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불안한 행운
“아가씨, 메르세데스를 알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시급한 건 아가씨 입술을 가라앉히는 일이에요.”
집요한 마사는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특히 자유연애와 관련된 일이라면.
“정확한 원인을 알아야 알맞은 치료법을 찾을 텐데요. 아, 도대체 입술이 왜 그렇게 되신 걸까. 이유가 뭘까?”
들킨 건가. 알레스는 속으로 눈치 9단 유모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며 겉으로는 시치미를 뗐다.
“마사,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난 괜찮아. 요즘 무도회 참석이니 새로운 사업이니 해서 무리를 했나 봐. 좀 쉬면 나아지겠지.”
“예에, 그러셔요. 일은 저희한테 맡기고 좀 쉬세요. 공작 전하도 간만에 쉬시는 건데, 어제처럼 전하와 데이트도 하시고요.”
키스도 또 하시고요.
“데이트라니. 일종의 거래였어, 비즈니스! 그리고 전하야말로 겨울 평화 시즌을 이용해 제도의 사교계에 부지런히 드나드셔야지. 그야말로 데이트도 하시고 연애도 하시고.”
마사가 김빠진 표정을 짓자 밤비 경이 슬쩍 나섰다.
“전하께선 어차피 사교계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알레스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건 과거 일이고요. 요즘은 <빌보아 차트> 순위도 오르고 영애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얼마나 좋으신지 몰라요. 무도회 때 직접 확인했어요.”
“인기야 늘 조용하게 있으셨습니다. 푸른 불꽃의 고결 연모인 클럽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전하는 늘 조신하셨지요. 과거가 메르세데스의 설원처럼 깨끗하십니다.”
밤비가 공작의 순결을 보증하고 나섰다.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던데? 내 입술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것 좀 봐.
이제 와 드는 생각이지만 공작은 과연 그게 첫 키스였을까?
나야말로 첫 키스여서 확신할 순 없지만, 첫 키스라기엔 뭔가 굉장히 능수능란한 듯한 느낌적 느낌이었단 말이지.
알레스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생각을 혼자서 끙끙 했다.
“마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남자는 절대로 믿지 마십시오. 남자는 다 똑같은 늑대입니다.”
지금껏 존재마저 잊힌 채 잠자코 있던 헤라클레스가 불쑥 내뱉은 말이 나름 조리 정연했다.
언젠가 공작도 알레스에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사와 밤비가 따가운 눈총을 쏘아댔다.
“아직 안 갔어요? 자기가 헤프니까 남도 헤픈 줄 알지.”
“헤, 헤프다니요, 마사 부인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나 보고 헤벌쭉 쉽게 웃음을 주잖아요.”
“제가 언제요? 저는, 저는….”
“아가씨, 늑대는 바로 저런 사람이 늑대예요.”
“저, 저는….”
눈치 없이 싫은 소리 좀 했다가 크게 당하는 헤라클레스였다.
헤라클레스가 제도의 ‘팔뚝 연인’으로 등극한 뒤, 마사는 유독 그에게 까칠해졌다.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진심을 알아 달라고 호소하는 눈빛으로 알레스를 바라보았다.
“마사, 그만해.”
알레스가 결국 한마디 거들었다.
“이 여자 저 여자한테 웃어 주는 게 뭐 어때서. 헤라클레스가 임자 있는 몸도 아니고. 한창 구애할 때 아니야. 그리고 멋있어 보이려면 말하지 말고 웃음으로 얼버무리라고 코치해 준 건 나야.”
마님! 이 여자 저 여자라니요! 구애할 때라뇨!
게다가 제가 언제 멋있어 보이고 싶어 했다고!
자기편인 줄 알았던 마님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자 헤라클레스는 휘청거렸다.
마님과 마사 님 정말 너무합니다. 그래도 이성적인 밤비 경은 나의 무고함을….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고 돌아본 밤비는 그를 벌레 보듯 냉랭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입바른 소리 한번 했다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제도의 팔뚝 연인이었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다들 물러간 뒤, 알레스는 자신이 놓인 상황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어젯밤의 첫 춤과 첫 키스, 공작의 청혼, 측근들의 염려와 부추김까지.
‘내 주변엔 왜 이렇게 정상이 없는 거야?’
보통의 상식적인 사람들은 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공작과 망한 가문의 살짝 맛이 간 이혼녀가 결혼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고.
공작이나 마사나 밤비, 다들 이상하지 않은 거야?
진심으로 공작이랑 내가 맺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알레스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공작과 자신을 한 쌍으로 묶으려는 이들 때문에 기가 막혔다.
솔직히 자신이 공작을 좋아하는 거야, 당연한 감정의 흐름이 아니겠는가.
내 처지와 상관없이 누굴 좋아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래서 뭐, 충동적으로 접촉도 하고 질투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그랬지.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는 거잖아. 저 남자가 저렇게 잘났는걸.
하지만 그 모든 건 내 안에서 잘 분리수거 해야 하는 감정들이었다.
공작과는 어디까지나 계약으로 맺어진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호 이익을 추구하면 되는 것이다.
뭐, 정 적적하면 푸른 불꽃의 고결 연모인 클럽에 가입해 몰래 덕질을 하면 되는 거고.
이렇게 지극히 이성적이고 착실한 사고를 하는 내게 왜 자꾸 말도 안 되는 헛바람을 집어넣는 거냐고!
자꾸 이러면 나도 확 미쳐서 공작이랑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수가 있어!
