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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01화 (99/120)

101화

독초 먹는 아이

결혼, 결혼.

알레스는 결혼이라는 천년 묵은 문제와 새삼 마주서 보았다.

저쪽 세상에서는 서른이 되도록 한 번도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도 없었고.

결혼에 대한 유일한 기억은 아마도 사내 킹카의 갑작스런 결혼 소식 정도였을까.

막무가내 직진해 오던 그가 어떤 여자와 다음 달에 결혼을 한다고 했다.

직접 들은 것도 아니고 사내 빅뉴스로 접했다.

도깨비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동안 자신과 사내 킹카 사이에 있었던 일은 혹시 스스로가 만들어 낸 망상이었나?

심각하게 고민해 볼 정도였다.

당시 사내 킹카의 나이가 이십 대 후반쯤이었을 테니 꽤 이른 결혼이었다.

그는 왠지 신나게 염문을 뿌리다 느지막하게 결혼할 것 같은 인상이었는데.

여러모로 의외의 결혼 소식이었다.

저쪽 세상에서 가지고 온 결혼에 대한 기억은 겨우 그런 것뿐인데.

이쪽 세상으로 건너오자마자 기승전 문제는 결혼.

심지어 남의 결혼에까지 말려들어 신나게 등 터지는 꼴이라니.

그것도 남 중의 남, 무려 전남편의 결혼이라고!

황제와 네슬라 공녀의 결혼 문제를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풀지, 알레스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황제가 바라는 건?

귀족들의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는 척하면서 세력을 공고히 한 후 스노브처럼 비대해진 귀족 세력을 친다.

네슬라 공녀의 탈을 쓴 남중혁이 바라는 건?

이 모든 상황에서 탈출해 자신과 어울리는 삶을 산다.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면 더 좋고.

나, 알레스가 바라는 건?

계약을 무사히 이행해 계약금을 지켜내는 건 물론, 높은 사례비를 받아 챙기고 경력도 쌓는다. 그 와중에 스노브를 물 먹이면 금상첨화고.

알레스는 미간을 좁힌 채 머랭쿠키를 잇달아 입속에 던져 넣었다.

‘얼음왕자의 미소’라 이름 붙인 이 과자는 공유 마차와 겨울애가 패키지여행에서 선보일 메르세데스의 특산품이었다.

황비 간택 문제가 하루빨리 해결돼야 메르세데스 여행 사업에 집중할 텐데.

‘모두가 만족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지 않을까?’

알레스는 우선 오하라를 만나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제시하고 설득한 뒤, 황제와의 자리를 만들어 딜을 하는 것으로 순서를 정했다.

* * *

세 사람이 함께 만나기로 한 곳은 황궁의 후원에 있는 한 담장 정원이었다.

황궁의 정원은 꽤 후하게 개방돼 있는 편이었다.

아카데미 학생들도 이용할 수 있었고, 여하튼 황궁에 출입이 허락된 이라면 자유로이 정원 곳곳을 거닐 수 있었다.

하지만 후원은 황족만의 비밀스런 공간이었다.

사방을 높은 담으로 둘러싸 마치 정원 속의 방처럼 만든 담장 정원이나 몇몇 온실은 황족 중에서도 황제나 황후, 황비, 황태후 등 주인이 따로 있어서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

한동안 황궁에서 지냈던 알레스도 후원에 온 건 처음이었다.

고용인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높고 견고한 회색 돌담으로 둘러싸인 담장 정원이었다.

담장에 난 아치형 문을 지나 알레스는 약속 장소로 들어갔다.

꽤 다양한 종의 식물들을 구획을 나누어 아기자기하게 심어 놓았는데, 주로 키 작은 화초들이었다.

겨울인데도 지열을 이용한 시설 덕분에 정원은 마치 난방 장치를 한 온실처럼 훈훈했다.

거기에 통풍까지 잘 되니 더욱 쾌적한 느낌이었다.

정원 한쪽에는 티 테이블이 마련돼 있었다.

