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00화 (98/120)

100화

사기꾼의 남편이 되겠습니다

사기꾼이 되어도 상관없나요?

도덕책 공작님 어디 말씀 한번 해 보시죠.

알레스가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공작은 알레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설마 방금 웃음 참은 건 아니겠지?

알레스가 불길한 예감을 누르며 공작의 도톰한 입술을 노려보자, 공작이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레스처럼 자신이 사기꾼이라고 밝히는 사기꾼이 있던가요? 이건 매우 드문 경우군요.”

“이런 걸 이중 사기라고 하죠. 고도의 심리전이에요.”

알레스가 급한 마음에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좋습니다. 알레스가 사기꾼이라면 당연히 나도 사기꾼의 남편이 되어야겠지요.”

그렇게 쉽게 대답한다고?

“도덕책 공작님이 사기가 뭔지는 아세요? 그렇게 쉽게 답하실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사기를 얕보시는 건가요?”

스스로 생각해도 억지스러운 생떼였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한 알레스는 부득부득 우겨댔다.

난 사기꾼이고, 넌 도덕책이야!

얄밉게도 공작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사기꾼이 되면 안 됩니까? 알레스가 가는 길이라면 어디든 가겠습니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카이트같이 그렇게 고결한 정신 상태로는 죽었다 깨도 흉내조차 내지 못할 일이에요.”

“참 이상합니다. 왜 나더러 도덕책이라고 하는지. 그렇게 부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지금껏 잠자코 있었지만, 나는 도덕책이 아닙니다.”

“그거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군요.”

“고결하지도 않을뿐더러 사기라면 이미 칠 만큼 쳐 봤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적어도 알레스보다는 내가 훨씬 더 사기꾼일 겁니다.”

엉뚱한 데서 승부욕을 불태우지 마시라고요.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도덕책은 아닐지라도 난 고집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내 세계와 원칙이 확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든 당신이 원한다면 모두 기꺼이 바꿀 겁니다. 당신만은 예외로 하겠습니다.”

예외라는 말이 이렇게 달콤한 말이었나?

알레스는 완전히 수세에 몰렸음을 깨달았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나요? 그리고 전 카이트가 바뀌기를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거기 그렇게 계세요. 넘어오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 세계에서, 나는 내 세계에서 그렇게 살아요.”

“내 세계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겼습니다. 난 그 균열이 기껍고 소중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완벽하게 맞춰 놓은 삶에 예외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레스, 당신이라는 유일한 예외여.

“모두가 절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완벽한 남자를 망쳐 놓고, 도덕책 공작을 사기꾼으로 만들었다고.”

대체 나한테 왜 이러세요? 알레스가 원망 어린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내 생각엔 뻣뻣하고 차갑던 공작이 재밌는 사람이 됐다고 할 것 같은데요?”

“지금도 절 싫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잘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모두가 좋아한다는 것이야말로 사기라고 생각합니다.”

“알고 보니 정말로 도덕적인 기준이 무척 후하시네요.”

“누구에게나 후한 건 아닙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내 유일한 예외라고.”

예외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간질거렸지만 알레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숨겼다.

“영광이네요. 전생에 제가 나라를 구했나 보아요.”

“나라가 아니라 나를 구했습니다.”

“…….”

완벽한 패배를 인정합니다.

내가 졌소.

“그리고 도덕책은 아니지만 한 말씀 드리자면, 알레스는 도덕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오해요?”

“도덕은 사람을 잘 사랑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러니 사랑이 먼저죠.”

내가 졌소, 졌소.

공작이 조용히 다가와 알레스의 뺨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감쌌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럽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다정해 알레스는 길든 강아지처럼 얌전하게 자신의 뺨을 내주고 말았다.

“조금만 더 믿어 주면 안 되겠습니까. 나를, 아니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을.”

알레스는 속으로 울상이 되어 저쪽 세상에서 어렸을 때 읽었던 혹부리 영감 이야기를 떠올렸다.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인 심정이야.

말로 설득하는 건 실패했고, 이제 어떻게 한다?

알레스는 열심히 다른 수를 떠올려 보았다.

확 도망가 버릴까? 외국으로 튀어? 아니면 공작이 한눈에 반할 만한 레이디를 물색해 봐?

공작은 알레스가 이런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나와 함께 메르세데스로 가요. 메르세데스에 대해 알리고 여행할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면서요? 알레스가 직접 와 보면 우리 영지와 영지민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잠깐, 메르세데스라면 영주와 영지민의 애착 관계가 유별난 곳. 영지민 시월드가 버티고 있는 곳이잖아!

그래, 두 사람만 좋다고 할 수 있는 게 결혼이 아니지.

영지민 전체가 들고 일어나 나와의 결혼을 반대한다면!

그들은 십중팔구 나를 못마땅해 할 것이다.

시월드라는 게 원래 아무리 잘난 누굴 갖다 놔도 무조건 눈에 차지 않는 법인데, 레이디 페레티라는 이 평판 나쁜 여자가 자신들이 애지중지하는 공작의 짝으로 가당키나 하겠는가.

영지민을 부모형제처럼 아끼는 공작은 괴로워하다 결국 결혼을 포기하겠지.

그럼 나는 다 이해한다는 듯 눈물을 삼키는 척하며 돌아서면 되는 것이다.

와, 이렇게 좋은 방법이!

“알레스, 당신에게 메르세데스의 참모습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당신도 분명 그곳을 좋아할 겁니다.”

네, 가요. 가슴이 조금 아프겠지만, 당신을 위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좀 이용할게요.

“좋아요. 그 초대에 응할게요.”

