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겨울 여행 혹은 일 지옥 오픈
“아가씨, 어제 뭐 뜨거운 거 드셨어요?”
아침식사 자리에서 마사가 미간을 찡그리며 알레스의 입술을 이리저리 살폈다.
“응? 왜? 와, 오늘 빵 잘 나왔네, 헤라클레스.”
뜨끔한 알레스는 먹는 데 열중하는 척하며 딴청을 부렸다.
뜨거운 거, 어제 많이 먹었지.
아니, 먹힌 건가.
“입술이 빨갛게 부어오른 것 같아서요. 뜨거운 데 덴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매운 거 드셨나?”
마사의 말에 밤비와 헤라클레스까지도 알레스의 입술을 유심히 보았다.
졸지에 과도한 관심이 입술에 집중되었다.
“글쎄, 난 모르겠는데? 평소랑 비슷하지 않아? 내 입술 원래 이런데?”
“설마요. 정말 아프지 않으세요?”
“아프긴. 날이 추워서 좀 텄나?”
아파!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된 거야?
“입술이 트고 아픈 데는 꿀이 좋대요. 아가씨, 좀 발라드릴까요?”
“레이디, 차가운 걸로 찜질을 하시는 건 어떨까요?”
“오일이 어떻습니까? 저한테 좋은 오일이 있습니다, 마님.”
부어 오른 입술의 처방에 관한 회의라도 열릴 기세다.
“다들 고맙지만 더 이상의 관심은 사양할게요. 그보다 메르세데스 겨울 여행 상품은 순조롭게 준비되고 있나요?”
슬그머니 일 얘기로 말을 돌렸다.
“예, 말씀하신 대로 공작 전하를 모델로 홍보 포스터를 만들었고 오늘부터 마차에도 부착할 예정입니다.”
디자인 총괄인 밤비가 보고했다.
“첫 여행이라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리면 곤란해서 일부러 홍보 기간을 짧게 잡았는데도 벌써부터 신청이 들어오고 있어요.”
두루두루 전방위 고객 담당인 마사가 말했다.
“지시하신 눈 여왕의 궁전과 얼음왕자의 미소는 오늘부터 마차와 간이 카페에 선보일 겁니다.”
그간 메르세데스식 빙수와 머랭쿠키를 만드느라 알레스에게 시달린 헤라클레스가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르세데스 쪽에서도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고 아이언스 경이 전해 왔습니다.”
지난 축제 강연회 때 손발을 맞춰 본 인연으로 아이언스 경이 메르세데스 쪽 일을 맡기로 했다.
처음엔 냉혈한 같은 인상이었지만, 의외로 깜찍한 아이디어를 낼 줄도 알고 일처리도 깔끔한 능력자였다.
공작의 말대로 아이언스 역시 차갑고 무뚝뚝한 게 아니라 수줍음이 많은 걸까?
그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도무지 연상이 되지 않았지만.
“사탕당근 밭도 관광객이 둘러보기 좋게 단장했고, 농가의 수제 시럽 대회와 시럽 만들기 체험 과정도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평소 눈고양이에게 밥을 주시는 길을 ‘공작과 눈고양이의 길’로 조성해 고양친구 체험을 해 볼 수 있게 했고요. 그런데….”
막힘없이 보고하던 밤비가 잠시 머뭇거렸다.
“지시하신 대로 경치가 예쁜 곳을 골라 빨간 벤치와 눈사람을 곳곳에 배치해 두긴 했다는데, 어떤 용도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간략하게 설명을 했을 텐데.”
“네. 설명을 전해 듣긴 했다는데 그게 무슨 관광거리가 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하긴, 메르세데스의 백상아리 아이언스가 그런 말랑말랑한 감성을 어떻게 단박에 이해하겠어.
“그렇군요. 내 설명이 미흡했을 수 있겠어. 시간이 촉박해서 우리 참모진에게도 찬찬히 설명을 못 한 것 같네요. 지금 얘기할 테니 밤비 경이 듣고 아이언스 경을 잘 이해시켜 주세요.”
둘은 동향이니 밤비가 이해하면 그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앙숙인 듯한 두 사람이 알레스의 이런 생각을 눈치 챈다면 앞 다투어 항의하겠지만.
“경치가 아름다운 설원에 작은 명소를 만드는 계획을 ‘겨울애가’라고 이름 붙일게요.”
“겨울… 애가…?”