사방으로 담장만 둘렀을 뿐 지붕은 없는 곳이므로 햇볕을 가리기 위한 그늘막 같은 것도 설치해 놓았다.

‘황제와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곳이군.’

알레스는 정원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지위가 낮은 순서대로 약속 장소에 도착하는 것이 일반적인지라, 이곳엔 아직 알레스밖에 없었다.

기다리는 동안 정원이나 구경하자.

알레스는 화단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식물들에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생김새가 낯선 것이, 평소 자주 보던 식물이 아니었다.

겨울에도 잎이나 꽃의 빛깔이 여전히 선명하고 무늬가 화려했다. 묘하게 유혹적인 자태였다.

아무래도 황제의 정원이니 진귀하고 값비싼 화초들을 구해다 심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알레스가 화초들을 향해 손을 뻗을 때였다.

“짐이라면 함부로 만지지 않겠다.”

등 뒤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움찔한 알레스가 슬그머니 손을 거두고 허리를 폈다.

치사해…. 화초 좀 만진다고 큰일 나나.

돌아보니 아가판투스 황제가 거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폐하께서 가드닝에 조예가 깊으신지 몰랐습니다. 화초들이 참 예쁘네요.”

아니꼽지만 원활한 딜을 위해 알레스는 황제의 비위를 맞춰 보았다.

“저 화초들이 왜 아름다운지 아느냐?”

황제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글쎄다. 비싼 거니? 해외에서 온 거야? 멸종 직전의 희귀종이니?

“흔한 화초들은 아닌 듯한데, 저는 화초는 잘 모릅니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함부로 만지려 했겠지.”

“죄송합니다.”

“죄송이 아니라 감사하다고 말해야겠지.”

“……?”

“짐이 방금 그대의 목숨을 구했다.”

“예?”

“저 화초들이 유난히 아름다운 건 독을 품고 있기 때문이지. 이 정원에 있는 식물들은 전부 독초다.”

뭐라고요? 알레스는 눈을 부릅떴다.

목숨을 구한 게 아니라 사람을 골로 보낼 뻔했잖아!

독초에 손대기 직전에 황제가 도착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원에 쓰러진 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을지도.

왜 아무 설명도 없이 사람을 독초 정원으로 부르냐고!

알레스는 그래도 성공적인 딜을 위해 욕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았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는 계속 알레스의 심기를 긁었다.

“그대는 조심성이 없군. 호기심이 독초보다 더 위험한 것을.”

내 인생의 가장 유해한 독초는 바로 당신이오!

알레스가 이를 악물고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폐하도 참, 취미가 남다르십니다. 하필 독초입니까.”

“황궁에서 살아남으려면 독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지. 어쩌면 그댄 황궁에서 나가길 잘했군. 식탐이 많은 데다 조심성이 없으니 딱 좋은 표적이 됐겠어.”

덕담 고오맙습니다.

나도 먹는 걸로 장난치는 여기가 마음에 안 들었어!

협상 장소를 하필 독초 정원으로 한 황제의 심보가 고약해 알레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협상 내용이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독초 우린 차라도 먹이겠다는 협박이야 뭐야.

“하지만 이 정원은 짐이 만든 것은 아니다. 독에 관해 매우 해박한 지식이 있던 분이 만든 거지. 황태후 자리에서 미끄러진 바람에 지금은 황궁을 나가셨지만.”

그렇다면 이 독초 정원을 가꾼 건 모넬라 대부인?

선황비이며 독살된 황태자의 모후, 알레스를 손봐준다며 벼르고 있는 너구리 3인방 중 대장격인 분 되시겠다.

역시나 무서운 분이셨어.

“황궁 안에서 독초를 길러도 괜찮습니까?”

알레스가 의아한 얼굴로 황제에게 물었다.

가뜩이나 독살되는 사람이 많은 황궁에서 대놓고 독초를 기르면 의심받지 않나?

알레스는 전에 천타빵을 빼돌리려다 붙잡혀 목이 달아나게 생긴 헤라클레스를 구하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다 황궁에 흔한 독살 시도에 대해 알게 되었다.

