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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04화 (102/120)

104화

러브러브 온천 터졌네

온천탕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남자들이 오른편에 있는 온천에서 목욕을 한다는 건 틀림없는 정보였다.

여행으로 하이 텐션이 된 특급 유모는 아가씨를 위해 이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괜한 궁리까지 했다.

제도를 떠나기 전엔 분명 두 분 사이에 뭔가 야릇한 조짐이 있었다. 아가씨의 부푼 입술이 그 증거였고.

더욱이 지금은 공작 전하의 초대를 받아 메르세데스로 가는 길이 아닌가.

그런데 왜 두 분 사이의 공기가 이토록 어색하게 가라앉은 듯한지.

여정을 함께하며 자꾸만 부딪히고 즐거운 추억을 쌓다 보면 이 어색함도 곧 친밀함으로 변하겠거니 생각하며 마사는 걱정을 접어두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아가씨는 공작 전하와 마주치는 일을 아예 피하는 듯했다.

이래선 안 되지.

자유연애 지지자인 마사는 아가씨의 연애를 수호하기 위해 자기라도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때 굴러 들어온 온천욕이란 절호의 기회.

이런저런 이야기나 소문에서 흔히 접하지 않았는가.

우연히 그 혹은 그녀가 목욕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무너지듯 자신의 솔직한 욕망을 깨닫게 되는 뭐 그런.

훌륭한 몸 앞에 장사 없다고, 한번 봐 버린 눈을 무를 수는 없는 것이다.

중요한 건 유모 된 자로서 어떻게 하면 아가씨를 유인, 아니 바람직한 길로 모실 수 있을까 하는 점인데….

선택 1, 곧이곧대로 남자가 오른쪽이라고 말씀드린다.

예상 결과 1-1, 아가씨는 오른쪽을 피해 왼쪽으로 가신다.

예상 결과 1-2, 아가씨는 일부러 오른쪽으로 가신다.

평소 아가씨의 성향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왼쪽으로 가실 것 같았다.

그래서 사실 마사는 이렇게 바꾸어 말하려고 했다.

선택 2, 남자가 왼쪽이라고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예상 결과 2-1, 아가씨는 왼쪽을 피해 오른쪽으로 가셨다가 뜻하지 않게 목욕하는 공작 전하와 마주치게 되고, 유모에게 매우 고마워하신다.

예상 결과 2-2, 아가씨는 일부러 왼쪽으로 갔다가 허탕을 치신다.

그래, 남자가 왼쪽이라고 바꿔 말해야겠다!

마사는 스스로의 기지에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딱 여기까지 머리를 굴렸어야 하는데.

의욕이 지나친 마사는 한 발 더 나아갔다가 그만 머릿속이 엉망으로 꼬이고 만다.

아가씨가 혹시 뒤늦게 이성에 눈을 뜨셨으면 어떡하지?

또 사람은 자꾸만 듣다 보면 피해야 할 쪽을 실수로 선택하는 수가 있단 말이지.

예를 들어 오른쪽이 남자, 오른쪽이 남자라고 계속 들으면 분명 오른쪽은 피하자고 생각했음에도 자기도 모르게 귀에 익숙한 오른쪽으로 발이 움직여 버리는 실수.

아아, 어떡하지? 아가씨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확실할까?

이렇게 제 꾀에 제가 넘어간 마사는 별것 아닌 일을 쓸데없이 복잡하게 꼬아서 생각하느라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결국 아가씨에게 남자는 오른쪽이라는 진실을 고하고, 마사 자신은 실수인 건지 일부러인 건지도 헷갈리는 상태로 오른쪽으로 가서는.

그만 온천욕 중이던 헤라클레스의 알몸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으흐흑, 으흐흑.”

처음엔 마사도 무척이나 당황했다.

억, 어이쿠, 이런. 미안해요, 브레이브 경.

하지만 헤라클레스가 저렇게 서글피 울자 마사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뭐 큰일이라도 났어? 울긴 왜 울어?

평소에는 팔뚝만 잘 내놓고 다니더니. 이 여자 저 여자한테 웃음만 헤프게 잘 보여 주더니.

팔뚝이나 알몸이나 그게 그거지.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고!

실은 고양이 눈이라도 얻은 듯 어둠 속에서도 촘촘한 근육의 형태까지 다 보였지만 이렇게 우겨 보는 마사였다.

