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함께 수렁으로
알레스의 바람대로 두 사람은 호수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야외에서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는 재킷을 공작은 이번에도 알레스에게 내주었다.
추위에 대비해 알레스에게 자신의 마나를 조금 주입해 체온을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나가 몸에 스며들자 알레스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따뜻하고 바삭바삭하고 윤기가 도는 갓 구운 빵이 된 기분이었다.
위험해….
이제 곧 냉정하고 날카로운 논쟁을 벌여야 하는 사람의 기분으로는 매우 위험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 조황은 어땠어요? 쓸 만한 기록 좀 건지셨나요?”
알레스가 호수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아니요, 낚싯대는 위장입니다. 여기 누워 있으면 잠이 잘 올까 해서요.”
“잠을 못 주무세요?”
“좋아하는 레이디에게 청혼했다 거절당했으니 잠이 올 리가 없지요.”
“뭐예요. 걱정할 뻔했잖아요. 악몽에 시달리던 때가 있어서 카이트도 그런 줄 알고.”
“지금도 악몽을 꿉니까?”
공작이 고개를 돌려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생각해 보니 알레스가 악몽을 꾼 걸 본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전장에서 알레스의 방으로 밤새 달렸던 날. 잠에서 깬 그녀의 속눈썹이 젖어 있었다.
“요즘은 잘 안 꿔요. 예전에 자주 꿨어요.”
저쪽 세상에서 매일 밤 꿨죠. 눈사람들이 나오는 꿈을.
지금은 저쪽 세상에서 살았던 삶 전부가 꿈인 것만 같고….
무언가 걸렸는지 공작의 낚싯대가 바르르 흔들렸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부모님이 당신을 나에게 보내 준 게 아닐까 하는.”
공작이 불쑥 꺼낸 말에 알레스도 조금 흔들리고 말았다.
지난번 공유 마차에 마법식을 도입하는 일을 조르러 갔을 때, 공작은 자신의 복수에 관해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했다.
그래서 알레스는 밤비에게 그간의 사정에 대해 슬쩍 물어 보았다.
그때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있었고, 짐작만 하던 걸 확인하기도 했다.
선대 공작 부부가 행방불명된 일이라든지, 페레티 백작 부부가 어린 공자에게 선의를 베푼 사연 등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러니 방금 공작이 한 말의 무게를 알레스도 충분히 알았다.
“두서없는 말로 들리겠지만, 부모님은 대단한 분들이셨거든요. 그래서인지 어딘가에서 나를 위해 최고의 선물을 보내 주셨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알레스는 어린 시절 그의 모습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이 애석했다. 무척 귀엽고 예뻤을 것 같았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저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두고 가야 했던 선대 공작 부부의 심정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핫, 내 정신 좀 봐. 이렇게 모성애를 느껴 버리면 냉정한 말은 어떻게 하려고?
알레스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괜히 공작의 낚싯대를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카이트, 뭐가 걸렸나 봐요. 낚싯대가 많이 휘어진 게 길고 거창한 기록인가 봐요.”
알레스의 성화에 공작이 천천히 줄을 감으면서 낚싯대를 들어 올렸다.
바늘에 기록이 하나 걸려 올라왔다. 공작은 그 기록을 도로 호수에 던져 넣었다.
“뼈가 너무 많아서 읽기에 불편할 것 같습니다.”
“아깝게 됐네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낚시는 핑계니까요.”
“제가 왜 왔는지 안 물어보세요?”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제 집에 귀가한 사람에게 왜 왔는지 묻지 않는 것처럼.”
아이 참, 지금껏 칩거하다시피 하며 도덕책이나 쓴 사람이 맞아?
키스도 처음이라기엔 너무 능숙한 것 같고.
나, 잘 설득할 수 있을까?
알레스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
“카이트, 실은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언제나 들을 준비가 돼 있습니다.”
“으음, 그러니까, 제가 당신의 청혼을 거절했잖아요.”
“새삼 가슴이 아프군요.”
“으으음, 그때 카이트가 한 말이 마음에 좀 걸려서요. 절대로 당신이나 당신의 청혼이 부족해서 거절한 게 아니에요. 혹시나 괜한 노력을 하실까 싶어 말씀드리는 거예요. 말하고 보니 저야말로 괜한 걱정을 한 것일 수 있겠네요, 하하.”
“아닙니다. 엄청난 노력을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부족한 건 저예요. 문제가 있는 건 저라고요. 그러니까 혹시 자책하지 마시라고… 말하려다 보니 자책할 생각이 없으신데 제가 괜한 설레발을….”
“아닙니다. 매우 자책하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
뭔가 말려들고 있는 듯한 이 분위기.
“그러니까 제가 드리려는 말씀은! 잘 모르셔서 그런데, 제가 결혼 상대로는 아주 안 좋은 함정이나 올가미 같은 존재라는 거예요. 카이트의 앞길을 콱 막을 거예요. 오죽하면 황제가 절 소박 놨겠어요.”
에이 씨, 내 입으로 이렇게까지 말해야 하나?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 만한 얘기 아니냐고!
눈이 동그래진 공작을 내버려 둔 채 알레스는 공세를 이어갔다.
“그래요, 수렁! 수렁 같은 거예요. 저와 결혼한다는 건 함께 수렁에 빠지는 일이에요. 한번 잘못 빠지면 걷잡을 수 없이 바닥으로 가라앉게 된다고요.”
“당신이 있는 곳이 수렁이라는 건가요?”
“그렇죠. 그러니 굳이 카이트까지 빠지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아, 절 수렁에서 건져 주겠다는 말씀은 마세요. 그러다가 둘 다 빠져 죽는 게 수렁이니까요.”
난 틀렸어, 너라도 살아. 알레스는 이런 비장한 표정으로 공작에게 겁을 줬다.
