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모두를 위한 계약 결혼
“공녀님이 식재료도 아닌데 구워삶다니요. 서로의 이익이 맞아떨어졌을 뿐입니다.”
“서로의 이익이라.”
“알고 보니 외모만 아름다우신 게 아니라 굉장히 화통하고 생각이 열린 분이더라고요.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진정한 귀족이십니다.”
알레스가 황제에게 오하라를 칭찬하는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두 사람 짧은 시간에 매우 친해진 것 같군.”
“예, 말이 무척 잘 통하는 분이었습니다. 폐하와도 좋은… 파트너가 되실 것 같아요.”
“파트너라. 철저한 정략결혼이라는 말이군. 미리 받아 본 계약 내용도 아주 깜찍한 면이 있더군.”
깜찍? 마음에 든다는 뜻인가?
알레스는 제시한 계약 내용을 다시금 떠올리며 조금 긴장했다.
“오하라 가넷 네슬라 공녀님 드십니다.”
마침 시종이 오하라의 도착을 알렸다.
한 마리 늘씬한 인어 같은 오하라가 정원에 들어섰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역시 남중혁 배우, 인사도 제대로고. 우리 잘해 봅시다!
알레스는 오하라에게 결의에 찬 눈빛을 보냈다.
오늘 이 협상이 잘 마무리돼야 당신도 살고 나도 살고, 무사히 메르세데스로 출발할 수 있을 테니까.
북부 여행이 무산될까 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특급 유모를 떠올리며 알레스는 두 사람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네슬라 공녀님께서 본인의 안위나 가문의 이익보다 제국의 앞날을 더 우선하시니 말입니다.”
알레스가 협상을 위한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공녀님은 온전히 폐하의 편에 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오하라도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안에 저쪽 세상 남자가 들어있는 것치고는 몸짓이나 표정이 매우 우아했다.
역시 명배우 남중혁답다.
“대신 아주 사소한 조건 두 가지를 폐하께 제시하였지요. 미리 검토해 보셨겠지만, 폐하께 전혀 해가 되지 않는 요청입니다.”
알레스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해가 되진 않을지 몰라도, 의문 가득한 요청이더군.”
황제는 계약서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 결혼은 계약으로 성립된 정략결혼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부부의 의무를 다하되, 나머지 생활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특히 사적인 접촉은 철저히 피한다?”
그렇죠. 업무 시간 준수, 공사 구분 철저히.
“사적인 접촉을 피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지?”
“그것은….”
그것은 오하라가 가장 강조한 부분으로, 이 조건이 빈틈없이 충족되어야 다른 것들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알레스가 말을 고르는데, 오하라가 직접 나섰다.
“남녀 간의 신체 접촉을 말합니다, 폐하. 어차피 서로의 계획을 위한 한시적인 결속인데, 골칫거리는 싹부터 만들지 않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황제는 심중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오하라의 말을 곱씹어 보는 듯했다.
‘혹시 기분 나빠 하는 건 아니겠지?’
알레스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황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 의무를 면제해 준다니 짐이야말로 귀찮은 일을 덜었군. 네슬라 공녀 그대야말로 정말 괜찮겠는가?”
“괜찮다마다요. 그런 걱정은 접어 두셔도 좋습니다.”
“명문가의 레이디치고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군. 나중에 딴소리하지는 않겠군?”
“한 입으로 두말하는 인간은 상종을 말아야지요.”
“그럼 서로의 정부도 용인해야 하는 건가? 짐이야 그대 아닌 다른 여인을 후궁으로 맞이한대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지만, 그대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기는 곤란한데. 짐의 체면도 있고 말이야.”
“그 점은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른 남자와 엮일 가능성은 티끌만큼도 없으니까요.”
“자신만만하군.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건데 말이지.”
“예, 저는 약속을 지킬 자신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만 결정을 내려 주신다면. 제국을 다스리는 분이시니 일시적인 충동에 휘둘리진 않으시겠지요?”