사실 마사가 ‘뀐 사람이 성내는’ 격으로 역정을 낸 건 헤라클레스가 사람을 차별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저렇게까지 유난을 떠는 건 하필 알몸을 본 사람이 앙숙이며 천한 유모여서가 아니겠는가.

만일 간이 카페에 찾아와 깍깍대는 싱그러운 귀족 영애들이 봤대도 저렇게 구슬피 울겠느냔 말이지.

특급 유모답지 않게 완전히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마사였다.

“마사가 잘못한 건 맞아요. 하지만 브레이브 경도 그만 진정해요. 울 일까진 아니잖아요.”

알레스가 두 사람을 중재하고 나섰다.

알레스의 말이 떨어지자 헤라클레스는 울음을 그치기는커녕 더 서럽게 흐느끼며 바위 같은 어깨를 들썩였다.

“열여덟 해를 살며 처음으로 여자에게 알몸을….”

“……?”

“다른 여자도 아니고 평소 흠모하던 마사 부인께….”

“……!”

이거 뭐부터 따져 봐야 할지 모르겠는 초유의 사태였다.

일단 신상 조사부터. 알레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열여덟? 설마 열여덟 살이란 말이에요?”

“예, 생일이 늦기는 하지만 그래도 얼마 전에 성인증을 받은 어엿한 열여덟입니다.”

알레스보다도 한 살이 어린 초연하남이었다니!

그간 헤라클레스가 보여 준 수줍음은 풋풋한 소년의 수줍음이었던 것이다.

다소 충격적이지만, 그거야 섣불리 외모로만 그를 판단한 알레스 자신의 탓인 거고.

중요한 건 이다음부터였다.

알레스의 입꼬리가 귀 아래까지 비죽 치솟았다.

어서 와, 마사. 그토록 바라던 자유연애의 낙원으로.

사실 알레스는 진작부터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고 있었다.

평소 티격태격하는 모양새도 그렇고.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을 하다가도 핑크 스쿠터를 타고 둘이 착 붙어 다니는 것도 그렇고.

정작 자신의 연애엔 둔감한 알레스였지만, 마사와 헤라클레스 모두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이어선지 둘 사이에 흐르는 이상 기류를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헤라클레스가 저렇게까지 어린지는 몰랐지만.

그야 놀리는 맛이 더해질 뿐이지 뭐.

알레스가 마사를 흘끗 보니 완전히 얼어붙어서 영혼이 가출한 상태였다.

알레스는 억지로 입꼬리를 내리고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마사가 책임을 져야지.”

바로 이런 맛이군, 음하하하.

마사, 각오해.

알레스의 말에 잠시 넋이 나갔던 마사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책임이라뇨? 아니, 실수로 몸 조금 봤다고 무슨 책임. 지금 놀리시는 거죠? 아니면 아가씨랑 브레이브 경이랑 짜고서 저를 놀리는….”

어허, 마사, 지금이야말로 실수한 거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헤라클레스가 울부짖었다.

“너무하십니다, 마사 부인. 노, 놀리다니요. 부인을 향한 제 순정은 결코 실수가 아닙니다!”

거봐,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순정을 가져가 놓고 그런 무책임한 발언을 하다니.

우리 헤라클레스를 뭐로 보고!

잘한다, 헤라클레스 브레이브! 자유연애의 영웅이여!

어물쩍 넘어가려던 마사는 초연하남의 직진에 다시 입을 크게 벌린 조각상이 되었다.

서른다섯 유모 인생에 닥친 최대 위기였다.

* * *

“아, 정말 부럽다. 젊고 건장하고 빵도 잘 만드는 제도 인기남의 절절한 구애라니. 너무 좋겠다, 마사.”

“아가씨, 이러실 거예요? 앙갚음은 이걸로 충분하시잖아요.”

“어머, 앙갚음이라니. 누가 들으면 또 울겠네. 듣는 나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왜 이러십니까, 진짜. 제 나이가 몇인지 아세요?”

“서른다섯. 브레이브 경이랑 열일곱 살 차이니까 딱 좋네, 딱 좋아.”

메르세데스령까지 얼마 남지 않은 길 위, 알레스는 마사를 놀릴 절호의 기회를 이대로 썩힐 순 없었다.

“제가 열여덟일 때 브레이브 경은 이제 막 세상에 나온 갓난쟁이였다고요! 말이 된다고 보세요?”

