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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03화 (101/120)

103화

메르세데스를 향해

“나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거?”

오하라의 갑작스런 고백에 알레스는 어리둥절해졌다.

남중혁 배우가 나에게 솔직하고 말고 할 일이 있나?

“그때 무도회에서 만났을 때 나한테 물었잖아. 조건이 맞는 사람끼리 어울리고 좋아하고 연애하는 게 당연한 거냐고. 난 그렇다고 말했고.”

“그런데? 뭐 흔한 얘기 아니야?”

“아니야, 난 안 그랬어.”

“응?”

“그녀를 좋아할 때 조건 같은 건 생각해 본 적 없어.”

헉, 국민 배우의 파격 러브스토리?

하필 왜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털어놓는 건지, 알레스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세간의 기준에서 보면 우리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었지. 비난의 화살은 그녀에게만 쏟아졌고, 난 결국 그녀를 놓치고 말았어. 아니, 놓아 버린 건지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알아, 세상 사람들 운운하는 건 다 핑계야. 나는 우리의 사랑을 지켜내야 했고, 얼마든지 지켜낼 수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쉽지 않은 일이잖아….”

“그래서 벌 받은 거 같아. 이 모양 이 꼴로 여기 떨어진 게 다 진심을 배반한 벌인 거 같아.”

“에이, 그건 아니다. 갑자기 닥친 현실이 믿기지 않고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비하하지는 마. 내 신조가 뭔지 알아? ‘못된 년은 될지언정 못난 년은 되지 말자’야.”

“하하, 그게 뭐야. 여하튼 그때 당신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어. 그리고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그걸 물었을지도 생각해 봤지.”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는데. 너 꽤 섬세한 면이 있구나.”

“알레스, 당신은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마. 후회는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러워.”

“마음 써 줘서 고마워. 대신 너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마. 끝없는 후회로 삶을 좀먹는 것 말이야.”

“노력해 볼게. 이제 보니 당신은 현명하게 헤쳐 나갈 것 같네. 못됐지만 못나진 않았으니까.”

* * *

메르세데스령은 멀었다.

공작이 아무렇지 않게 제도와 영지를 오가기에 얼마나 먼 곳인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은 제국 최북단에 있는 국경 지역이었지. 그런 델 밤새 산책 다니듯 오가다니….’

알레스는 새삼 가슴이 무거워졌다.

안락한 고급 마차를 타고 여행하는 일은 처음엔 새롭고 즐거웠다.

낯선 풍경에 설렜고, 일상에서 벗어난 하루에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자유와 평화를 느꼈다.

헤라클레스가 틈나는 대로 만들어 올리는 식사와 간식은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그의 요리 솜씨야 원래도 수준급이었지만, 여행길에 먹는 맛은 또 다른 별미였다.

“아가씨, 저기 산이랑 강 좀 보세요. 너무 아름답지요? 지역이 바뀔 때마다 산세도 바뀌는 것이 참 신기하지요?”

“브레이브 경의 요리가 기가 막힙니다. 그렇지요, 아가씨?”

“너무 앉아만 계셔도 좋지 않아요. 마차가 쉬는 동안 공작 전하와 산책이라도 하고 오세요.”

특급 유모 마사의 텐션은 제도를 출발한 직후부터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 조금도 꺾일 줄 몰랐다.

하지만 알레스는 벌써부터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체력이 약해서일까? 아무리 고급 마차를 타고 주변 사람들에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도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하긴 저쪽 세상에서도 여행은 거의 가 본 적이 없으니까.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갈 기회도 거의 없었다.

여행 갈 여유나 체력이 있다면 일을 더 하는 쪽을 택했고.

한편으론 정식으로 여행 상품을 오픈하기 전에 선발대로 답사를 온 것이 무척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애가 패키지여행을 신청한 대부분이 귀부인이나 귀족 영애들이니,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든가 인내심 등은 알레스와 가장 비슷할 터였다.

그 까탈스러운 손님들에게 몇 날 며칠 마차를 타게 한다고?

아무리 최고급 편의 시설을 갖춘 마차라도, 아무리 대단한 눈요깃거리와 화끈한 유흥을 제공한다 해도 안 될 일이었다.