“일시적 충동?”
“뭐, 자제력을 잃으신다거나…. 술에 취해 방을 잘못 찾았다는 식의 변명은 하지 않으시겠지요?”
“허, 그대는 스스로를 매우 높게 평가하는군. 그대야말로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 두지.”
“예,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폐하께선 결코 그런 구차한 행각을 벌이실 분이 아니지요.”
“그대 역시 태도가 분명해서 좋군. 뒤통수 칠 유형은 아닌 듯하군.”
“그럼요. 저는 뒤통수를 치는 것보다는 명치를 가격하는 실력이 쓸 만합니다. 호신술을 좀 익혔거든요. 손이 맵다는 소리도 자주 들었지요.”
“호신술을 쓸 일이 많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많지 않기는요. 집적거리는 치들에게 자주 본때를 보여 주었습니다. 은근슬쩍 신체 접촉을 시도하려던 이들이지요. 참고로 제가 생긴 건 우아해 보여도 행동은 전혀 그렇지가 못하답니다.”
“감히 짐의 황비에게 집적거리는 간 큰 인간은 앞으로 없을 테지.”
“마땅히 그래야지요. 폐하께서도 절대 아니 하실 일을 감히 태양 아래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참, 후궁을 들이시는 일은 맘껏 하셔도 좋습니다.”
“공녀가 매우 통이 크군.”
“제가 이래 봬도 어려서부터 장군감이란 말을 많이 들어서 그런지 남자들 사정을 꽤 이해한답니다.”
보이지 않는 총알이 빗발치는 것 같은 착시현상이….
알레스는 두 사람의 공방전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급한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두 사람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불꽃을 튀기는 바람에 알레스는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하고 구경만 해야 했다.
“아하하, 두 분 합이 참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물론 사업 파트너로서 말이지요.”
냉랭하면서도 요상하게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겨우 이런 어설픈 추임새나 넣어 볼 뿐.
황제와 오하라가 동시에 알레스를 째려보았다.
“이번 혼인은 철저한 계약 결혼으로, 사적인 접촉이나 감정 교류는 불필요하다는 조항에 두 분 다 격하게 동의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계약 결혼의 기간을 거사를 일으키기 전까지로 한다는 조항 역시 모두 동의하시는 겁니까?”
알레스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거사라는 말도 거창하군. 독버섯 하나 도려내는 일인데. 그나저나 공녀는 그렇게 해도 정말 괜찮은 건가? 솔직히 이 부분도 좀 파격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황제가 미간을 좁히며 묻자 오하라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게 의미 있는 것은 오직 자유입니다. 폐하께서 제게 자유를 주신다면 가문을 비롯해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을 폐하께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어지간히도 떠나고 싶어 하는군.”
“이 귀족 사회의 모든 것이 저와는 맞지 않습니다. 진정한 제 길을 찾아 떠날 것입니다. 그 전에 폐하께 큰 선물 하나 드리고요.”
“스노브가 제 발등을 참으로 절묘하게 찍는군.”
황제가 손짓하자 시종이 직접 차를 따랐다.
세 사람이 함께 찻잔을 기울였다. 의외로 레몬그라스와 만다린을 섞은 듯 상큼한 맛이었다.
얼마간 긴장감이 감돌던 독초 화원에 조용한 평화가 깃들었다.
이로써 계약은 성사되었다.
혹시 모를 염탐을 고려해 오하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원에 두 사람만 남자 황제가 알레스에게 물었다.
“네슬라 공녀는 모든 남자를 싫어하는 것 같지?”
“남자를 싫어한다기보다 남자와의 친밀한 접촉을 꺼리는 것 같습니다. 계약 사항만 잘 지켜 주신다면 폐하께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안심하라는 건가. 황제가 황당한 얼굴로 알레스를 쳐다보았다.