저쪽 세상 드라마에서 따온 간지러운 이름에 마밤헬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실 아름답고 청정한 메르세데스의 자연만으로도 관광객들에게 감동을 주기엔 충분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약간의 양념을 치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할 수 있어요.”
“벤치와 눈사람이 그 양념인가요?”
“그건 일종의 장치라고 보면 되고, 진짜 양념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이야기?”
“그중에서도 사랑 이야기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도 없잖아요? 메르세데스를 새하얀 사랑의 성지로 만드는 거죠!”
알레스가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로 힘주어 말했다.
“거창한 건 아니고, 우린 슬쩍 판만 깔아 주면 되는 거예요. 사랑 놀음을 하고 싶은 연인들이 알아서 사랑의 눈덩이를 굴려 가도록.”
자유연애 신봉자인 마사는 벌써부터 기대에 찬 얼굴로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때 얘기 듣기로, 메르세데스의 겨울은 너무나 추워서 입김을 내쉬면 반짝이는 얼음 조각이 되어 떨어진다면서요?”
“네, 맞습니다, 레이디. 어렸을 땐 입김으로 누가 더 재미있거나 신기한 얼음 결정을 만드나 친구들과 시합하며 놀기도 했어요.”
지금의 참한 모습과는 다르게 어렸을 땐 꽤 말괄량이였을 것 같은 밤비가 설명을 보탰다.
“거기서 착안한 건데, 눈사람 커플이 있는 벤치를 예를 들어 ‘고백의 벤치’라고 이름 붙이고 연인에게 고백하는 명소로 만드는 거예요. 고백의 말이 반짝이는 결정이 되어 투명한 별처럼 연인의 손 안에 떨어진다면? 예쁘지 않겠어요?”
“너무 감동적일 것 같아요!”
완전히 감정 이입한 마사가 소리쳤다.
“아름다운 고백의 순간을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해도 좋고, 비용을 조금 더 내면 박제 마도구로 고스란히 박제해 고백 결정 실물을 영원히 간직할 수도 있어요.”
“그런 건 영원히 박제해야죠!”
마사, 현장에서 바람잡이로 활동 좀 하는 거 어때?
“아니면 소소하게 분위기만 살리는 방법도 있어요. 예를 들어 빨간 벤치에 키스하는 눈사람 커플을 앉혀 놓고 ‘키스 벤치’라고 이름 붙이는 거죠. 그 벤치에서 연인이 키스를 하면 그 사랑이 영원하게 된다든가, 뭐 그런 식의 썰을 푸는 거죠.”
키스….
마밤헬의 눈이 약속이라도 한 듯 알레스의 입술로 일제히 모였다.
키스가 있었구나!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이유로 얼굴을 붉혔다.
“왜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알레스가 물었다.
“아니요, 아가씨가 언제 이렇게 연애 박사가 되셨나 해서요. 키스 얘기도 그렇고.”
“박사는 무슨. 돈 벌려면 돈 쓰는 사람들의 심리를 공부해야지, 공부! 다 먹고 살려고 발버둥 친 결과야.”
“뭐든 책으로만 익히는 것보다는 직접 경험해 보는 게 가장 확실한 공부인데 말이죠. 그런 걸 내공이 쌓인다고 하는 거지요.”
마사가 어떻게 해서든 부푼 입술의 비밀을 밝히고자 미끼를 던져 보았다.
“바쁜 세상에 어떻게 일일이 체험을 하겠어요. 하지만 마사의 말이 맞는 부분도 있어요. 경험이 쌓일수록 새로운 아이디어도 늘더라고요. 안 그래도 여행 상품에 추가할 것들이 떠올랐어요.”
헙. 마밤헬이 숨을 들이켰다.
보스의 입술이 궁금했을 뿐인데 추가 업무라는 날벼락이 떨어지다니.
“이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나 봐요. 메르세데스에 라피스라는 마정석이 매우 많다는 걸 알게 된 후 두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두 가지나요!
“겨울이 매우 추운 곳이라 실은 난방 걱정을 좀 했거든요. 다른 지역 사람들은 그런 매서운 추위에 익숙지 않으니까.”
“저도 그 점이 걱정스럽긴 했습니다.”
그곳의 추위를 잘 아는 밤비가 얼른 관심을 보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듯, 추위마저 이용해 보는 거예요. 메르세데스의 추운 날씨에 더욱 빛을 발할 특산품을 개발하는 거죠. 하나는 찜질방이고 하나는 손난로예요.”