그러나 공작은 겁을 먹기는커녕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난 알레스를 수렁에서 건질 만한 능력도 자격도 없습니다.”
안 구한다고?
“나 역시 수렁이니까요.”
마성의 블랙홀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라고요. 냄새 나고 더러운 수렁이라니까.
“그래서 한때는 과연 내게 알레스를 좋아할 자격이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나라니까 왜 얘기가 엉뚱하게 흘러가요?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알레스를 수렁에서 끌어올릴 순 없어도 내가 그 수렁에 들어가는 건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당신과 함께라면 이미 그곳은 수렁이 아니겠지만.”
“…….”
나도 당신이라는 수렁에 깊숙이 빠져들고 싶은… 아니, 이게 아닌데.
“당신에게 청혼하면서 정작 내가 생각하는 결혼이 무엇인지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군요. 굳이 수렁에 비유하자면….”
공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골랐다.
‘수렁’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건데. 알레스는 속으로 뜨끔했다.
“상대를 수렁에서 건져 올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수렁으로 뛰어드는 것. 그 수렁 안에서 그럭저럭 행복을 만드는 것. 그것이 알레스 당신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인 것 같습니다.”
홀로 밖에 있는 것보다 함께 수렁 속에 있는 게 더 행복하다… 과연 그럴까.
알레스는 고상한 비유 같은 것으론 공작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떡한다? 다른 쪽으로 접근해야겠다.
“저기, 저기, 카이트 낚싯대가 또 흔들렸어요.”
알레스가 훈훈한 분위기를 깨뜨리기 위해 또 호들갑스럽게 낚싯대를 가리켰다.
공작이 다시 낚싯줄을 감아 올렸다.
바늘에서 기록을 빼내 들여다본 공작은 이번에도 기록을 호수에 던져 넣었다.
“이번에도 뼈가 있거나 재미가 없는 건가요?”
“이번 건 읽지 못하는 기록이었습니다.”
“그건 뭐예요?”
“기록의 호수에는 다양한 문자로 쓰인 기록들이 다 모입니다. 방금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문자로 되어 있더군요.”
생각할수록 신기한 호수일세. 한글로 쓰인 기록도 있으려나.
참,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알레스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카이트의 결혼관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수렁보다 더 큰 문제는 제가 카이트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인지 듣고 싶군요.”
“저는요,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어요.”
알레스가 비장하게 말했다.
“제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저는 카이트가 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번엔 제대로 먹힐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작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또오? 아까도 자기 역시 수렁이라면서 따라 하더니. 이번에도 내가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올리시려고요?
“어쩌면 그 방면으로는 내가 더 전문가일지 모릅니다. 나로 살기로 결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그런 결심을 한 건 바로 알레스 당신 때문이었죠.”
흔들리기 싫어서, 알레스는 질세라 소리쳤다.
“저는 한 번도 제 본모습을 보여 드린 적이 없다고요.”
“그건 대개가 그렇습니다.”
“저는 사기꾼이라고요. 당신을 속여 온 거라고요. 여기까지 온 건 전부 사기를 친 덕분이었다고요!”
“사기가 아니라 수줍은 선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겁니다.”
“사기가 왜 갑자기 선의로 튀어요…?”
“음식 나눔장이나 공유 마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옥수수와 닭을 키우는 농민들이, 또 사교계에서 소외됐던 영애들이,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길 없던 청년들이 당신이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을 겁니다.”
그건 그냥 나 살려고 한 일들인데….
공작의 대단한 착각과 미화에 알레스는 할 말을 잃었다.
“선의라는 건 더 큰 욕심과 이기심 앞에 얼핏 맥을 못 추는 것 같지만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닙니다. 작고 연약한 선의들이 모여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을 지탱하는 겁니다.”
“…….”
누가 도덕책 공작 아니랄까 봐! 누가 눈사람 종족 아니랄까 봐!
알레스는 속으로 가슴을 팡팡 쳤다.
“그럼, 선의를 돌려받을 사람이 사실은 제가 아니라면요?”
“…….”
“제가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선의를 가로채고 있는 거라면요? 예를 들어 페레티 백작 부부, 아니 부모님이 카이트에게 베푼 선의를 돌려받아야 할 사람이 제가 아니라면요?”
호수에 드리운 낚싯대가 또 바르르 떨렸지만, 두 사람 다 무시했다.
“그거야말로 불공정한 거 아닌가요?”
공작은 알레스의 말을 곰곰이 새겨 보는 듯했다. 이번에야말로 할 말이 없겠지? 알레스는 왠지 초조한 기분이 됐다.
“우선 백작 부부의 선의 때문에 알레스에게 청혼한 것이 아니란 점은 그때도 밝혔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별개입니다.”
공작이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의를 베푼 사람이 선의를 돌려받지 못하는 것, 그건 드문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죠. 하지만 그게 바로 선의의 묘미이고 재미입니다.”
“무슨… 어째서 그게 재밌을 수 있는 거예요?”
“언제 어디서 누가 선의의 결실을 거두어들일지 모른다는 게 바로 선의의 깊이와 가치를 더하니까요. 선의를 가진 사람들은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들인 게 분명합니다.”
졌다. 철통 수비, 철벽 방어.
메르세데스 공작이시여, 당신은 진정한 수성과 방어의 달인입니다.
‘역시 상성이 좋지 않아….’
알레스는 패배를 시인하며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 곱게 떨어져 줄 수는 없지. 공작의 약점을 찾자.
공작의 약점은 도덕책!
“제가 진짜 사기꾼이 맞다면요? 카이트가 감쪽같이 속은 거면요? 카이트는 사기에 가담하는 건데요? 사기꾼이 돼도 괜찮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