…가 아니고, 그럼 안 되지. 침착, 침착하자.
알레스는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생각을 가다듬어 보니 꼭 남들 탓만 할 게 아니었다.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태도를 분명히 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무턱대고 피하려고만 했지, 자신의 생각을 한 번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일일이 대꾸하기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니까 당연히!
…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차근차근 대화를 나누었어야 했다.
세상에 진심어린 설득과 논리적인 설명으로 해결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공작이 귀 닫고 남의 말을 안 듣는 사람도 아니고. 차근차근 논리로 그를 굴복시키자.
물론 공작도 여러 권의 책을 쓴 사람으로서, 또 평소에 따박따박 훈계하는 걸 보면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겠지만 나도 말싸움에는 일가견이 있으니까.
공작을 상대로 전투력을 불태우는 연애 고자 알레스였다.
다른 일엔 그토록 단호한 알레스가 몇 가지 경우, 특히 친밀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머뭇거리는 이유가 있었다.
그건 일종의 두려움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자꾸만 좋은 사람들이 꼬이는 현실이 낯설고 불안했다.
덥석 마음을 줬다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면 타격이 너무 클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이번엔 다시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이렇게 흘러가는 건 나와 맞지 않아. 여긴 내 자리가 아니야.
이런 생각들이 자꾸만 알레스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저쪽 세상 양자강의 삶에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자꾸만 생겨나고 있었다.
변변한 친구 하나 없이 쓸쓸한 삶이었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되는 일이 없는 우울한 삶이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오자마자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좋아해 주는 친구들이 생겼다. 내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은 내 입술 모양 하나 가지고도 이러쿵저러쿵 회의를 여는 그런 사람들이다. 나중엔 무엇에 대한 회의까지 열지 조금 걱정이 되지만.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일마다 운이 따라 승승장구했고, 간혹 어려움이 생겨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제는 제국에서 가장 빛나는 남자가 미래를 함께하자고 말한다.
이게 대체 올바른 흐름이란 말인가. 나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혹시 원래 알레스의 삶을 훔친 건 아닐까?
과거 페레티 백작이 베푼 선의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딸에게 돌아온 거라면?
정말이지 옳지 않았다. 이건 자신이 누릴 호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쩔 거냐고 묻는다면, 물론 이 삶을 도로 뱉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밥값을 하는 사람 아닌가.
내 노력으로 얻은 게 아닌 것을 날로 먹을 수는 없다.
적어도 공작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한다.
“전하는 아키 낚시터에 가셨다고 합니다.”
알레스가 메르세데스 공작과 만나기 위해 그의 일정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더니 밤비가 이와 같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
기껏 제도에 와서 낚시터라니, 뭔가 아재 냄새 물씬한 것 같은.
이것도 혹시 그 동방에서 왔다는 마스터 현인가 하는 스승의 영향?
적토마 타고 온 강태공인가.
“제도에 낚시할 데가 있어요?”
“아, 아키 낚시터는 제도의 유명한 유적입니다. 제국에 몇 남아 있지 않은 기록의 호수인 데다 규모도 가장 큽니다.”
“……?”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알레스가 기록의 호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눈치 챈 마사가 얼른 끼어들었다.
“아휴, 우리 아가씨가 지식 편식이 심하세요. 관심 없는 쪽은 아예 보지도 듣지도 않으신다니까요.”
그렇게 해서 마사와 밤비에게 들은 내용을 정리하면, 기록의 호수란 세상의 모든 기록이 모여드는 호수라고 했다.
공적인 기록부터 매우 사적인 메모까지 모여드는 차원의 웅덩이 같은 거랄까.
기록들은 어떠한 분류나 맥락도 없이 그곳에 뒤섞여 있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우주에서 가장 거대하고 잡다한 도서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낚시터라는 별칭이 붙은 건, 주로 한가한 신사들이 그곳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사색이나 심사숙고를 핑계로 부인의 잔소리를 피하거나 멍 때리기를 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알레스가 당장 정면 승부를 펼치려는 상대가 지금 그곳에 있다는 얘기였다.
물어보니 아키 낚시터는 사람이 거의 없는 조용하고 한적한 유적지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입장을 조곤조곤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나쁘지 않은 장소 같았다.
무엇보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나란히 앉으면 굳이 얼굴을 마주보지 않아도 되잖아?
대화를 하면서도 상대방의 얼굴이 아니라 멀리 호수 가운데를 보아도 된다는 점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만큼 공작의 얼굴은 피해야 하는 유혹이었다.
정면 승부를 하겠다고 벼르면서 정작 공작의 얼굴은 정면으로 보고 싶지 않은 알레스였다.
* * *
오랜 시간 전장에서 시달려야 하는 메르세데스 공작은 조용하고 아무것도 없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 곳을 좋아했다.
아키 낚시터는 제도에서 드물게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이곳에 온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갑자기 사라진 부모님이 자신에게 남긴 메시지를 혹시 이곳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기대가 크진 않았다. 그는 기록의 호수에 낚싯줄을 늘어뜨리고는 그 옆에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안 그래도 인적이 드문 호수에는 쌀쌀한 날씨 탓에 방문자가 공작 한 사람밖에 없는 듯했다.
물론 불 계열인 공작에게, 그것도 제도의 추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멍하니 누워 있는 공작의 얼굴 위로 자그마한 그늘이 드리웠다.
부모님의 전언 대신 당도한 그 에메랄드빛 구원을 향해 공작은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