불편도 불편이지만 안전 문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호위에 드는 비용도 상당할 것 같고.

상품 가격을 훨씬 높게 책정하더라도 메르세데스령을 왕복하는 이동수단은 무조건 시간을 단축하는 쪽으로 바꿔야 했다.

텔레포트 방식이든 마차에 초고속 장치를 다는 것이든.

가격이 높아지는 건 귀족들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터.

아니, 초고가의 여행 상품은 그들에게 더 큰 만족을 주리라.

혹시 오랜 시간 자연을 감상하며 여행하는 걸 좋아하는 흔치 않은 취향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지금처럼 마차를 타고 따박따박 가는 어드벤처 코스를 따로 개발하면 되고.

역시 경험은 중요했다.

딴에는 돈 냄새를 쫓아 나름 바쁘게 돌아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어디까지나 제도 안 개구리 같은 식견이었다.

이렇게 제국을 가로지르다 보니 넓어진 행동반경만큼이나 생각도 웅장해지고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도 샘솟았다.

이미 진척 중이던 사업의 오류도 더 잘 보이고 말이다.

‘마법식이라는 건 유흥이나 사교를 위해 제도 내를 오가는 공유 마차가 아니라 대중교통이나 지역과 지역을 잇는 장거리 이동수단에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알레스는 이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마어마한 마정석을 보유한 메르세데스의 잠재력, 공작과 브린 황자가 연구 중인 마법식이라면 제국 곳곳을 잇는 초고속 열차 같은 것도 실현 가능하지 않을까?

황제와 잘 얘기해서 철도 사업권을 따내고 말이지.

어차피 황실은 마정석 보유량이 미미하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쌍수 들고 환영할 가능성이 컸다.

여기에 헤르메스의 기동력과 탄탄한 연락망을 끌어들인다면 꽤 거대한 판이 벌어질 것 같았다.

어머, 나 이번에야말로 작위 같은 걸 받는 거 아냐? 아예 국토개발부 장관 자리 같은 걸 달라고 해 봐? 이번 생엔 나라의 녹을 먹는 건가.

사업 스케일과 김칫국 사발 크기가 점점 커지는 알레스였다.

* * *

“레이디, 오늘 밤은 야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은 메르세데스령에 도착할 테니 한뎃잠을 자는 건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오후쯤 되자 밤비가 남은 일정을 일러 주었다.

말이 한뎃잠이지, 야영을 하는 천막은 마력이 주입된 특별한 시설이었다.

지난 축제 강연회 때 강연장으로 사용한 ‘큐브’가 행사용 마력 천막이었다면, 이번 것은 여행용이랄까.

그때와 마찬가지로 외형은 각설탕 모양으로 밋밋했지만, 그 안은 편리하고 안락하게 꾸며져 있어 지내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일행은 어두워지기 전에 마차를 세우고 천막을 친 뒤,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물론 어두워져도 위대한 불 계열 마법사인 공작이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가 있는 곳은 늘 따뜻하고 밝았다.

정작 공작 자신은 얼음성에서 얼음왕자처럼 살아왔으면서.

‘불을 쓰는 눈사람이라니, 참 특이해.’

야영장 주변에 하나둘 타오르는 등불과 모닥불을 보며 알레스는 공작에 대해 생각했다.

공작의 초대를 받아들여 공작과 함께 메르세데스 영지로 가고 있지만, 알레스는 최대한 그와 거리를 두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불과 얼마 전에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았는가.

그것도 지독한 음치에게 노래를 시킨 것도 모자라 파렴치하게 입술까지 훔쳐 놓고.

공작은 계속 청혼할 뜻을 밝혔고, 이제 점점 그의 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영지민 시월드의 반대를 이용해 그의 청혼을 물리겠다는 계획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음이 가벼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별 볼 일 없는 페레티가의 쭉정이가 오만방자하게도 자신들의 빛이요 희망인 공작 전하의 청혼을 이미 한 차례 딱지 놨다는 걸 영지민들이 알기라도 한다면?