찜질방과 손난로라. 그건 또 무엇인가요?
마밤헬이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알레스를 쳐다보았다.
“찜질방은 관광객들이 묵는 숙소에 제공할 시설이에요. 말 그대로 찜질을 하는 방인데, 미용이나 건강에 좋은 재료를 추가할 수 있어요. 얼어붙은 몸을 찜질방에 눕히면 뼈까지 노글노글해지는 게 천국이 따로 없을 거예요.”
그 실체는 아직 잘 몰라도 그 기분만은 생생하게 상상이 되는 설명이었다.
“손난로는 조그마한 크기로 만든 휴대용 온열 주머니라고 생각하면 돼요. 작고 가벼워서 손에 들고 다니거나 옷 안에 쏙 넣고 다니면 관광하며 이동하는 동안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어요.”
이건 관광객뿐 아니라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전장의 병사들에게도 유용하겠다며 밤비가 눈을 초롱거렸다.
“둘 다 아이디어는 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했거든. 그런데 메르세데스에 풍부한 라피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질 좋은 라피스에 온열 기능을 세공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공작이 최고의 불 계열 마법사 아닌가.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엔 브린 황자가 열심히 개발 중인 마법식으로 대체해 대중화하면 될 테고.
푸른 불꽃의 찜질방, 푸른 불꽃의 손난로. 이름도 딱이네, 딱.
찜질방과 손난로는 메르세데스령을 넘어 금세 제국 전역에 퍼져 나갈 초대박 물건이라는 촉이 왔다.
잘하면 또 한 번 쏠쏠한 효자 상품이 탄생하겠다 싶어 알레스는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보며 세 사람은 약간의 공포감을 느꼈지만.
훌륭한 아이디어란 건 알겠지만, 안 그래도 촉박한 시간에 실제로 저것들을 만들려면 또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며 시달려야 할 것인가.
“한 가지 더, 어제 생각한 게 있어요.”
하나 더 남았다고요!
어제 분명 공작 전하와 달달한 시간을 보내셨을 텐데, 아무래도 저 도톰해진 입술은 그때의 여파인 것 같은데….
어째서 그 금쪽같은 시간에 그런 몹쓸 아이디어를 떠올리신 겁니까!
“어제 전하가 노래하시는 걸 듣고 알게 된 건데….”
네에? 공작 전하께서 노래를!
언제나 침착한 밤비가 깜짝 놀라며 포크를 뚝 떨어뜨렸다.
메르세데스에는 노래 부를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는데?
사정을 모르는 마사는 ‘어제 공작 전하가 아가씨께 노래까지 불러 주셨구나.’ 하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키스는 뭐 시간문제였겠네.
“메르세데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문화적으로 낙후돼 있더라고. 그 지역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수줍음이 지나친 나머지 연예 산업 같은 게 발전하기 어려운가 봐.”
밤비가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관광 상품에 노래연극 공연을 넣을까 해요. 관광객들은 물론 그곳 영지민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이번엔 세 사람 모두 감동하며 흔쾌히 엄지를 세웠다. 멋진 아이디어십니다, 레이디!
왜냐하면 공연은 본인들이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니까.
누군가는 죽어나겠지만 나만 아니면 돼!
“안 그래도 눈사람에 대한 그림책을 하나 쓰고 있었거든. 그걸 뮤지컬로 만들어 보려고 샤를테론 단장과도 의논을 해 왔고.”
“아하, 아가씨가 매일 눈사람을 그리시는 이유가 있었군요!”
“음, 조금 쑥스럽네. 우리 꽃미남 마부들의 데뷔 무대를 눈사람 이야기로 하자는 얘기도 나누었어요. 덕분에 데뷔 날짜가 조금 앞당겨지겠네.”
공연 준비로 지옥행 열차를 탈 사람으로 꽃미남 마부들 낙점!
흐흐, 고생들 하십쇼. 남의 고생은 나의 안식.
“마침 밤비 경이 만든 메르세데스의 마스코트도 눈사람 공작이잖아요. 잘하면 이 뮤지컬이 메르세데스를 제국 전체, 아니 세계에 알리는 훌륭한 홍보 대사가 될 수 있어요.”
알레스의 통 큰 포부를 듣고 마밤헬은 꽃미남 형제들을 조용히 애도했다.