“운명이네, 운명이야. 널 만나기 위해 세상에 왔다, 일까?”

“아이 참, 장난도 정도껏 치세요. 아니 어떻게 아들뻘인 애랑 엮어요, 엮기를.”

“마사, 실망이다. 원래 그렇게 벽이 높았어? 자유연애를 부르짖는 열린 사람인 줄 알았더니.”

“유모 주제에 열리긴 뭐가 열려요. 그래도 살아온 날만큼 도리가 뭔지는 안다고요. 창창한 청년 앞길 막을 만큼 염치없진 않아요.”

“어허, 내가 염치 운운했을 때 마사가 날 잡아먹을 듯이 몰아붙이던 게 생각이 나네.”

“제가 언제요. 그리고 저랑 아가씨가 같아요? 비교할 걸 비교하셔야죠. 무엇보다 공작 전하는 외모로 보나 능력과 지위로 보나 아가씨의 찰떡 이상형이지만, 브레이브 경은 나이 차를 제외해도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

누구 맘대로 내 이상형이래?

솔직히 공작이 이상형이 아닌 사람이 세상에 있겠어? 나만의 이상형은 아니지.

나름대로 팔불출이 되어 가는 알레스.

“저는요, 머리에 든 게 많아 똑똑하고요, 잔근육이 조금 있는 호리호리한 체형에 고운 얼굴을 좋아하거든요. 아, 브린 황자님이 제 이상형이에요.”

하필 그런 촐싹 방정에 쨍쨍거리는 남자가 좋다고?

정말이지 몹쓸 취향이로군.

마사, 알고 보니 완전 헛똑똑이잖아?

“듬직하고 우직한 헤라클레스가 훨씬 낫지. 거기다 빵을 그렇게나 잘 만드는데. 무엇보다 마사를 억수로 사랑한다잖아!”

“어휴, 그만하세요. 브레이브 경도 그렇지, 대체 이 솥뚜껑 같은 얼굴 어디가 좋다고.”

“내가 보기에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려. 서로 훌륭한 점은 배우고 부족한 점은 채워 주는 멋진 한 쌍이 될 거야. 연인들의 성지가 될 메르세데스에서 오늘부터 1일 어때?”

“제발 아가씨야말로 오늘부터 1일 하세요. 메르세데스의 주인이신 공작 전하하고요. 그럼 저도 한번 생각해 볼게요.”

알레스와 마사가 서로의 연애를 강권하고 있을 때, 마차가 멈추더니 밤비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레이디, 여기부터 메르세데스 영지입니다.”

* * *

겨울애가 패키지여행 답사단은 시간도 아낄 겸 성에 짐을 풀기 전에 사탕당근 농가를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이곳에서 관광객들은 사탕당근 밭을 둘러보고 시럽 만들기 체험도 할 터였다.

채소밭이 뭐 볼 게 있을까 싶었지만 의외로 이 지역만의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하얗게 덮인 눈 이불 위로 신기하게도 침엽수처럼 뾰족뾰족한 새파란 잎과 주황색 뿌리 일부가 솟아나 있었다.

보통 당근의 색과는 달리 짙은 노랑을 띤 호박색에 가까운 주황이었다.

밭의 규모가 꽤 컸다.

그 넓은 눈밭에 사탕당근들이 선명한 색을 뽐내며 자라고 있는 모습은 나름 환상적이었다.

당근 사이사이로 하얀 눈뭉치처럼 생긴 것들이 굴러다녔는데, 자세히 보니 눈토끼들이었다.

이곳에선 눈토끼들이 농작물 먹는 걸 개의치 않는지, 토끼들은 사람을 보고도 느릿느릿 움직이며 천연덕스럽게 사탕당근을 뽑아 먹었다.

“이곳이 사탕당근 밭이고 바로 저쪽 나무집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시럽을 만드는 공동 작업장입니다.”

마을 대표가 답사단에게 소개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주민들과 아이들까지 온통 몰려나와 한바탕 인사를 치른 후였다.

“토끼들 좀 보세요. 귀여워라. 눈이 호박색이에요.”

마사가 알레스에게 속삭였다.

“그러게, 꿀 떨어지는 눈이네.”

하지만 지금 알레스에겐 토끼 눈이 문제가 아니었다.

인사를 나눈 후에도 여전히 답사단을 따라오며 알레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영지민들의 눈총에 한겨울인데도 땀이 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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