황궁 음식 반출입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도, 황제가 독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구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가깝게는 당장 선대 황후와 2, 4황자의 사인이 독살로 알려져 있고, 황태자도 3황자이며 당시 대공이던 현 황제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

물론 모두가 공인된 사실은 아니었다.

정말로 독살이었는지 아닌지, 범인이 누구인지 황실에서 정확히 밝힌 적은 없지만 소문은 어디선가 생겨나 거리로 퍼져나갔다.

분명한 것은 황실 내에서 독살이 드물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특히 2, 4황자가 모두 황후의 소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황위 계승 다툼에 희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쪽으로 생각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알레스는 황궁 음식 나눔장을 제안할 때 독에 대한 황제의 경계심을 이용한 것이다.

이런 판국에 황궁 내에서 버젓이 독초를 기르는 건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하는 꼴이 아닌가?

“약초와 독초는 한 끗 차이지.”

황제가 알레스의 의문에 답하듯 말했다.

“황후나 황비가 약용 식물을 가꾸는 건 흔한 일이니까. 아직도 이곳에 핀 것이 독초인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지. 조심성 없는 그대처럼.”

마지막에 꼭 한마디 씹어야 직정이 풀리시지?

으, 계약만 아니었어도.

“그럼 폐하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분이 독초를 기른다는 걸.”

“아무리 어린 나이라도 살아남고자 하는 동물적 본능이 있는 법. 2황자와 4황자 다음은 내 차례일 거라 생각했지. 친모가 안 계시니 스스로 살길을 찾을 수밖에.”

어… 어째 좀 짠한데?

아무리 재수 없는 황제라 해도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꼬마 3황자의 모습은 안쓰럽지 않을 수 없었다.

“모넬라 황비가 독초를 기른다는 걸 알고서 몰래 이 정원에 숨어들었지. 매일 독초를 조금씩 먹으며 독에 대한 내성을 길렀다.”

어휴, 어린 것이 독하기도 하지. 그러다 잘못되면 어쩌려고.

어렸을 때 사랑이 아닌 독을 먹고 자라서 황제가 저 모양이구나.

황족의 삶은 참 고달픈 것이라고 알레스는 생각했다.

이른 나이에 죽은 황태자, 어린 나이에 독살당한 2, 4황자.

살아남아서 황제가 되긴 했지만 인간성이 반푼이인 3황자.

그러고 보면 5황자 브린과 황녀 로잘린은 그 와중에 참 해맑은 편이야.

“그대들을 이곳으로 부른 건 황궁에서 가장 은밀한 장소 중 하나이니까. 또 독초는 건드리지만 않으면 보기에 꽤 아름다우니까.”

그렇긴 했다. 이 식물들이 독초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곳은 그저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아름답고 은밀한 정원일 뿐.

하긴 독초니 약초니 하는 건 인간들의 잣대일 뿐이겠다고 알레스는 새삼 생각했다.

식물들 입장에서야 누굴 해롭게 하거나 이롭게 할 의도가 있겠는가.

심지어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을 테지.

상념에 빠진 알레스에게 황제가 오늘의 용건을 상기시켰다.

“솔직히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세 사람이 함께 만나는 자리라니. 황비 후보자에 대해 조사해 달라 부탁했더니 또 다른 거래를 주선해? 역시 그대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제 솜씨가 이 정도입니다. 고객이 바라는 핵심을 파악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진심 어린 매니지먼트, 어떻습니까.”

“그래, 계약을 연장하고 싶을 만큼 솜씨가 훌륭하군. 대체 네슬라 공녀는 어떻게 구워삶은 건가?”

게다가 지독할 정도로 공사 구분이 확실하고.

셋이 함께 보기엔 껄끄러운 관계라는 자각이 전혀 없는 건가?

황제는 최선을 다해 자신과 네슬라 공녀의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알레스의 태도에 왠지 약이 올랐다.

자신이 어떤 사심을 품고 이 일을 의뢰했는지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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