열렬한 팬심과 단호하고 투박한 북부의 기질이 만나면 과연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알레스는 섬뜩한 느낌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가씨, 혹시 몸이 으슬으슬하십니까?”

마사가 그런 알레스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방금 밤비 경한테 들었는데, 이 주변이 온천 지대라고 합니다. 따뜻한 물이 솟는 샘이 여기저기 있답니다. 온천욕을 하고 싶으시면 제가 채비해 드릴게요.”

“난 괜찮아. 이 손난로만으로도 따끈한걸. 마사야말로 피곤할 텐데 뜨거운 물에 몸 좀 담그다 와.”

알레스가 겨울애가 패키지여행의 고객 선물로 제작한 핫팩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가씨가 안 가시는데 저 혼자 어떻게요. 목욕이 싫으시면 온천 주변을 산책하고 손발이라도 담가 보시는 건 어떠세요? 몸에 좋은 성분이 많은 온천수래요.”

“아, 다 귀찮아. 마사나 얼른 가 봐.”

“에휴 참, 아가씨두. 나중에라도 맘 바뀌시면 살살 산책이라도 나오세요. 참고로 깃발을 중심으로 오른쪽 구역은 남자들이, 왼쪽 구역은 여자들이 사용하기로 했어요. 오른쪽 구역이 남자요, 남자!”

오른쪽은 왜 강조하는 거야?

갈 일 없다니까 그러네.

온천 얘길 들으니 카르티에 공작저에 갔을 때가 생각나잖아.

알레스는 본의 아니게 카르티에의 뒤태를 보았던 일과 물이 닿으면 나타나는 신비한 용 문신을 떠올렸다.

참, 장관이었는데. 물론 문신 얘기다.

그러고 보니 카르티에 공작은 새삼 희한한 인물이었다.

인기의 정점에 있으면서도 사교계의 규율에서 자유로웠다.

황제의 연회에 이런저런 핑계로 참석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랬다.

권력에 관심이 없는 듯하고 매사 나른한 듯하면서도 중요한 건 다 가진 알짜배기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렇게 괴상한 저택에 살고 있지 않나.

정말이지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세상엔 인간이 아닌 것들이 알게 모르게 섞여서 살고 있지 않은가.

눈사람 종족이라든가 사람의 탈을 쓴 악마라든가, 고결한 조각상인 줄 알았는데 뜨거운 입술을 가진 요망한….

흠흠, 공작도 온천욕을 즐기고 있으려나? 오른쪽 구역에서 말이지.

카르티에보다 훨씬 더 장관일 텐데… 어휴, 음흉하게 뭘 상상하는 거야?

알레스가 흘리지도 않은 침을 괜히 닦고 싶은 심정이 됐을 때였다.

“으어어어!”

굵직한 비명 소리가 어두운 숲을 뒤흔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맹수라도 나타났나? 설마 자객이라도 숨어들었나?

밤비가 얼른 검을 빼들고 알레스를 호위했다.

공작도 온천욕은 하지 않았는지, 셔츠 단추를 목까지 채운 멀쩡한 차림으로 알레스에게 다가왔다.

함께 온 기사와 고용인들이 소리가 난 쪽으로 무리를 지어 달려갔다.

그들이 숲속의 온천에서 목격한 것은 흐느끼는 거구의 남자와 역정을 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 * *

“마사, 오른쪽이 남자라며. 왜 오른쪽으로 간 거야?”

“그게… 그만 헷갈렸어요.”

“나한테 그렇게 강조하더니 어떻게 그새 헷갈려?”

“아가씨도 나이 들어 보세요. 돌아서면 헷갈리고 깜빡깜빡하고 그런단 말이지요.”

그래 봐야 마사는 서른다섯이잖아.

“아, 어두워서 아무것도 못 봤다니까요. 그리고 설령 좀 봤다 해도 그렇지. 저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일입니까?”

마사가 적반하장으로 얼굴을 붉히며 성질을 냈다.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지, 마사. 당한 사람이 수치스럽고 기분 나쁘다면 나쁜 거야. 얼른 사과해. 브레이브 경도 이제 그만 진정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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