* * *
정원에 온 김에 독초를 조금 복용해야겠다는 황제를 두고 알레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레이디 모두 떠나자 황제가 보좌관인 부르댕 백작에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 보게. 짐이 남자로서의 매력은 부족한가?”
부르댕 백작이 바짝 긴장했다. 지난번과 똑같은 질문….
이미 겪은 적 있는 위기에 대비하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 자신이 한심했다.
식은땀을 흘리는 백작을 보고 황제는 질문을 바꾸었다.
“아니면 저 레이디들이 유별난 것이냐?”
“당연히 네슬라 공녀와 레이디 페레티가 유별나도 한참 유별난 것이지요!”
“그래?”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방금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네슬라 공녀는 세상 모든 남자를 싫어하는 병증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레이디 페레티는 심신이 미약한 것으로 워낙 유명하지 않습니까.”
부르댕 백작은 지난번 미진했던 것까지 만회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두 레이디를 헐뜯었다.
그 몸부림을 무표정하게 지켜보던 황제가 말했다.
“네슬라 공녀는 백작의 말대로 병증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페레티가 심신 미약이라는 건 잘못된 소문이지.”
“예에?”
“얕보지 말고 늘 주시하라는 뜻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이번에도 비위를 맞추는 데 실패한 건가.
찜찜한 기분으로 물러나는 황제의 보좌관이었다.
* * *
황궁에서 벗어난 알레스는 대기시켜 둔 마차에 냉큼 올랐다.
마차 안에서 오하라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오늘 고생했어. 어때? 협상 결과는 만족스러워?”
알레스가 마차에 오르자마자 오하라에게 물었다.
“응, 덕분에. 고마워.”
“황궁에서 나온 후의 일도 미리 준비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그때까진 고되더라도 공녀 역할 잘 부탁할게.”
“고되긴. 어차피 연기가 내 일이었는걸. 돌이켜보니 원래 세상에서의 내 삶도 여기 못지않게 답답했네.”
“하긴, 톱스타의 삶도 쉽지는 않았을 테지?”
“가식적인 건 거기나 여기나 비슷한 듯.”
“아, 내가 여기서 연예인 매니지먼트사 비슷한 걸 운영하고 있거든. 귀족들 이미지 관리도 해 주고, 배우도 양성하고. 나중에 황궁에서 나오면 경력 살려서 이 일을 해 보는 건 어때?”
“그것도 괜찮겠네.”
오하라는 긍정적으로 답하면서도 어딘지 신경이 다른 데 가 있는 듯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걸까.
알레스가 오하라의 안색을 살피고 있을 때,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알레스.”
“응?”
“아무래도 황제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
“뭐어? 웬 헛다리야? 그간 나와 황제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없을 텐데.”
“아니야, 같은 남자의 촉이라는 게 있다고. 황비 후보자인 나와 관련된 일을 굳이 전 부인인 당신에게 맡겼을 때부터 수상했거든.”
“그거야 황제가 워낙 변태 같은 인간이라 그런 거고. 실은 이 의뢰 자체가 나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을지 모르지. 황제의 의도와는 달리 내가 잘 이용해 먹었지만.”
“그럴 수도 있지만, 아까 정원에서 어렸을 적 이야기를 털어놓는 걸 듣고 촉이 찌리리 오더라고.”
“아, 그 독초 이야기를 들었어?”
“우연히 엿듣고 말았어. 내가 파악한 황제는 그런 이야기를 아무에게나 함부로 할 사람이 아니야.”
“그거야…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내 일이거든. 그와 계약한.”
알레스의 말에 오하라가 빙긋이 웃었다.
“황제가 조금 불쌍해지려고 하는데? 어쨌든 당신이 황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히 알겠어.”
“그거 다행이네.”
“당신 마음속엔 다른 남자가 있지.”
“…….”
오하라가 잠깐 주저하다 털어놓았다.
“알레스, 사실 당신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