가 두툼한 거구의 남자였다.
마스터 현이나 기사단장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지만 체구는 헤라클레스만큼 건장했다.
“레이디의 면전에서 이 무슨 무례십니까. 죄송합니다, 레이디 페레티. 오랜 수련으로 여색을 멀리해 온 탓에 훌륭한 레이디를 대하는 법을 모릅니다.”
그는 자신을 청매단의 패트릭 단장이라고 소개했다.
청매단이라면 메스세데스의 정보 조직, 그 수장인 패트릭이라면 전직 푸딩 가게 주인으로 메르세데스에서 노래를 부를 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아, 아주 맛있는 푸딩을 만드신다고 들었습니다. 노래도 잘 부르시고요.”
알레스가 반가운 마음에 알은체를 했다.
“하하, 제 푸딩 실력이 거기까지 소문이 났습니까. 이거 제가 만든 푸딩을 레이디께 대접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나저나 제 노래 솜씨는 또 어떻게 아셨는지….”
패트릭은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아는 사람은 알았다. 그의 눈이 예리하게 빛난 것을.
명색이 메르세데스 정보 조직의 수장인 자신의 신상이 이토록 낱낱이 털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전하께서 푸딩 노래를 불러 주셨는데 그 노래가 원래 패트릭 단장님의 노래라고요.”
알레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스터 현, 뵈커 기사단장, 패트릭 청매단장의 고개가 동시에 공작을 향해 돌아갔다.
공작 전하가 노래를, 그것도 푸딩 노래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작 공작은 뭐가 문제냐는 듯 천연덕스런 얼굴이었다.
여하튼 발칙한 악녀로 소문난 레이디가 알고 보니 은인인 페레티 가문의 후손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메르세데스의 세 어른은 손바닥 뒤집듯이 입장을 바꾸었다.
원래는 순진한 공작을 꾀어낸 사특한 여자를 꾸짖고 얼러서 떼어 버리고자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던 차였다.
“마스터 현의 기억력도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은인 가문의 성조차 구분을 못 하십니까.”
“뵈커 단장도 미친 초록별이 다가온다 하지 않았소. 그 별점은 어떻게 된 거요.”
이렇게 서로를 타박하는 수밖에.
알레스 일행이 휴식을 위해 준비된 방으로 간 후, 공작은 스승에게 물었다.
“레이디 페레티를 직접 만나 보시니 어떻습니까? 공작부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혼인 의사를 비치는 공작에게 마스터 현이 대답했다.
“전하의 뜻이 중요하지요. 제 생각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분명 못마땅한 얼굴로 걱정하셨던 것 같은데, 달라진 스승의 태도에 공작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다.
“제가 한 여인에게 빠져 영주로서의 의무나 검사로서의 수련을 소홀히 할까 봐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공작의 물음에 마스터 현이 해탈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요.”
스승의 말에 공작의 눈이 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