* * *

아키 낚시터 관리인이 호수를 한 바퀴 돌다 낚싯줄을 드리운 채 바르르 떨고 있는 낚싯대를 하나 발견했다.

“누가 두고 갔나 보구먼.”

낚싯바늘에 쪽지가 하나 걸려 있었다.

[자신이 고수하던 모든 원칙을 기꺼이 어기는 것.

세상에 완벽하고 완전한 것은 없음을 인정하는 것.

조금 덜 완벽하지만 조금 더 재밌는 사람이 되는 것.

이 모든 걸 네게 가르쳐 줄 사람을 보낸다.

그녀는 연약해 보이지만 단단하고 야무진 냉장고가 되어 줄 거란다.

그립고 그리운 내 아들 카이트.

행복하렴.

캄파넬라와 미카엘.]

쪽지를 이리저리 돌려 보던 관리인은 쪽지를 호수에 도로 던져 넣었다.

“못 읽는 기록이구먼.”

* * *

바깥에서 돌아온 마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겨울애가 테마 여행 신청자가 많은 건 좋은데요….”

“또 없어졌어?”

“예, 또 삼분의 이는 사라졌어요. 누가 자꾸 떼 가는 거야!”

“휴, 또 새로 만들어서 붙여야겠네.”

메르세데스 겨울 여행 오픈을 앞두고 페레티 상단에선 홍보 포스터를 만들어 공유 마차와 제도 번화가 곳곳에 붙였다.

테마 여행 일정표와 명소, 특산품, 특별 체험 등에 대한 정보가 실린 포스터였다.

홍보 효과를 높이기 위해 공작의 사진과 메르세데스의 마스코트인 눈사람 공작도 포스터에 넣는 등 밤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포스터가 마차든 번화가든 붙이는 족족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이다.

처음엔 축제 강연회 때의 낙서범처럼 동네 불량배나 페레티 상단을 고깝게 보는 이들의 소행인 줄 알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다 제도 영애들과 연모인 클럽 사이에서 소문이 들려왔고, 메르세데스 공작을 흠모하는 이들이 몰래 떼어 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겨울애가’라는 글자 아래 공작이 도도하면서도 매혹적인 눈빛을 하고 포즈를 취한 포스터를 침실에 붙여 놓는 것이 영애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다나.

특별판 굿즈처럼 업자가 불법 판매한 정황도 포착되었다.

여하튼 그러한 사정으로 걸핏하면 포스터가 사라졌고, 없어진 만큼 다시 만들어 붙여야 했다.

“그래도 인기의 증거라고 생각하고 기뻐해야 하는 건가요.”

마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그나마 마사는 최근 기분이 완전히 풀렸다.

새로 시작한 여행 사업 때문에 늘어난 업무 때문인지, 사라지는 포스터 때문인지 며칠간 저기압이었다.

신경질적이 되어 특히 헤라클레스가 눈에 띄기만 하면 쥐 잡듯이 잡았다.

그러다 알레스가 메르세데스에 초대 받은 걸 알게 된 후로 순식간에 기분이 풀렸다. 괜히 들떠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키스에 이어 영지에 초대까지!’

마사는 이번에 메르세데스에 가는 일을 거의 상견례쯤으로 받아들인 눈치였다.

‘그렇다면 아가씨도 부모나 친정 식구처럼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함께 가야 공작가에 기죽지 않고 든든하실 텐데. 유모인 나라도 따라가서 시중 들고 싶어도….’

공유 마차 일도 그렇고, 제도에 누군가는 남아 상단의 일을 처리해야 하니 아쉬워도 어쩔 수 없었다.

일손이라고 해 봐야 마밤헬 아니면 밤헬마 아니면 헬마밤으로 순서만 바꿔 돌려쓰는 형편이니.

「겨울 동안 접어!」

그러나 아가씨의 이 한마디는 마사의 불평불만 가득한 일상에 환상의 팡파르가 되어 울려 퍼졌다.

「외부에 휴가 공지하고 페레티 상단 전원이 메르세데스로 사업 구상 여행 겸 단합회를 갑니다.」

어차피 겨울이라 사람들의 외부 활동이 줄어들 터인 데다 꽃미남 마부들도 공연을 위해 메르세데스로 가야 했다.

결정적으로 겨울애가 여행 상품을 예약한 사람들이 어차피 공유 마차 고객과 거의 겹쳤다.

‘다 함께 메르세데스로 떠나요!’ 식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마사는 꿈에 부풀었다.

평민의 경우 돈벌이나 임무 때문이 아니면 타지로 나가는 일 자체가 드물었고,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이 보통의 삶이었다.

하물며 귀족이 아니고서야 여행이라는 건 평생 단 한 번 꿈꾸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다 함께 멀리 북부로 여행을 가다니.

게다가 주인 아가씨가 바람까지 잔뜩 넣지 않았겠는가.

하루 종일 하얀 눈밭을 여행하고 찜질방이라는 데 누우면 뼈와 살이 사르르 녹는 것이 천국이 따로 없을 거라고, 유모와 꼭 함께 가고 싶다고.

생에 처음 떠나는 여행을 생각하면 마사는 가끔 너무 행복한 나머지 졸도할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했다.

그랬는데, 그렇게 기뻤는데, 방금 막 책상에 놓아드린 전언 두 개를 들여다보며 아가씨가 하는 말을 듣고 마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을 맛보았다.

“이렇게 되면 메르세데스 여행을 갈 수 있으려나?”

알레스는 앞에 놓인 전언을 난처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마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이거야말로 졸도할 소리였다.

두 개의 전언은 모두 다급하게 알레스를 재촉하고 있었다. 꽥꽥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알레스는 그제야 떠올렸다.

자신의 결혼을 해결하는 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두 거물의 결혼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